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교차성: 여러 억압의 기계적 결합에 머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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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사회주의로 다시 보는 페미니즘 개념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도서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연재하였다. 이 기사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읽고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제 페미니즘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거나,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개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연재는 가부장제, 가족임금, 상호교차성, 사회재생산 순으로 다룬다. 독자 여러분들의 활발한 관심, 토론 기대한다.

요즘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는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1월에 언니네트워크에서 발행한 퀴어페미니스트 매거진 『펢』 2017년 특별판에는 상호교차성 개념을 설명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여러 편 실렸다. 미국에서는 이미 상호교차성 개념이 주류화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트위터나 연설에서 ‘상호교차적’ ‘상호교차하는 쟁점들’이라는 말을 썼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월스트리트를 비판하고 계급적 불평등을 폭로하는 샌더스를 경제 문제에만 집중하는 편협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전술이었다고 한다.

상호교차성은 1989년 킴벌리 크렌쇼라는 흑인 페미니스트 법학자가 법적인 차별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처음 쓴 개념이다. 여성이라 해서 무조건 같은 억압을 겪는 게 아니며, 여성억압, 인종적 억압, 계급적 억압 등 여러 억압의 ‘교차점’에 놓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제껏 미국의 기존 페미니즘 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에선 여성, 성소수자 등이 각자 자기 정체성에 근거해서 자기가 받는 억압에 맞서 싸우면 된다는 ‘정체성 정치’가 주류였다. 상호교차성 개념은 이것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호교차성 개념은 여러 억압들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킬 뿐 억압을 인식하는 총체적 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 글은 상호교차성 개념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이 개념이 갖는 한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상호교차성이 등장하기까지

상호교차성이 페미니즘의 최신 인기어가 되었지만, 이 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상호교차성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상호교차성이라는 말 자체는 앞서 언급했듯이 1989년에 킴벌리 크렌쇼가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그 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상호교차성의 근본적 내용은 1977년 ‘컴바히 강 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의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에 이미 담겨 있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의 중론이다. 1960-70년대 미국 내 신좌파(New Left) 운동에서 흑인 여성들의 위치는 복잡했다. 그들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블랙 파워(Black Power)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흑인 민족주의 운동에서도 주변화되어 있었다. ’컴바히 강 공동체‘의 결성과 흑인 페미니즘의 등장은 바로 흑인 여성들의 이런 처지에서 비롯된 고민의 결과였다.

① 제2물결 페미니즘에서 배제된 흑인여성

1960년-70년대 미국에서 민권운동,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사회주의 운동이나 급진 운동의 전통이 끊긴 상황에서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에, 이때의 운동을 ‘신좌파’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NCC)등 대규모 신좌파 조직들은 인종적 평등, 전쟁 반대 등 진보적 이념을 말하면서도 정작 여성억압 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조직 내 성차별, 성폭력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1967년 ‘신정치 전국회의’(NCNP)를 계기로 그런 기존의 조직들과 단절한 후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에 나섰고, 그것이 급진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그런데 급진 페미니즘에 참여한 여성들은 대개 백인이었다. 물론 흑인 여성들도 기존 조직 내에서 성차별, 성폭력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백인 여성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았던 반면, 흑인 여성들은 여성억압뿐 아니라 인종적 억압, 계급적 억압도 받고 있었기에 그것만이 근본적이라는 진단에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모든 남성이 억압자라는 관점도, 인종적 억압에 맞서 싸울 때는 흑인 남성들과 동지가 되어야 하는 흑인 여성들의 상황과 잘 맞지 않았다. 결국 흑인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② 흑인운동에서도 소외된 흑인여성

한편 1970년대가 되면서 ‘블랙 파워’(Black Power) 구호가 부상하며, 기존 민권운동보다 강경한 흑인 민족주의 운동, 분리주의 운동에 힘이 모아졌다. ‘흑표범당’(Black Panther’s Party)도 그런 운동을 표방한 정당 중 하나였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입각한 정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백인 중심의 문화, 역사 서술 속에서 부끄러운 것,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흑인의 문화, 경험, 정체성이 사실은 자랑스러운 것임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문화, 경험, 정체성이 흑인 남성의 문화, 경험, 정체성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흑인 남성이 이제까지 인종차별 때문에 억눌려 왔던 남성성을 회복하는 것이 흑인의 해방이기 때문에, 흑인 여성은 남성의 기를 세워 줘야 한다’는 담론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흑인 남성성’을 강조하고 여성에게 보조적인 역할을 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흑인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주체로 서기 어려웠다.

