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산성’, 방역을 핑계로 한 문재인 정권의 집회의 자유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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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10월 3일과 9일. 경찰은 일부 극우세력의 집회가 예상된 서울 광화문 광장을 봉쇄했다. 버스를 이용한 차벽과 철제 펜스 등으로 광장을 봉쇄하고 검문검색을 벌이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이명박 정부가 선보인 ‘명박산성’을 문재인 정부가 재현했다는 의미에서 ‘재인산성’이라는 말이 나왔다. 정부는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된 뒤에도 광화문광장 집회는 원천봉쇄하고 일반 집회도 100명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불법집회’ 참여자는 현장에서 즉시 검거하고, 운전면허 정지 등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한다는 방침도 국무총리의 입을 통해 공표되었다.

억눌린 대상이 다를 뿐 집회의 자유를 정부가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점에서 ‘명박산성’과 ‘재인산성’은 닮았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두 장벽의 성격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의 김태년 원내대표는 “방역을 책임지는 당국으로서 매우 적절한 조치”라 했고, 강선우 대변인은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코로나와의 전쟁이다. 차벽은 우리 국민 여러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했다. 논란이 증폭되고 있음에도 정부와 여당 내에서 집회의 자유나 기본권 제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전쟁’이 벌어지는 전시체제이니 집회의 자유쯤은 접어두라는 엄포로 들린다.

코로나19 핑계로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문재인 정권

집권 여당과 그 지지자들의 어법은 사실상 ‘코로나 계엄령’ 선포에 가깝다. 그런 속내는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SNS에 올린 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지금은 정부 방역당국과 국민이 똘똘 뭉쳐 코로나19와의 전쟁 중”이며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집회를 국민의 뜻에 맞게 차단한 것”이라는 입장을 게재했다. 왠지 낯설지 않은 어법이다. ‘방역’을 ‘공안’이나 ‘안보’로 바꾸고, ‘코로나’를 ‘좌경세력’이나 ‘간첩’ 따위로 바꾸면 지난 70년 동안 반공주의에 기대어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던 수구세력의 어법과 거의 일치한다.

광화문 광장이 차벽으로 막힌 날에도 도심 백화점이나 용인 에버랜드, 과천 서울대공원 등에 수천, 수만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정부와 여당 측 주장은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날마다 수백만 명이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로 이동하는 현실에서 문재인 정부가 유독 청와대에서 가까운 광화문 일대를 봉쇄하는 이유가 단지 코로나19 방역 차원으로 설명되기는 어렵다. 다만 집권여당은 광화문 일대에서 집회를 시도한 주체가 코로나19 집단감염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눈총을 받아온 특정 세력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집회’는 공권력으로 억눌러도 된다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여론 동향에 따라 집회를 선별적으로 허용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는 집권세력의 인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대로면 여성주의자들의 집회나 성소수자들의 집회도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경우에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원천봉쇄할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 집회는 물론이고 민주노총의 집회도 다수의 여론이 반대하면 공권력으로 깔아뭉개도 문제가 안 된다. 정부 입장에서 불편한 집회는 ‘국민의 반대’를 이유로 봉쇄해버리면 그만이다. 문재인 정부는 내심 코로나19를 핑계로 ‘집회 없는 시대’를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그로써 문재인 정권은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집회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지배 권력의 본성

