[연재] 정의로운 전환, 기후운동판 ‘노동존중’을 넘어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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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연재 기획] 『사회주의자』에서는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기후위기의 실상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연재기사를 마련했다. 연재는 △배출감축 목표, △‘순’배출제로, △‘정의로운 전환’, △‘성장제일주의’, △‘시민’들의 청원운동 방식의 기후위기 대응 등에 대해 차례차례 논의할 예정이다. 이러한 연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자』의 다양한 글들에서 이미 꾸준히 주장해왔던 바로,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이고 사회주의 생태운동을 형성해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다. 이번 기사는 세 번째 주제로 ‘정의로운 전환’의 한계에 대해 다룬다.

① 각국의 2050년 배출제로 선언이 공문구에 그치는 이유

② ‘순’배출제로의 문제점: 탄소 포집 기술은 사기다

③ 정의로운 전환, 기후운동판 ‘노동존중’을 넘어설 수 없다

④ 탈성장,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담론

⑤ 기후위기 해결의 유일한 길: 자본주의와 맞선 노동자 민중의 대중적 투쟁을 만들자

기후위기에 맞서는 방안으로서 ‘정의로운 전환’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린 뉴딜 논의에서도 여러 에너지 전환 정책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고, 문재인 정권도 형식적으로는 ‘just transition’의 다른 번역어인 ‘공정 전환’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수용하고 있다. 또 그린 뉴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도 ‘정의로운 전환’은 긍정적으로 보곤 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전환, 경제적 변화 과정이 노동자나 여성, 원주민, 소수집단, 취약계층 등의 피해 없이, 그들의 불평등과 빈곤이 시정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얼핏 보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이 용어는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입장에서 보면 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개념사

‘정의로운 전환’은 1970년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의 역사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가 「생태사회주의와 정의로운 전환」이란 글에서 자세히 소개했기 때문에 여기서 따로 기술하지 않고, 포스터가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번역, 소개하도록 하겠다.

정의로운 전환은 1970년대부터 1990년까지 ‘석유화학원자력노동자국제조합(OCAW)’에서 토니 마조치(Tony Mazzocchi) 집행부 시절 노동운동의 지도원리로 등장했다. 이 노조는 노동-환경운동을 창출하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마조치는 노동자들이 항상 듣게 되는 “일자리 협박”, 즉 노동자들이 환경조치들을 지지할 경우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말을 우회할 방도를 찾고자 했다. 일자리 협박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정의로운 전환이란 생각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대형기금”을 제안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환경적 전환 비용을 보상해주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는 노동자에 대한 재정지원 및 고등교육 기회 등을 포함했다. 마조치의 말에 따르면, “오물에 대한 대형기금이 존재한다. 노동자에게도 그런 기금이 하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대형기금을 형성하려는 모든 노력은 (기업을 위한 대형기금과는 달리) 지배적인 자본가 이해집단에 의해 곳곳에서 봉쇄당했다.

노동-환경 대의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관념은, 1990년대 초 특히 미국철강노조(USW)에게 넘어갔다. 1990년 ‘우리 아이들의 세계: 철강노동자와 환경’이라는 제목으로 채택된 미국철강노조의 환경정책 성명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환경 파괴에 있다고 믿는다.” 인류는 이제 “우리의 환경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

정의로운 전환의 성격과 관련된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으로, 미국철강노조의 1990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장기적으로 진정한 선택은 일자리냐 환경이냐가 아니다. 그 둘은 전부 아니면, 전무다.”

원 보고서인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회고하면서 2006년에 나온 환경 보고서 ‘우리 아이들의 세계를 보장받자’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의 원 보고서는 지구 온난화를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환경 이슈로 꼽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주된 적은 다국적 기업이라고 미국철강노조는 강조했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은 이번 세기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에 의해 채택되는 한편 국제노동기구의 지지도 얻었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정의로운 전환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노동조합 운동이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도구로써, 보다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이들의 괜찮은 일자리와 생계를 지속케 하는 녹색경제 역량에 대한 포부를 제공한다.” 보다 중요하게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의 관점에서는, 탄소집약적 발전을 이룬 나라들, 점차 탄소집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개도국들, 저탄소 상태에 있으나 기후변화에 매우 취약한 나라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반영하여, 세계적 환경 불평등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욕구에 직면하여, 전세계적으로 노동이 편재된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법도 가능하지 않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은 노동조합을 넘어 주류 기후담론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2015년 파리협약에까지 포함되었다. 파리협약은 전문에서 “국가적으로 규정된 발전 우선순위에 따라 노동인구의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지상과제와 괜찮은 노동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고려”해야 함을 언급했다. 한국 정부도 2019년 5월에 수립된 제3차 녹색성장 5개년(2019-2023)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처음 언급한 후 ‘공정 전환’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전환’의 한계

정의로운 전환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노동자와 다양한 민중 세력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이 대응 과정에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라 좋은 취지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게다가 정의로운 전환 개념 자체가 노동운동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같은 인식이 타당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주장하는 바나 유래가 아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정의로운 전환’은 기존 계급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노동자나 취약계층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호소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프레시안에 실린 2020년 8월 3일자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의 글 「문 정부 그린뉴딜에 정의로운 전환은 없다」는 정의로운 전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린뉴딜은 기업들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과(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린뉴딜 다시쓰기”가 필요하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2020년 10월 16일자 민주노총 기후위기 대응 네트워크의 논평 「노동자, 지역주민이 함께 해야 전환은 가능하다」는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에너지전환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비판하면서 “에너지전환에 따른 지원도 사회적으로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민도 정보를 취득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은 이해 관계자의 민주적 참여에서 시작된다” 등을 말했다.