③ 상호교차성의 선구자, ‘컴바히 강 공동체’의 결성

이런 상황에서, 흑인 민족주의 운동과도, 백인 중산층 여성 위주의 페미니즘과도 차별화되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을 지향한 흑인 여성들이 보스턴에서 1974년 무렵부터 서로 교류하며 결성한 것이 바로 ‘컴바히 강 공동체’였다. 조직의 이름은 1863년 남북전쟁 기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컴바히 강에서 있었던 군사행동에서 따왔다. 해리엇 터먼이라는 흑인 여성이 지휘한 이 군사행동으로 700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 ‘컴바히 강 공동체’가 발표한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 중 다음 부분은 실제로 그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며, 상호교차성의 핵심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인종적 억압, 계급 억압, 성적 억압이 동시에 경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계급 억압이나 성적 억압으로부터 인종적 억압을 분리해내는 것이 많은 경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저 인종적인 것만도 아니고 그저 성적인 것만도 아닌, 인종적-성적 억압 같은 것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정치적-경제적 체제의 분쇄가 필수적임을 인식한다.”고 선언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④ 또 다른 선구자, ‘빵과 장미’

그리고 그때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린다 고든이 2016년 상호교차성에 대해 쓴 글에 따르면, “제2물결 페미니즘 속 상호교차성의 선구자들” 중에는 백인 여성들도 있었다.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라는 단체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빵과 장미’는 1969년 가을 보스턴에서 창립되었으며 주로 20대 고학력 백인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린다 고든 자신도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들처럼, 이들은 섣불리 ‘자매애’를 말하기 전에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계급적 차이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성찰했다. 예를 들어 이 단체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던 메레디스 택스(Meredith Tax)는 “우리는 우리 중 대부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객관적 위치가 ‘복지맘(welfare mothers)’들과, 우리 백인 어머니들의 흑인 가정부들과, 제3세계 여성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는 자매애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주의 사회는 모든 형태의 착취, 인종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남성 우위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가령 이들은 흑표범당 활동가들이 국가의 탄압에 시달릴 때 연대 투쟁에 힘썼다.

