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위기가 반복되어 온 북미관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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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이후 한반도 정세가 심각하다. 미국은 비핵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 협상은 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고,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협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수차례 핵실험과 미사일발사 실험을 통해 핵무장력을 강화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사실상 협상을 통한 해결밖에 없음에도 ‘코피 터트리기’와 같은 전쟁카드를 버리지 않고 있다. 협상의 여지도 보이지만 전쟁의 위기가 공존하고 있는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3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전쟁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이 글은 1990년대 이후 지속되어 온 한반도 전쟁위기를 다시 한 번 짚어보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작성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시작한 계기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주요 계기는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은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기 시작했다(이 핵무기는 1980년대까지 최대 950기가 있었다고 밝혀졌고, 1991년 모두 철수됐다. 현재 남한은 핵무기 철수 대신, 핵공격을 당하면 미국의 핵무기로 보복할 수 있도록 하는 ‘핵우산’ 아래 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북한은 1960년대부터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1990년 전후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상황에서, 미국의 핵위협에 맞서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현실은 북한의 핵개발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와 제네바 합의

1992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시설 사찰을 허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핵시설 이외 군사시설까지 ‘특별사찰’까지 하겠다는 것에 반발했다 이에 미국은 중단되었던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했다. 이것은 북한이 핵전쟁연습이라고 규정하였던 군사훈련이었다. 결국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를 선언했고, 탈퇴 취소를 요구하는 유엔안보리 성명에 대해서는 ‘노동1호’ 장거리미사일 발사로 대신 대답했다.

미국은 그해 10월 7일 “북한이 핵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제안한 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한 ‘일괄타결안’을 고려할 수 없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으면 추가적인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역제안 했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이후 전쟁위기가 커져갔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제제를 밀어붙이면서 전쟁위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이는 1994년 3월 19일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정점에 다다랐다.

1994년 5월 18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국방장관 페리에게 전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펜타곤에서는 ‘작전계획 5027’을 바탕으로 한 전쟁 시뮬레이션이 진행됐다. 당시 남한 민중들은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1994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한국 사회를 휩쓴 사재기 열풍으로 알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영동백화점에서 하루 30상자씩 팔리던 라면이 14~15일 이틀 동안 200상자가 팔렸다. 그 사흘 동안 전국적으로 팔린 라면은 모두 5400만 개였다. 사람들은 현금을 비축하기 위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했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단지 부근의 한 은행에서는 평소 3만 달러 정도에 불과하던 환전 규모가 14일 5만 달러, 15일엔 12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한겨레21, 「전쟁 문턱까지 갔던 94년 6월」)

1994년 당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 3만 명, 한국군 45만 명, 민간인 10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600억 달러의 전쟁 경비가 들고, 한국 경제의 피해 규모는 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이윽고 방향이 급선회했다. 미국은 카터의 방북을 명분으로 대화국면으로 전환했고,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를 통해 1994년의 전쟁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제네바합의의 주요 내용은 경수로 발전소 및 발전용 중유 50만 톤 제공, 북미간 정치 및 경제관계의 완전 정상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안보를 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화당이 다수였던 당시 미국 의회는 북한과의 합의를 공산국가인 북한에 대한 회유책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북한에 대한 경수로 발전소 개발 자금을 불허했다. 이로써 경수로 발전소는 2001년까지 7년 이상 건설이 지연되었다. 당시 클린턴 정권 또한 김일성 사후 북한 정권의 붕괴를 예상하고 북한과 합의한 것으로 드러나, 미국에게 사실상 평화협정을 체결할 의사가 없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북한은 이 기간 동안 전력난, 식량난이 가중되어 북한 주민이 아사당하는 고통을 겪는 등,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북미간 협상이 이어지면서, 2000년 10월 12일 북한과 미국은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공동 발표한다. 그 주요 내용은 북미간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하고,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며,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는 등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곧바로 들어선 부시정권이 클린턴 정권의 정책을 전면 부정하면서 ‘북미 공동코뮈니케’는 사실상 폐기되고 만다.

