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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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배외주의의 상징인 방동 광장 전승원주를 파괴한 파리코뮌 전사들]

[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계급에 대한 생산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칼 맑스, 『프랑스 내전』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생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는 비스마르크의 포로로 잡혔다. 그 결과 제정이 붕괴되고 9월 4일 노동자가 중심이 된 파리의 민중들이 공화국을 요구한 결과 국민방위정부가 수립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이윽고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에 파리는 무장하기 시작했다. 국민방위대는 빈민 구까지 확대되어 35만 명으로 팽창하였다. 포위된 파리의 민중은 큰 고통을 받았지만 혁명 열기는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정부는 비스마르크와 휴전협정을 시도하는 등 타협적 태도를 보였다. 국민방위정부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그들과 프랑스 지배계급의 눈에 위협적인 세력은 침략 중인 프로이센군이 아니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의 민중이었다.

1871년 1월 15일부터 정부는 파리 민중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휴전협정에 들어갔고 결국 1월 28일 휴전합의가 이뤄져 3주간의 휴전에 들어갔다. 휴전기간 중인 2월 8일에 프랑스의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거가 촉박하게 실시됐다. 이는 프로이센과 공모한 프랑스 지배계급이 파리를 고립시키고 지배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성립된 보르도의회에서 왕당파는 절대 다수가 되었고 왕당파 티에르가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티에르 정부와 비스마르크 간의 굴욕적인 강화내용, 민중들을 우롱하는 법의 제정과 조치들은 파리 민중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보르도의회와 파리를 빠져나가 베르사유로 도망친 정부를 적대하게 만들었다. 1월 28일 휴전 이후 파리의 분위기는 급진화되었다. 전반적인 상황은 이제 프로이센군과 파리 민중들의 전투가 아니라, 파리의 민중들과 이들을 분쇄하려는 프랑스 지배계급간의 투쟁이 되었다.

3월 18일 새벽, 티에르 정부의 군대는 몽마르트 언덕의 대포를 탈취하는 등 무력진압을 시도했으나 국민방위대와 민중에게 발각되어 실패한다. 이 사건은 혁명을 더욱 진전시켰다. 3월 25일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는 다음날 즉각 코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선거 결과 85명이 당선되었는데, 이중 20명의 온건 공화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회주의 경향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이제 베르사유로 도망친 지배계급의 정부와 파리코뮌 사이의 전면적인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티에르는 지방에서 6만을 징집하고 비스마르크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 40만 명을 베르사유 군대에 합류시키면서 파리 탈환작전을 준비하였고 5월 21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를 공격했다. 코뮌의 전사들은 이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으나 압살당고 말았다.

파리코뮌은 비록 단명했으나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노동자국가였다. 코뮌은 “풍기경찰”의 영구적 해산, 주택임대료 면제, 전당포에 잡힌 물건 판매 중지, 정교분리, 배외주의의 상징인 방동 광장 전승원주 파괴, 제빵공장의 야간작업 폐지, 직업소개소 폐지, 전당포 폐지, 폐쇄된 공장들의 노동자 협동조합화 및 이것들의 거대 연합체 조직 추진 등의 조치들을 내렸다. 더 나아가 코뮌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수립할 노동자국가의 중요한 특징들을 담고 있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한 인민으로의 대체
    • 공직의 선출과 소환. 모든 공직자는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노동자에게 책임을 지고 언제나 해임시킬 수 있는 노동자나 노동자계급의 공인받은 대표자로 이루어짐.
    • 코뮌은 의회식의 기관이 아닌 동시에 집행하고 입법하는 행동적 기관.
    • 코뮌의원과 그 이하의 공무는 노동자의 임금수준에서 수행됨.

그것은 기존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양산한 구질서를 전복하는 것이었고 노동자계급이 상상하고 실천한 ‘최고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이는 72일이라는 짧은 기간 속에서 이루어 낸 노동자국가의 민주주의였다. 코뮌은 프랑스 지배계급에 압살 당했지만 그 후 반세기 안 되어 노동자 혁명은 현실화됐다.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국가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탄생했다. 한편 1871년 5월의 파리는 지금까지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래, ‘인터내셔널가(파리 코뮌에 참가한 외젠 포티에 작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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