사실 경찰버스나 컨테이너로 집회를 봉쇄하는 건 이명박 정부나 문재인 정부에서만 쓴 수법은 아니다. 집회 봉쇄를 위한 차벽이 처음 등장한 건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였다. 컨테이너 장벽 또한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11월, 쌀 개방 반대 시위가 벌어진 아펙(APEC) 부산 회의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따지고 보면 ‘재인산성’이나 ‘명박산성’의 원조는 ‘무현산성’이었던 셈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도 2015년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에 차벽을 세우고 집회를 방해하여 ‘근혜산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2000년대 이후 모든 정권은 공권력의 장벽을 이용하여 집회를 억압했다. 이쯤 되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집회를 관리하고자 하는 것은 지배 권력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재인산성’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문재인정부의 집회금지 조치에 대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대응이다. 10월 3일, 광화문광장에 차벽이 등장한 이후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으로 대표되는 수구보수 언론은 연일 집회의 자유를 들먹이며 ‘재인산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공중파 방송이나 민주당에 친화적인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러한 의제를 마지못해 다루기는 하면서도 방역 당국과 집회 단체에 대한 양비론적 태도로 일관했다. 더욱 답답한 건 집회 억압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민주노총이 이와 관련된 성명이나 논평을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청년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꾸준히 “광장을 열자”며 집회 금지를 규탄해왔고, 지난 9월 29일에는 전국 52개 인권시민노동사회단체가 모여 “방역지침 지키겠다는 드라이브스루집회까지 처벌하겠다는 건 행정권 남용, 정부는 모이고 말할 권리를 보장해야”라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노동해방투쟁연대(노해투)는 기관지 『가자! 노동해방』(10월 11일자)에 문재인 정부의 집회 억압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정부가 코로나19로부터 국민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이미지, 집회 시위를 조직하는 세력은 방역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낙인 효과를 위한 정치 쇼였을 뿐”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집회 억압을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집회 시위 자유는 조금도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반동적인 집단의 ‘권리’를 옹호하는 건 아무런 진보적 성격을 가질 수 없다”면서 도로 ‘재인산성’에 정당성을 부여해버리는 모순을 연출하였다.

집회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대척점에서는 “급진적 좌익 세력의 집회도 금지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리고 상반되는 두 주장의 합일점은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쪽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것은 현실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권력에서 배제된 노동자 민중에게는 암흑 같은 이야기다. 집회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라는 게 상식이다. 오히려 특정 정치세력의 집회를 금지해야 한다는 발상이야말로 반동적이다.

말 그대로 집회의 자유란 사람이 모여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모일 권리’ 자체를 막는다는 것은 폭력이다. 집회의 자유가 ‘특수한 권리’가 아니라 ‘기본적 권리’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집회와 시위를 하는 데 누군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당국에 신고만 하는 것으로 그 행사가 가능하다. 한국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코로나19 감염자가 많이 발생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일반적인 방역 수칙을 요구할 뿐, 집회와 시위 자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여러 이유로 억눌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의견을 선전하여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요구를 관철하는 게 통상적인 집회의 목적이다. 따라서 지난 8.15집회에서 일부 극우세력이 보여준 것처럼, 대중적 공감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집회는 스스로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집회 행위가 범죄적으로 흐르지 않는 한 공권력이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10월 3일, ‘재인산성’을 구축하여 이들의 집회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오히려 극우세력의 망동에 일말의 명분마저 부여해버렸다.

광장을 되찾고 집회를 되살리자

일부 수구 언론은 재인산성의 등장을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안정국의 부활’로 규정하기도 한다. 공안정국이란 집권세력이나 정부가 마치 사회질서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정치적 국면을 의미한다. 과거 노태우 정부가 안보를 빌미로 노동자, 민중을 탄압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지금의 문재인 정권이 코로나 위기를 과장하며, 반공 대신 방역을 빌미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있어서 공안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국면은 노동자, 민중을 직접 탄압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대규모 검거와 구금 같은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공안정국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건 ‘재인산성’이 특정 극우세력의 집회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도 마찬가지로 원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은 4년 전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수백 만 민중의 촛불에 기대어 탄생했다. 따라서 광화문광장은 현실 권력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권은 일찌감치 자본가계급의 편임을 드러냈고, 급기야 코로나19를 핑계로 촛불의 성지인 광화문 광장을 봉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로나 계엄령’이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자유주의 정권의 내면을 은폐하는 데 당장은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음흉한 자유주의 정권의 위기를 재촉할 뿐이다. 감염병 방역은 그것대로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노동자, 민중에게는 광장을 되찾고 집회를 되살리는 일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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