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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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간의 ‘공정’ 논란에 이어 ‘능력주의’ 논란이 한창이다. 한국 정치사상 최연소 제1야당 대표 이준석이 논란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는 당대표에 취임하자마자 공직후보자 자격시험을 제안하고 청년할당제와 여성할당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등 능력주의 강화를 주장했다. “공정경쟁의 토대가 마련된다면 승자독식도 공정”하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준석은 2019년에 출간된 대담집 「공정한 경쟁」에서 ‘공부로 서열이 매겨지는 무한 경쟁이야말로 공정한 경쟁’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준석의 이러한 발언들은 최근 수년 동안 ‘공정’ 담론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를 향한 정치적 포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는 마당에, 거꾸로 능력주의의 깃발을 치켜세운 이준석의 정치 전략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부딪혔다. 심지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보수 언론조차도 이준석의 능력주의 선동에 제동을 걸었다. 예컨대 조선일보 6월 25일자 윤평중 칼럼은 ‘공정경쟁만 강조하는 이준석의 닫힌 능력주의는 문제가 있으므로 패자 부활이 가능한 열린 능력주의를 지향’할 것을 주장한다.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자유주의 언론의 비판은 더 적극적이다. 능력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능력이 세습되는 시대에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통령 문재인도 6월 28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지금이야말로 능력과 경쟁이라는 시장지상주의의 논리를 경계하고 상생과 포용에 정책의 중점을 둘 때”라며, 야당 대표의 능력주의 선동을 에둘러 비판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불과 4년 전의 취임사를 떠올려보면 꽤나 전향적이다.

자유주의의 산물인 능력주의는 어쩌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을까

사실 ‘공정한 경쟁’이라는 화두는 이준석 이전에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의 좌우명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군부독재에 저항한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저변에도 불공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은 정권의 탄생을 위해 투쟁했다. 결국 1990년대 정권교체와 함께 자유주의 세력은 한국 사회 주류로 성장했다. 이들은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공정한 경쟁을 지상의 가치로 내세웠다. 명문대를 거쳐 능력주의 경쟁을 통과한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단단한 지배질서를 구축했다.

물론 경쟁에서 탈락한 다수는 저임금 생산직에서 잉여노동을 착취당하였지만, 가끔씩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성공 신화로 이들의 불만은 무마되었다.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만 보장된다면 능력주의가 계급 상승의 사다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능력주의 경쟁의 결과는 노동 부문 간의 심각한 임금 격차를 불러왔다. 게다가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일자리는 감소하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의 세계 금융공황을 겪으며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헬조선’ 소리가 나올 만큼 하층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의 지옥으로 변했다.

그런 터에 문재인 정권의 핵심 인사인 조국의 딸에 대한 특혜 의혹이 불거졌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정권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일이었다. 이른바 ‘조국 사태’는 부모의 능력이 합법적으로 자식에게 세습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자유주의의 산물인 능력주의가 자유주의자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목격한 대중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이때 하버드대 출신 엘리트 이준석이 청년 세대의 선지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수구보수 정당에 둥지를 튼 그는 교묘히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기성세대에 의해 망가진 능력주의를 더 강력하고 완벽한 능력주의로 대체하자고 외쳤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과 상식을 거스른 이준석의 능력주의 선동은, 조국 사태로 할 말을 잃고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던 자유주의 논객들에게 할 말을 제공했다. 수구보수의 젊은 아이콘 이준석이 능력주의를 선동하는 한, 그와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는 자유주의자들은 능력주의를 비판해야 했다. 자유주의의 산물인 능력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의 비판 대상이 된 배경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감추어진 마이클 샌델의 착각

한편 지금 벌어지고 있는 능력주의 비판의 배후에는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이 있다. 하버드대 학부 출신 엘리트로 최연소 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이 ‘공정한 경쟁’을 외치며 한국에서 능력주의를 선동하는 동안,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된 ‘원조’ 엘리트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능력의 독재(The Tyranny of Merit)』를 펴냈다. 한국에서는 2020년 12월에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제목부터 이준석의 대담집 『공정한 경쟁』과 대립하는 느낌이다. 마이클 샌델의 명성에 더하여 제목이 주는 강렬함 때문에 『공정하다는 착각』은 한국에서 능력주의 논란의 중심으로 호출되었다.

독재가 타도의 대상인 것처럼,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또한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경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설령 공정한 기회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능력주의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샌델은 묻는다. “모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경쟁하는 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 것인가?”(198쪽)라고. 그리고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199쪽)고 단언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비판은 사뭇 비장하다.

그런데 문제 제기의 비장함에 비해, 샌델이 내놓은 메시지는 초라하다. 능력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247쪽)하라는 식이다. 또 ‘유능력자 제비뽑기’로 명문대 입학생을 선발(287~290쪽)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시민적 공동선(Common Good)’ 개념과 ‘조건의 평등’을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내놓는다. 즉 시민적 공동선에 기여하는 일(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도록 하고(323~327쪽), 허울뿐인 ‘기회의 평등’을 넘어 ‘조건의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건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능력을 쌓아야 한다!