2002년 부시 정권의 ‘악의 축’ 발언과 6자회담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이른바 네오콘으로 불리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득세하면서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도 더욱 강경한 쪽으로 흐르게 된다. 부시 정권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네오콘은 북한 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2002년 부시는 신년에 발표하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북미관계는 또다시 전쟁 위기의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2002년 10월, 부시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시인했다고 말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다. 미국은 이를 제네바 합의 위반 행위로 간주하고 매년 50만 톤씩 북한에 제공하던 중유 공급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12월 24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럼스펠드는 군사적 대응도 불사할 것임을 내비쳤다.

결국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그동안 탈퇴유보 상태로 있던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또다시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부시는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면 그 대가로 에너지와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대화의지를 내비쳤다. 그리고 2003년 4월 중국이 북미간 중재자로 나서면서 베이징에서 3자회담이 개최되었다.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 한국이 참가하면서 6자회담이라는 다자구도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요구했고, 북한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철회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 사이 미국은 북한과 리비아 사이의 핵 협력 의혹을 제기했고, 북한은 부시의 북한인권법 서명에 반발하면서 회담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2005년 9월 6자회담을 통해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는 진전이 있는가 싶더니, 곧바로 미국은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을 통해 위조달러를 유통시키고 불법자금을 세탁한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를 근거로 금융제재를 가하는 등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것은 북한이 2006년 1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2006년 말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함에 따라 네오콘의 입지가 좁아졌고, 6자회담을 통한 해결방식이 다시 힘을 얻게 된다. 2008년 5월에는 북한에 대한 50만 톤 식량지원이 발표되었고, 6월에는 북한에 대한 적성국교역법 적용이 종료되었다.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로 하는 상징적 조치도 취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와 실패

2009년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바마는 북한과 조건 없이 만날 용의도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은 오바마 정권 초기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는지,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에 미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에 나섰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착수 소식에 북미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고,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활동 중단과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이 합의됐다. 그러나 북한은 2012년 4월 13일 지구관측위성을 실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자 미국은 ‘전략적 인내’ 정책을 채택했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과도 연관이 있다. 이 정책은 이전 클린턴 정권 때와 비슷하게 김정일 사망으로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집권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 새로 집권한 김정은은 ‘핵무력,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해 핵무기 개발을 국가의 중요 목표로 공식화했다.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이 진행되었고, 2014년에는 19차례 미사일 발사가, 2016년에는 두 차례의 핵실험이 진행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유엔의 대북제재를 추진했고, 박근혜 정권은 개성공단을 가동중단하고, 최대 규모의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을 진행하였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한마디로 ‘무대응의 대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략적 인내’는 결국 북한이 이동식 장거리미사일, 잠수함발사미사일, 핵탄두 소형화 등 핵무장력을 계속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30년 이상 비정상적으로 지속된 한반도 군사긴장, 이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트럼프는 지난 부시 정권과 오바마 정권이 실행한 한반도 정책이 실패했고, 자신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시했다. 트럼프 정권은 겉으로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집권 이후 내내 북한과의 외교적 해결 노력은 외면한 채 오로지 대북제재의 강도와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방식으로 일관해왔다. 트럼프는 전쟁을 비롯한 모든 옵션을 동원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전쟁은 1994년 전쟁위기 때 예측되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피해를 낳을 것이다. 그 사이 북한은 핵무장을 강화해왔고, 미국과 남한의 군사력 역시 계속 증강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참화가 얼마나 심각할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북핵문제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핵개발-한반도 긴장고조-대북제재-협상-협상의 파기-핵개발’이 반복되어 왔다. 단순히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기만 한 게 아니라, 매번 북미간 군사적 긴장과 전쟁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갔고, 이제는 정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참화를 막아내고 수십 년간 지긋지긋하게 지속되어 온 적대적인 북미관계를 끝장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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