한계: 억압들에 대한 기계적 병렬과 다원론

상호교차성에 따르면, 흑인이자 여성이자 노동자인 사람처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흑인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데 여성만 해방된다거나, 여성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데 노동자만 해방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호교차성 이론은 여성이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모든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인종적 억압, 계급적 억압도 문제 삼아야 하고, 자본주의, 제국주의와도 싸워야 한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는 분명 기존 페미니즘 이론에 비해 진일보한 인식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샤론 스미스와 같은 미국의 맑스주의자는 상호교차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상호교차성이 억압의 근본적 원인을 도외시하고 여러 억압을 단순 병렬하는 듯 보이는 것은 상호교차성 자체의 한계가 아닌 상호교차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한계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컴바히 강 공동체’ 등의 흑인 페미니즘이 이야기한 상호교차성은 사회주의와 연결될 수 있을 만큼 반자본주의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상호교차성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상호교차성의 선구자들”이라고 거론되는 두 단체의 실제 실천을 살펴보면, 그 당시부터 이미 상호교차성의 한계가 나타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컴바히 강 공동체’나 ‘빵과 장미’ 활동가들은 진실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계급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본주의와 맞서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억압들을 나열, 병렬했을 뿐 이 억압들을 하나의 총체적, 통일적 이론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사실 여러 억압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접근은 상호교차성 개념이 인기를 끌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흐름이었다. 가령 젊은 시절 ‘빵과 장미’에서 활동했던 린다 고든도 상호교차성 개념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그게 두 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의 핵심 전제, 즉 지배의 여러 개의 형태들이 상호작용하고 융합된다는 것과 뭐가 다르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역시, 여성 문제와 계급 문제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고, 두 문제가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시키기 위해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한 ‘가부장제’ 범주를 받아들여 자본주의와 나란히 병렬시켰다. 자본주의가 생산양식이라면 ‘가부장제’는 ‘재생산’ 양식이고, 전자가 계급억압의 장소라면 후자는 여성억압의 장소이므로,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혁명이 둘 다 필요하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이것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억압 구조를 이론화했기 때문에 ‘이원론’이라고 불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원론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이 완전히 독립되어 따로 존재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시키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합은 기계적 결합에 머물렀고 이론과 실천이 전개되어갈수록 양자가 서로 분리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역시 이런 이원론의 한계를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답습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 이론 내 상호교차성의 개념」(Anna Carastathis, 2014)이라는 논문은 이론적 틀로서 상호교차성이 가진 분석적 이점으로 환원불가능성(irreducibility)을 내세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억압이라는 현상을 하나의 근본적인 설명적 범주(예를 들어, 계급)로 환원하고 그 범주를 존재론적으로 특권화하는 대신, 상호교차성 이론가들은 억압이 복수의, 탈중심화된, 그리고 함께 구성하는 축들을 통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통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들, 예를 들어 계급이 젠더와 인종에 대해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우선순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젠더와 인종은 부수적 현상으로 보는 접근들을 반박하는 것이다. …… 상호교차성은 (특히) 몇몇 맑스주의자들이 ‘계급’이나 ‘경제적 토대’에 부여하는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우선순위를 반박하는 인식론적 가치이다. 상호교차성의 ‘특징(hallmark)’은 …… ‘모든 억압에 대해 다루는 것의 필수성’이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상호교차성이 여러 억압의 기계적 결합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심지어 위 논문에 따르면, 이런 기계적 결합은 이론의 ‘한계’가 아닌 ‘장점’이라는 것이다.

여러 억압에 대한 총체적, 통일적 설명을 꺼리며 ‘모든 억압이 다 중요하다’는 식의 인식에 머무르는 것은 단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상호교차성을 표방하는 운동 단체들 역시 ‘이 억압도 중요하고, 저 억압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기계적 인식에 머물러 있다. 일례로 영국의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운동 단체인 ‘페미니즘의 반격(Feminist Fightbac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2007년-2008년 무렵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 대신 ‘상호교차적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젠더와 계급에 대한 관심은 담고 있지만 인종은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계급도 중요하고 젠더도 중요하다’는 식이고, 여기에 인종, 장애, 성소수자 등 더 많은 억압들을 추가하여 나열하면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기계적 결합이 아닌 총체적 이론이 필요한 이유

여러 억압을 병렬하고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이론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히 부정확한 이론이어서뿐만 아니라 실천에서 그 한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천적 한계는 계급에 대한 경시와 지배계급의 상호교차성 수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서술한 위니프레드 브레인스(Winifred Breines)의 『우리 사이의 불화(The Trouble Between Us)』라는 책은 ‘빵과 장미’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주의적 정치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활동가들에게, 계급은 인종이나 성적 지향만큼 중대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중간계급 출신 여성들이 행동을 고치고 특권의식을 내려놓는 것으로 계급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고, 이는 힘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회원들의 죄책감만을 부추겼다. ‘컴바히 강 공동체’에서도 이론을 학습하는 것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본인이 직접 노동자가 되거나 빈민 지역사회의 일환이 되는 것만 계급투쟁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회원들 간의 소모적인 갈등이 초래되었다. 상호교차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린다 고든조차도 “상호교차성의 잠재력을 감소시키는 한 가지 특정한 문제는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간과”라고 말했다.

또한 “이 용어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그 어떤 고려와도 얼마나 멀어졌느냐 하면, 오늘날 ‘린 인(lean in)’ 페미니즘의 가장 기업적인 버전조차도 무리 없이 스스로가 상호교차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린 인 페미니즘은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세릴 센드버그가 주창한 1%를 위한 친기업적 페미니즘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샌더스의 문제제기를 회피하기 위해 트위터나 연설에서 ‘상호교차적’ ‘상호교차하는 쟁점들’ 같은 용어를 썼던 것이 또 다른 대표 사례일 것이다.