비록 샌델의 말은 아름답지만, 그 말이 능력주의를 무너뜨리는 실천적 수단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요컨대 샌델의 메시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능력주의로 성공한 엘리트들에게 부디 겸손해달라고 사정해야 하며, ‘성적 경쟁’으로 치러지는 명문대 입시를 ‘행운 경쟁’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 시민적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람은 경제적 보수가 낮더라도 사회적 인정만 받으면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죽을 지경이어도 평등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샌델이 내놓은 대안들은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샌델은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비판이 승자의 오만을 경계하고, 패배자의 절망에 위로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겪고 있는 다수의 ‘패배자’들에게 대안 없는 비판은 위로도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실상이 아니라 그 실상을 극복할 대안이다. 그 점에서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실의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만 비판하면 된다는 착각에 빠진 듯하다. 그러한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을 답습하고 있는 한국의 논객들도 마찬가지이다.

능력주의 비판으로 자본주의 비판을 가리다

한국어판 『공정하다는 착각』의 띠지에는 ‘마이클 샌델, 10여년 만에 던지는 충격적 화두!’라는 광고 문구가 선명하다. 그런데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 논지가 ‘충격적 화두’가 될 만큼 신선한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 비판은 이미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원조는 1958년에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The Rise of Meritocracy)』을 출간한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이다. 능력주의의 원어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도 이 소설 제목에서 유래했다. 소설은 10대 초반의 학교 성적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결정되는, 영국의 삭막한 능력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상위 5퍼센트 엘리트가 나머지 95% 인구를 계급적으로 지배하는 영국의 암담한 미래 사회를 경고한다.

이후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미국으로 계승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표현되듯, 한때 미국은 능력주의 신화가 실현되는 기회의 땅으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은 차별과 불평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특히 2008년 대규모 금융공황 여파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은 극대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부 자유주의 사회학자들은 미국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실례로 2015년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들인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주니어는 능력주의 신화를 비판한 『능력주의 신화(The Meritocracy Myth)』를 펴냈다. 한국에서는 『능력주의는 허구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능력주의 신화는 허구이며 학벌, 상속으로 인한 부의 세습 등으로 오작동 되는 능력주의는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2020년 말경에는 능력주의 비판과 관련한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먼저 미국 예일대 로스클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가 쓴 『엘리트 세습』이 출간되었다. 원제목은 ‘능력주의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박권일 등 여러 분야 필자 10여 명의 글을 모은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나왔다. 이어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국내 서점에 등장했다. 이처럼 능력주의 비판은 20세기 중반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독보적으로 능력주의 비판을 다룬 책도 아니며, 게다가 독자들에게 ‘충격적 화두’를 몰고 온 책은 더더욱 아님을 보여준다.

한편 경제공황과 코로나19 등으로 범인류적 위기가 고조되고 불평등이 심각해진 2020년에 즈음하여 능력주의 비판이 활발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 비판이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현실을 반영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능력주의 비판 논지의 대부분은 계급 상승 수단으로 여겨지던 능력주의가 오늘날에는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도 ‘계급상승의 통로로 인식된 능력주의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계급상승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대신 엽관(躐官)제나 신분제를 도입하면 불평등이 완화될 것인가.

하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애초부터 틀렸다. 불평등은 능력주의나 엽관주의 같은 인사 방식이 아니라, 그 사회의 생산관계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계급사회는 불평등을 전제로 유지된다. 자본주의 또한 노동력의 상품화와 임금 노동을 토대로 한 계급사회이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계급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건 정설이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을 논할 정도로 생산력이 극대화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은 과거보다 훨씬 심각하다. 불평등의 진짜 원인이 잉여노동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불평등을 “능력주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본질적 비판을 가리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문제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신분이나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재능이나 노력 등 내재적 요소로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능력주의 경쟁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다. 심지어 경쟁에서 이긴 유능력자는 패배한 무능력자를 합법적으로 억압할 수도 있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내세워 결과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제대로 비판하려면 기회의 평등이나 과정의 공정성 여부가 아니라 결과의 불평등에 주목해야 한다. 불공정한 경쟁 때문에 불평등한 결과가 생기는 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불평등한 결과를 낳는 모순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물론 능력주의 비판자들도 능력주의가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점은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은 승자와 패자의 소득격차가 사라지면 능력주의 문제도 사라진다는 간단한 해법은 외면한다. 이들은 또 ‘능력의 세습’은 문제로 제기하면서, 상속이나 양도를 통한 부의 세습을 제한하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능력주의가 문제라고 아무리 떠들어본들 현실의 차별과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수구정당 대표 이준석이 말하는 능력주의가 허구인 만큼, 자유주의자 세력의 능력주의 비판도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은 사적 이익을 얻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능력 경쟁을 멈추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멈추지 않는 한 능력주의를 극복할 방안도 없다는 뜻이다. 명망 높은 엘리트들의 능력주의 비판에 답이 없는 것도 그들이 자본주의 틀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능력주의 비판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능력주의 비판은 불평등한 현실의 본질을 은폐할 뿐이다. 결국 위태롭고 불평등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능력주의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 비판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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