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말하지 않는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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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꺼린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자기 본질이 분명이 드러나는 체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용어 대신 ‘자유 시장’, ‘시장 경제’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 말을 이용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체제가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서로 평등한 경제행위자들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각자의 이익을 얻는 체제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 산하 자유경제원이 ‘정글자본주의’라는 말 대신 ‘상생경제’라는 말을 쓰자고 한 게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면 경제위기가 온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경제가 악화된 상황에서 자본가들도 더 이상 허위의 개념으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체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개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영국의 유명한 경제매체 ‘파이낸셜 타임즈’의 경우 2012년 경제상황이 다시 악화될 기미가 보이자 “위기의 자본주의(Capitalism in Crisis)”라는 시리즈를 기획하여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올해 초 경제위기 가능성이 높아지고 2008년 이후 계속된 경제침체로 대중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전통의 자본가 언론 ‘타임즈’는 “미국 자본주의의 대위기(American Cptialism’s Great Crisis)”라는 글을 게재했다.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서 ‘자본주의’란 용어를 쓰는 게 아님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최소한 위기상황에서, 노동자민중이 처한 삶의 문제가 바로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능은 오랜 지배를 통한 습득한 것이다.

자본주의 비판에 나선 김무성

한국에서도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자 자본가들 사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을 간간히 보게 된다. 예컨대 강만수 전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2012년 6월 한 기자간담회에서 경제위기가 오래 갈 것이라고 예측하며 “자본주의는 끝났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집권여당 대표를 지낸 김무성의 입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지난 8월 1일부터 이른바 ‘민생투어’를 진행한 김무성은 8월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격차해소와 국민통합 경제교실’을 열고, “한국인의 72%는 한국 자본주의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다.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쓰라린 좌절감이 원인이 되면서 한국사회가 분노의 시대로 진입한 것”과 “엄중한 위기감으로 국가의 생존본능을 일깨워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 뜯어고쳐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는 주장을 했다.(중앙일보, 비박계 모아놓고 좌향좌 경제교실 연 김무성 “경제 양극화는 정치양극화 불러와“)

김무성의 주장에는 명백한 계급적 입장이 담겨 있다. 김무성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거론하지만 그 목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여 이 불만이 자본주의 체제 내로 다시 수렴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는 “진정한 자본주의”를 실현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최소한 새누리당 전대표로 수구꼴통 행태를 보여 온 부르주아 정치인조차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무성조차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데에서, 우리는 악화되는 모순으로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탄내고 있고 그것 스스로도 구제불능에 빠진 자본주의의 위기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한사코 자본주의를 거론하지 않는 진보정치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상황은 굳이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재 한국자본주의는 심각한 사회문제 어느 하나 해결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사회 곳곳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이 바로 이른바 진보정치, 진보운동이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사실이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른바 진보정치, 진보운동은 자본주의가 문제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정치, 진보운동은 김무성과 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보다도 못한 시대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9월 7일 ‘매일노동뉴스’ 주최로 열린 “진보정치 17년, 그 길을 묻다” 좌담회는 이런 진보정치, 진보운동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좌담회에는 김상구 금속노조 위원장, 이성우 공공운수노조 정책위원, 임순광 비정규교수노조위원장, 김종훈 무소속 의원이 참여했다. 사회자의 발언에 따르면, 좌담회는 노동자 당면요구와 투쟁, 노조운동의 혁신발전, 지난 진보정치에 평가,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현방안, 2017년 대선 및 2018년 지방선거 대응을 다루었다. 이 좌담회가 개최된 배경은 바로 민주노총 정책대대에서 정치방침이 모두 무산된 데에 있다. 이 속에서 좌담회는 정치방침 논의를 다시금 촉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진보정치가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고민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매일노동뉴스 주최 좌담회 참석자 주요 발언

임순광 “차이는 인정하지만 같이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내서 공동활동을 같이”해야 한다

이성우 “왜곡된 정파가 가장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는 사이 소통하지 못하고 나뉘어졌다.” “대중의 요구는 진보정당을 따로 만들지 말고 진보정치의 큰 흐름을 만들어 가라는 것이다.”

김상구 “진보진영을 통합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되겠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되게 하려면 방법이 뭔가. (진보통합이란) 목표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토론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김종훈 “정치 대안을 중심으로 가려면 모두가 하나가 돼서 단결하고,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좌담회의 참여자 모두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진보정치가 제대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분열’에 있고 ‘단결’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참석자들 사이의 차이는 진보정치를 단결시키는 정치공학의 차이 외에는 없다.

좌담회 기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커녕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 좌담회의 내용을 축약해서 담게 되는 기사의 특성상 일부 내용이 기사에 담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기사에 누락되는 토론내용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중요성이 없다고 판단한 내용이기 때문에, 좌담회 전반적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진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보정치를 몰락하게 만든 핵심 이유는 분열 때문도 종파주의 때문도 아니다. 17년간의 진보정치는, 자본주의 모순이 격렬해져서 심지어 수구 부르주아 정치인조차 자본주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본주의를 전혀 공격하지 않고 우경화로 일매진해왔기 때문에 몰락했다. 매일노동뉴스 주최 좌담회는 17년 진보정치의 길을 묻겠다고 했지만, 이러한 평가와 반성이 전혀 없다. 오히려 지난 17년 진보정치에 “긍정적인 게 많았다”는 자기만족적 평가만 들릴 뿐이다.

노동자, 민중이 살기 힘들어 아우성을 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 대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전혀 안 가진 세력들이 하나로 단결해봤자 우경화를 또 다시 반복하며 자유주의 세력과 야합하는 것 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진보가 분열로 망했고 단결해야 한다는 한가한 이야기를 재탕, 삼탕 하는 것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자신의 앙상한 시대인식부터 자각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점은 부르주아 정치인의 인식보다도 못한 진보정치, 자본주의는 한사코 거론하지 않는 진보정치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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