결국 여러 억압이 골고루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호교차성의 접근이 오히려 그 어떤 억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부적절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가 여러 억압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총체적 이론틀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더 올바르고 효과적인 실천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이론틀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맑스주의는 경제적 착취의 종식만이 아닌 보편적 인간해방을 사회주의 운동의 궁극적 목표로 제시했고,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동시에 보편적 인간해방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 어떤 억압도 부차화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억압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그에 따라 올바른 실천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의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관점은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10 댓글

  1. 보편적 인간해방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상호교차성과 다르며, 일원론적이며 여러 억압을 유기적으로 설명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충분한 예를 들어 서술한 상호교차성에 대한 비판만큼, 대응되는 지점에서 보편적 인간해방이란 어떻게 다른지도 서술이 됐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기사가 될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보편적이기에 올바르다라고 밖에는 읽히지 않는 것 같아 아쉽네요.

    • 의견 감사합니다. 다만 본 기사의 주된 목적은 상호교차성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짚고 한계를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에 대하여는 결론 부분에서 간략하게, 맑스주의 이론이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문제의식을 견지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마무리를 하게 됐습니다. 맑스주의 이론이 억압에 대해 어떻게 그런 틀을 견지하며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풍부하게 설명하는 글을 써갈 예정입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더 궁금하시다면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기획의 기사들이나 본 연재기획기사의 다른 기사들을 읽어보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그러면 맑스주의적 관점에 대해 조금이나마 궁금증을 해소하실 수 있을 듯 합니다.

  2. “억압이라는 현상을 하나의 근본적인 설명적 범주(예를 들어, 계급)로 환원하고 그 범주를 존재론적으로 특권화하는 대신, 상호교차성 이론가들은 억압이 복수의, 탈중심화된, 그리고 함께 구성하는 축들을 통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통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들, 예를 들어 계급이 젠더와 인종에 대해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우선순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젠더와 인종은 부수적 현상으로 보는 접근들을 반박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상호교차성이 여러 억압의 기계적 결합에 머무르고 있다”라는 결론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오죠?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우선순위 부정’=’기계적 결합’입니까? 이 글의 핵심 주장, ‘상호교차성은 기계적 결합에 머무르는 한계가 있다’가 이렇게 빈약한 논리에 기대고 있으니 글 전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무엇과 무엇이 관련맺는 방식에는 인과적 관계 아니면 기계적 결합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호교차성 이론에서 다양한 억압의 층위들은 단순히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곱해집니다. 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차별은 노동계급 남성이 받는 차별에 비노동계급 여성이 받는 차별을 더한 형태가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이나 비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차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부과됩니다. 이게 교차성 개념의 핵심입니다. 도대체 이걸 보고 어떻게 ‘기계적 결합’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 저자는 아니지만 답변드립니다.
      물론 말씀하시는대로 상호교차성 개념이 기계적 내지 병렬적으로 억압들을 나열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급뿐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에스니, 인종, 국적 등을 매개로 한 다양한 형태의 억압이 있을 수 있으며 이 억압들이 다른 억압들과 함께 하여 증폭되거나 새로운 억압의 형태로 나타기도 하지요. 이 점을 지적강조하기 때문에 상호교차성 개념을 바탕으로 한 여성주의 이론이, 도식화 단순화된 몇몆 마르크스주의 조류나 단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집중하는 몇몇 여성주의 조류에 비해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기사의 주요 논지는, 그러한 설명이 현실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나아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지를 보충하고자, 상호교차성이 억압들을 설명하는 방식을 문제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사에서 불충분하게 강조한 점은 상호교차성 개념의 이론적 한계입니다. 즉, 상호교차성이 억압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개념일 뿐, 억압들의 원인을 제시하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아랍계 미국인 여성 노동자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상황은 그녀가 1)아랍세계 출신이라는 점(민족 혹은 인종과 관련된 억압), 2)여성이라는 점(젠더와 관련된 억압), 3)노동자라는 점(계급과 관련된 억압과 착취) 때문만이 아니라 4)그 모두라는 점(억압들의 상호교차성)이겠죠. 그렇지만 1)과 2), 3)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흔히 1)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과, 2)는 ‘가부장제’ 내지 ‘남성지배’ 등등, 3)은 ‘자본주의’와 연관지어 설명되죠. 다시 말하면 교차하는 억압들 각각의 발생은 다른 이론들을 빌려 설명해야한다는 겁니다. 저번 기사에서 가부장제 이론도 비판받았듯이, 오리엔탈리즘의 기원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설명도 주로 서구정신의 발전과정으로 이야기되고 자본주의와는 우연적인 계기를 맺는 별개의 것이죠.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이든 가부장제(남성지배)든 자본주의든 어찌되었든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기껏해야 그저 서로에 영향을 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향이란 게 세가지 억압과 그 원인에서는 직접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수한 무언가일지라도 말이죠. 이제부터 이러한 설명방식을 ‘다원론’이라고 부릅시다.