이러한 사례를 살펴보면, 정의로운 전환은 정책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의 참여와 의견 개진 보장 정도를 주장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미 지금도 정부의 정책 추진과정에서 의견 수렴 절차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의견 수렴 과정을 두고 여러 가지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그것을 지지하는 쪽에서조차 이런 기존 제도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정의로운 전환’은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사회라는 점을 경시하고, 마치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이해당사자가 주체로 나서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논의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한재각의 “기업들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과(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이를 대표한다. 이미 기후위기 해결은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보편화되고 있고, 이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자들이나 여러 민중 세력을 기후운동의 주체로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제아무리 긍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기존 체제를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의 일주체로 내세우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를 지닌다. 이는 노동자를 진정한 사회변혁의 주체로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최근 기후운동뿐 아니라 여러 사회운동에서는 자기 운동의 방향을 ‘정의’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환경정의, 사회정의 등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고 기후운동에서도 기후정의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라는 말은 뭔가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줄 뿐인 구체성이 없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다. 실제 정의에는 어떤 단일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마다, 계급 집단마다 각자 생각하는 정의가 다른 법이다. 자본주의에서 ‘정의’ 관념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관계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는데, 기본적으로 평등한 상품생산자들이 자신의 상품을 제 가치대로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정의’ 개념을 구성하게 된다. 여기서 애초 각 생산자들이 왜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생산하여 매매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형식적인 상품생산자들의 평등 이면에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사라진다. 그런데 정의로운 전환에서 정의 관념도 이러한 자본주의 상품생산관계에서 파생되는 정의 관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상화 된 상품생산자들의 상품교환처럼 기후위기의 이해당사자들이 소외당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문제를 풀어갈 때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다. 여기에는 애초 자본주의가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계급사회라는 인식이나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이해를 반영하여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불분명해진다.

말만 다를 뿐 ‘정의로운 전환’과 비슷한 발상의 구호들은 우리 주변에 더러 존재한다. 그 하나가 ‘함께 살자’이고, 다른 하나가 ‘노동존중’이다. 전자는 경제위기, 경영파탄의 실제 주범은 자본가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에게 ‘함께 살자’고 호소한다는 점에서 계급의식이 매우 부족한 구호다. 후자도 전자와 비슷하게 자본가정치세력, 자본가정권의 ‘노동존중’ 구호가 기만임을 폭로하기는커녕 왜 자신들이 한 말을 지키지 않냐고 말하며 노동도 존중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어버리는 한계가 있다(이에 대해서는 박남일의 「‘노동존중’, 노동착취 은폐하는 자유주의 용어」를 참고하기 바람).

정의로운 전환을 옹호하는 논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틀에 머무는 것이 아닌 더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실제 외국에서는 사회주의 조직 중에는 이런 생각에서 정의로운 전환 개념을 수용한 곳도 있다. 그러나 만약 후자의 의미로 정의로운 전환을 사용한다면 굳이 이런 애매한 용어가 아닌 더 급진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이 아닌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을 만들자!

이제는 실질적으로 계급타협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하는 ‘정의로운 전환’ 요구가 아니라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주도하는 기후운동,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기후운동을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을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들을 기후위기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발전부문 노동자들을 예를 들면, 단지 에너지 전환이라는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피해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에너지 전환을 적극 요구하고 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 기후위기 대응에 미온적인 자본과 싸워나갈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한다. 이 과정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분명히 이해하고 자신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연을 수탈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주력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해에 입각해 지구의 기후시스템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요구들을 제기하며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요구로는 에너지 관련 기업에 대한 국유화와 그렇게 국유화된 기업에 대한 노동자·민중 통제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발전부문의 상당수가 국영기업으로 존재하지만 민영화 역시 상당수 진행되어 민자 발전소가 늘고 있다. 또한 국영 발전소의 경우에도 사적 기업 운영원리가 대거 도입되어 있다. 석유·화학 관련, 재생에너지 관련 다양한 에너지 산업들도 민간 영역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에너지 부문을 국유화하여 사회가 통제하고, 탈탄소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신속하게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기업들을 노동자와 민중이 통제하여 생산의 방식과 생산량을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야간노동 철폐와 노동시간 단축 역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중요한 노동자 요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미 2019년 이후 한국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크게 변화하였고 기후운동 역시 이에 발맞춰 성장했다. 이제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자 대중조직이 기후위기에 적극 나서 자기 발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2월 5일 민주노총 대대에서 기후위기 특별결의문을 채택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자본의 기후위기 대응을 쫓아가면서 노동자도 이해관계자의 하나로 포함시켜달라는 투쟁에 머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부와 자본은 말로만 기후위기 대응을 떠들을 뿐 인류적 재난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본의 이윤을 유지, 확대할 방안이 없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객관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기후위기를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한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정의로운 전환을 자본과 정권에 요구하는 것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기후위기를 노동자들이 전진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과감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에너지 관련 기업들을 국유화하라! 이렇게 국유화된 기업에 대한 노동자·민중 통제를 도입하라! 야간노동을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에너지 소비를 감축하자! 이러한 요구들을 가지고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싸움을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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