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토론모임 후기] 사회주의, 여성해방으로 나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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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는 이제까지 널리 읽혔거나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페미니즘 도서들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비평하는 기사를 4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기획 기사에서 다룬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오빠는 필요없다』(전희경),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였다.

『사회주의자』 10호로 연재 기사가 마무리 된 후, 8월 17일에는 이제껏 나온 네 편의 기사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기획 취지와 기사의 내용을 설명하고 독자와 함께 관련 주제를 토론하는 독자토론모임을 진행했다. 여성 이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현실이 반영된 것인지, 토론모임에는 적잖은 독자들이 참여하여 활발하고 진지한 논의들이 진행됐다. 편집위원회는 당시 토론모임에 참석한 분의 후기 기사를 통해 이 날의 분위기와 토론내용을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여성해방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기사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린다.

지난 8월 17일,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 기사에 대한 독자토론모임이 열렸다. 장소는 생각보다 많은 참가자들로 가득 찼으며, 참가자들의 구성은 10대부터 60대의 학생, 노동조합 · 학생회 활동가, 노동자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토론장의 뜨거운 열기는 최근 가장 강력한 화두로 주목받는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지난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모아지면서 그간 사적인 복수, 치정극 정도로 여겨졌던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성차별적 언행의 규정에 대한 논쟁 또한 활성화되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시 신체적 · 정신적 가해에 대한 불안을 느껴야 하는 사회, 여성은 돈도 벌면서 가사와 양육의 의무에도 충실해야하는 사회, 여성들이 끊임없이 불안정·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분노는 여성 억압의 기원, 여성 운동의 전략을 학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독자토론모임 주최측 또한 연재 기사와 독자토론모임이 여성 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기획될 수 있었다는 점을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연재 기사 기획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독자토론모임은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여성운동의 현주소를 평가하고자 열렸다기 보다 페미니즘이 가지는 한계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했고, 지난 4개월 간 『사회주의자』에 연재된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기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기자들은 『페미니즘의 도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오빠는 필요없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기사를 요약·발제한 뒤 그러한 기사를 쓴 취지를 전달했고, 독자들은 이에 대해 자유롭게 질의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남성중심적인 사상인 맑스주의는 기각되거나 최소한 수정·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 운동 내의 주류적 흐름인 바, 페미니즘이 아닌 맑스주의가 여성해방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4편의 연재기사는 필자에게 매우 신선하게 여겨졌다.

기자의 발제에 따르면, 페미니즘 입문서나 이론서로 널리 읽히는 4권의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한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은 1) 여성억압의 물적 토대를 제시하지 못하며 이데올로기의 자율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2) 노동자계급 내 남성과 여성의 단결가능성을 부정하는 정치 전략을 내세운다.

예를 들어 마리아 미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여타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동등한 위상을 지니는 체제인 ‘가부장제’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물적 토대로서 ‘성별 분업’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즈는 성별 분업이 성별 간 위계를 전제로 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여성과 대비되는 남성의 폭력적 약탈 본능을 강조하는 본능론으로 회귀하였고, 생산력 발전에 따른 사회구성체의 변화와 성별 분업 간의 관계 또한 해명하지 못했다.

이처럼 생산양식의 외부에서 여성억압의 물적 토대를 찾는 것에 실패한 페미니스트들은 물적 토대로부터 자율성을 가지는 이데올로기의 힘에 기대었다. 여성혐오가 남성성 이데올로기로부터 기인한다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와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힘을 절대화하여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페미니즘의 도전』 모두 여성억압을 인식의 차원에서 해석하려 했으나 이들의 해석은 가지치기만을 거듭할 뿐, 여성억압을 끝장 낼 수 있는 해답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또한 여성의 가정주부화, 저임금 문제 등 자본주의 하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적 현상이 초역사적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 혹은 본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수혜자로서 특권을 유지하려 하므로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같은 계급에 속해도 다른 이해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여남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빗대어 설명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유는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발제자들은, 여성억압의 고리를 끊어낼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여성억압을 사회적·역사적 산물이자 물적 토대에 기반한 실체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이는 페미니즘이 아닌 맑스주의적 접근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출산, 수유 등)과 생산력 발전 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할 때에만, 즉 사적유물론의 관점에서 여성억압의 기원을 생산양식 내에서 찾으려고 할 때에만 여성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원시공산주의 사회)와 여성억압이 존재하지 않을 사회(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이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운동사회 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해방을 꿈꾸는 이들에게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토론 시간에는 위와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발제자와 참석자들은 90년대 이후 운동사회가 우경화되어 맑스주의의 입지가 좁아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 운동 세력 및 활동가들의 성차별적 실천이 누적된 결과 맑스주의는 ‘반여성적’이라는 편견이 굳어졌으며 페미니즘이 우세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성차별적 실천의 배후로 맑스주의 그 자체를 지목하면서, 역시 남성과 여성이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적 단결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더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볼 경우 여성활동가를 주변화하지 않고 정치적 주체로서 동등하게 대우하는, 즉 사회주의의 참된 의미를 지향하는 남성 활동가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 성차별적 실천을 하는 남성 활동가들을 모질게 비판하고 필요에 따라 배제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와 같은 행위의 배후로 맑스주의를 지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치 못하다. 결국 여성해방을 염원하는 이들로 하여금 맑스주의를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인간해방이기에 여성억압적 실천과 사회주의적 실천은 공존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의 도래는 인간해방의 완성이 아닌 시작일 뿐임을 힘주어 말 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운동은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이고, 심지어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노동자국가의 수립 역시 인간해방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독자토론모임 자료집, 31쪽)

이번 독자토론모임을 통해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이 상당히 많은 왜곡을 직면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왜곡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맑스주의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즘 상호 간의 논쟁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공론장에 진입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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