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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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케테 콜비츠의 판화, "직조공의 봉기" 중 한 작품]

[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본주의의 발전이 더디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더딘 자본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독일 노동자 운동은 성장하고 있었다.

수공업 직인 중심의 결사 “법외자 동맹”이 1834년 9월 결성됐다. 법외자 동맹은 주로 민주주의 공화국, 인민에 의한 정부, 모든 시민들의 확실한 생계 보장, 빈자에 대한 면세 등 민주주의 강령을 내세웠다. 바뵈프주의와 당대 프랑스 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은 세력들은 1836년 법외자 동맹에서 이탈하여 “의인동맹”을 만들었다. 의인동맹의 중요 인물은 빌헬름 바이틀링, 하인리히 바우어, 요셉 몰, 칼 샤퍼 등이었다. 이들은 1839년 5월 음모적 혁명가 루이 블랑키의 “계절단”이 주도한 무의미한 봉기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국외로 추방되자 런던으로 건너가 조직을 재건하고 “노동자 교육협회”를 설립했다. 의인동맹은 향후 맑스와 엥겔스의 합류로 독일 “공산주의자 동맹”이 된다(유명한 공산당 선언은 이 동맹의 강령으로 작성된 것이다).

한편 이런 정치적 결사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중적 행동도 등장하게 된다. 1844년 슐레지엔에서 일어난 직조공들의 봉기가 바로 그것이다.

1842년부터 1844년까지 슐레지엔 직물공업이 불황을 겪었다. 당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은 대개 촌락의 가내 수공업자들이었다. 1844년 식료품 가격은 급등한 반면 직조공의 임금은 하락해서 직조공들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됐다. 당시 한 언론은 “굶주림을 한 조각의 빵으로 달래기 위해 직조공들은 그들의 침대, 옷가지, 린넨과 가구를 팔아야 했다”고 보도했다. 고용주들은 불황을 기회삼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다. 특히 페테르스발다우의 츠반지거와 랑겐빌라우의 디리히 형제들이 큰 증오의 대상이 됐다.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동안 이들은 큰 돈을 벌었고 츠반지거는 궁정같은 저택을 지었다.

5월 말 경 직조공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슐레지엔에서는 반항적 노래인 “피의 법정”이 점점 더 빈번하게 들리게 됐다. 6월 3일 츠반지거의 집 근처에서 이 노래를 부르던 한 직조공이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지방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 날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직조공들에게 츠반지거의 집으로 가자고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츠반지거의 집으로 향하여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건축공들에게 자신들의 대열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츠반지거의 집은 직조공에 의해 파괴됐다. 노동자들은 츠반지거 공장으로 들어가 채무자 명단과 같은 서류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츠반지거는 가족과 함께 도망을 쳤다. 6월 6일에는 노동자들이 다른 미움을 산 고용주들에게 찾아갔다. 그들은 랑겐빌라우로 행진하여 디리히 형제들의 앞잡이들과 목사를 혼내주고 디리히 형제의 공장건물과 집을 파괴했다. 봉기는 다른 마을들로까지 확산됐다.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겁을 집어먹고 잔인하게 그들을 억압했다. 6일 봉기지역에 도착한 군대와 노동자가 충돌하여 17명의 노동자가 죽임을 당했다. 군대의 도착으로 점차 수적 우위를 확보한 당국은 노동자에 대한 대량 검거에 나섰고 9일경에는 봉기가 진압됐다. 그렇지만 직조공 봉기는 먼 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반란 직후 브레슬라우, 잉골슈타트, 베를린, 프라하 등에서 노동자들이 항의행동을 일으켰다.

슐레지엔의 직조공 봉기는 일차적으로 견딜 수 없는 기아에 항의해 일어난 자생적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 투쟁은 그보다 더 큰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독일에서도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와 자본가의 이해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인식하고 자본의 착취에 맞선 투쟁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반란은 독일에서도 독자적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알리는 투쟁이 됐다.

맑스는 이 봉기가 일어나자 그 즉시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했다. 1844년 6월 무렵 맑스는 파리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는 『전진』이란 잡지에 「“프로이센 왕과 사회개혁-어느 프로이센 사람이”에 대한 비판적 주석」이란 논문을 기고하여 직조공 봉기를 높게 평가했다. 여기서 맑스는 “우선 직조공의 노래를, 투쟁의 이 대담한 구호를 상기해 보건대 ……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구호 속에서 즉각 사적 소유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대립을 적절하고 예리하며 가차없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절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직조공 봉기는 독일 혁명운동에 즉각 큰 영향을 미쳤다. 맑스의 절친한 동지인 빌헬름 볼프는 “슐레지엔에서의 궁핍과 폭동”이란 기사를 써서 봉기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독일 혁명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슐레지엔의 직조공”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는 이렇게 말한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직조공 봉기는 그후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도 오랫동안 기억됐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직조공들』(1892년)이라는 희곡을 써서 직조공들의 투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고, 저명한 민중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의 봉기” 연작(1895년) 역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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