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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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19세기 중반까지 노동자들은 계급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투쟁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제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프랑스 혁명이나 낡은 부르주아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과학적 세계관이 절실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맑스가 정립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 무렵 높이 성장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운동에 과학적 언어를 부여한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2월 과학적 사회주의가 집약적으로 서술된 『공산당 선언』을 작성, 발표했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1848년 2월 혁명이 발발하여 7월 왕정이 타도되었다. 이 2월 혁명의 주역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었다. 2월 25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회적 공화국’과 ‘노동권’을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무장한 노동자들 앞에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는 어쩔 수 없이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왜곡된 형태로 수용하고, 시간을 끌면서 노동자들의 힘을 빼기 시작했다.

우선 2월 27일 국영 작업장 설립이 발표되어 실업으로 곤경에 처한 약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영 작업장에 등록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농민과 도시 소상점주 등을 상대로 국영 작업장이 마치 세금을 먹는 하마인 것처럼 악선동하면서 노동자들을 다른 계급들로부터 고립시켰다. 2월 29일에는 노동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정부 위원회도 만들어졌는데, 임시정부는 이 위원회를 외진 뤽상부르 궁에 두고 제한된 역할만 수행하게 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이 뤽상부르 위원회의 의장을 맡은 루이 블랑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려 하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자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훗날 노동운동에서는 자본가 정부에 들어가 소소한 개량을 추구하며 노동자를 기만하는 경향을 ‘루이 블랑주의’라 부르게 된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다가 때가 되면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파리 청년들을 모아 24개 대대의 기동경비대를 편성했다.

4월 23일과 24일에는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진행되어 부르주아지와 왕당파가 승리했다. 이를 계기로 부르주아지는 세력균형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공화국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 역시 부분적으로 깨지게 됐다. 5월 15일에는 군중이 헌법제정회의 회장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은 블랑키의 체포 등 대대적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유혈사태를 감수하고서라도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분쇄하여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공격의 대상은 국영 작업장이었다. 6월 21일 헌법제정의회 집행위원회는 국영 작업장의 해산을 포고하였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일부러 도발하는 조치였다. 6월 22일, 분노한 노동자들은 즉각 무기를 들었다. 파리에 모여든 10만의 노동자들은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는 봉기를 유도했던 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격렬함이었다. 24일까지는 노동자들 측이 우세했으나, 25일이 되면서 전세는 기울었다. 26일, 봉기의 마지막 거점이 함락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6월 봉기의 교훈은 우선 당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적 본질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적 공화국’을 요구하거나 국영 작업장, 뤽상부르 위원회 등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의 소소한 양보 책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계급동맹의 중요성도 교훈으로 지적할 수 있다. 파리의 노동자들이 다른 피지배 계급인 농민과 도시 소부르주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 채 고립된 것이 패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교훈은, 노동자들이 더 근본적 인식을 갖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조금 개선하는 것조차 부르주아 공화국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상이며, 이 공상은 자신을 실현하려 하자마자 범죄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그들은 2월 공화국을 협박하여 인정하도록 만들려 했던 자신들의 요구들, 형식은 터무니없이 크지만 내용은 사소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적이기까지 한 자신들의 이 요구들 대신에 다음과 같은 대담하고 혁명적인 전투 구호를 내놓았다: 부르주아지의 전복! 노동자 계급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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