      다원론이 지닌 정치적 장점은, 기사에도 나왔고 아시다시피 특정 개인집단이 처한 현실을 아랍계
      미국인이라는 출신이나 여성이라는 젠더, 노동자라는 계급 등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억압들을 철폐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는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죠. 기사에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활동가들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원론은 그러한 설명방식 때문에 한계를 지닙니다. 여성주의자와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던 사례를 들어보지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가 팽창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자유구역을 설정합니다. 그곳에 주로 섬유 의류 부문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들어섰고 여기에는 ‘여성역량강화’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노동력을 여성으로 충당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물론 라자 플라자 사고에서 볼 수 있듯이 그곳에서 여성들이 겪는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했지만, 대개 가정의 생계비를 부담했던 남성들도 이민을 가서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들이 굶어죽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에 비해 그곳에서 여성들은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임금을 약간 더 받았죠. 게다가 예전에는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아니면 못 했기 때문에) 그곳에 일하게 되면 남성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고요.

      당시 논쟁에서 여성주의자들은 상당한 분열을 겪었습니다. 한편에는 어찌되었든 여성들이 경제적 기반을 갖게 하여 그들을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라며 이 정책을 옹호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들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착취와 억압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이 논쟁에서 상호교차적 여성주의는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까요? 문제의 해법은 과연 무엇인지 명확히 보이시나요?

      만일 억압들과 그 원인들을 독립적이고 수평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 해법은 불분명해지기 마련입니다. 제시된 상황, 추상적으로 말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역시 차악이겠죠. 무엇이 차악인지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요.

      달리 생각해서 여러 억압들을 하나의 원인으로, 그렇지만 보편적인 측면과 동시에 다양한 측면들까지 아우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무엇이 진정한 해법인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상호교차성 개념, 정확히는 그에 근거한 다원론적 설명방식이 결국 기계적 결합에 머무른다고 표현했지 않은가싶습니다. 물론 상호교차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을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 보여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답변이 충분했을지 모르겠지만 이만 글 줄이겠습니다.

      • 원 댓글자는 아니지만, 답글 짧게 남겨드립니다.

        1) 아랍 , 2) 여성 , 3) 노동자 를 생각하신 순간 그건 ‘교차성’ 개념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 여러 개에 작용하는 억압을 분석해서 결합하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작된 것이 ‘교차성’이라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기계적 결합’의 한계를 지적하며 등장한 것이 교차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했다고 전 생각해요.)

        억압들을 독립적으로 보겠다는 게 아닙니다. 페미니즘에서 교차성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다양한 여성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흑인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이 ‘여성’뿐 아니라 ‘흑인’이기 때문에 더 심하다, 라는 게 아니라, ‘흑인 여성’이 겪는 억압은 ‘백인 여성’이 겪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자세히 보면 “백인 중산층 여성”의 억압을 중심으로 다뤘던 것을 지적하며, 다양한 맥락에서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교차성입니다. 동시에 누군가에겐 억압인 것이 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3. 이 글에는 현실에 대한, 즉 대상 그 자체를 향한 자유라는 개념의 노고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문제의식과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 총체 속에서 개별을 파악하는 변증법적 방법의 훌륭한 소개인 것 같습니다. 현대 철학에 대한 더욱 많은 변증법적 고찰을 기대합니다.

  4. ‘흑인 여성’이 겪는 억압이 ‘백인 여성’이 겪는 것과 다르다는 점, 그리고 ‘흑인 여성’이 겪는 억압은 인종적 억압과 여성억압의 단순 합이 아니라 새로운 제3의 억압일 수 있다는 점에 반대하기 위해 이 기사를 쓴 것은 아닙니다. 억압을 구체적, 역사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런 통찰을 얻는 것은 소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통찰을 얻기 위해 반드시 상호교차성 개념이 필요한지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상호교차성 옹호론자들이 상호교차성의 강점을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제시하는 것이 임신중지권 요구와 인종적 억압 사례입니다. 여성의 권리로서 임신중지권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것은 백인 여성의 억압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이고, 흑인 여성들의 경우 역사적으로 강제 불임 시술 등 다른 결의 억압에 직면해 왔기에, 임신을 중지할 권리를 모든 여성의 요구로 내세우기보다는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호교차성이 알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그걸 알기 위해 굳이 상호교차성 개념이 필수적인지는 의문입니다. 위 지점을 인식하는지 못 하는지의 여부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요구안을 만들고 투쟁을 준비하는지에 달려 있는데, 맑스주의자들도 역사적으로 투쟁 과정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살필 필요성, 각 억압의 고유성에 유념하면서도 너른 연대를 만들어 갈 필요성에 대해 많이 고민해 왔습니다. 즉 이것은 맑스주의냐 상호교차성이냐 혹은 다른 이론틀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보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주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억압의 ‘현상’의 영역에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현상’의 영역에서는
    맑스주의자나 상호교차성론자나 큰 차이가 없을 수 있습니다(앞서 본 사례에서처럼, 맑스주의자도 상호교차성론자처럼,
    흑인 여성의 억압 경험과 백인 여성의 억압 경험에 차이가 있고 요구안을 만들 때 그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원론이나 상호교차성의 가장 중요한 약점은 ‘(지금 서로 교차하고 있는 혹은 융합되어 제3의 억압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 억압들은 왜, 어떻게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맑스주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가 다루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지점입니다.
    주의할 점은 맑스주의에서 그 답이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계급’이나 ‘자본주의’ 같은) 딱 하나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성억압만 해도 자본주의 이전에 있었고 계급발생도 여성억압 발생의 원인은 아닙니다. 여성억압의 근원은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성별분업의 성격이 억압적으로 변화했다는 데 있으며, 계급의 출현은 이러한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맑스주의적 분석입니다(http://programto.net/wordpress/?p=931#more-931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민족억압의 경우 자본주의와 좀 더 관련성이 높을 것입니다. 성소수자 억압, 청소년 억압, 장애인에 대한 억압도 그 근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각기 고유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 억압에 고유성이 있다는 사실을 맑스주의는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맑스주의가 억압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각 억압마다 답의 내용은 달라도 그 답을 찾는 틀은 공통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틀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관점에서 역사와 사회를 보는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입니다.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요지는http://socialist.kr/classics-of-socialism-german-ideology/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회의 각 부분과 영역들이 서로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생산양식이 다른 무엇보다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는 행위, 즉 노동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고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는 과정에서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호교차성이 여러 억압에 대해 ‘환원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그 억압(들)은 왜 어떻게 발생했나?’라는 인과적, 설명적 질문에 대한 답을 꺼리는 것이 제가 보기에 한계적이라는 것입니다. 글로 님께서 인과적이고 설명적인 우선순위 부정이 왜 기계적 결합이냐고 질문하셨는데, 억압의 원인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를 거부하고 위 질문에 대한 답을 꺼리는 태도를 갖는다면 여러 억압들에 대해 ‘서로 교차한다, 교차하면서 새로운 억압들 만들어낸다’ 같은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그것은 기계적 결합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답입니다.
    요컨대 상호교차성이 아닌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의 틀을 갖고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억압(들)은 왜 어떻게 발생했나?’에 대해 과학적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어떤 문제든 원인을 알아야 올바른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기에, 그 답이 있어야 억압 폐지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가 상호교차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 이유는 바로 이 점입니다.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그러니까 그 생각부터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억압의 원인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교차성이니까요. ‘교차하여 새로운 억압을 만들어낸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을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한 가지 정체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인과의 설명을 꺼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5. 와….. 글 내용 보고 다함께에서 쓴 줄 알고 놀라서 다시 보니까 사회주의자….

    기승전자본주의 지겨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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