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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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차티스트들의 대중 시위 전경]

[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1830년, 영국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 당인 휘그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선거법 개정, 참정권 확대를 위한 요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러한 요구가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발 물러섰고, 1832년 선거법 개혁으로 부르주아가 선거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참정권 확대를 위해 부르주아와 함께 싸웠던 노동자들은 어떠한 혜택도 입지 못했고, 이에 노동자계급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선거법 개정 이후 만들어진 ‘개혁 의회’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에 맞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34년에 도입된 ‘신구빈법’이다. 부르주아는 구빈법 개정으로 인해 구빈세 부담을 덜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 인하 효과도 누리게 되었다. 실업자가 될 경우 ‘새로운 바스티유 감옥’이라 불리던 구빈원으로 들어가야 했던 노동자들은, 강제노역을 피하기 위해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으며 공장에서 버티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자계급은 귀족(토리당)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손을 잡았던 부르주아가 참정권을 얻자마자 자신들을 배반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결과 더 이상 부르주아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이제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이와 같은 각성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런던노동자연합”(1836년에 선거권 확대를 위해 만들어짐)은 1838년 5월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 비밀투표, 의원에 대한 재산 자격의 폐지 등 6개 조항으로 구성된 ‘헌장’(charter)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물론 운동 초기부터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세력과 완전한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런던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맨체스터, 글래스고우 등 주요 공장 지대의 노동자들, 웨일즈의 광부 등이 차티스트 운동에 대거 참여하면서 부르주아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사진: 6개항의 요구가 담긴 인민헌장]

1839년 2월에 하원 청원을 앞두고 열린 최초의 차티스트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노동자계급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시위가 무조건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소부르주아 출신 온건파는, 노동자 대표들로부터 물리적인 충돌까지 각오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회의에서 퇴장했다. 비록 차티스트 운동에 가담한 모든 노동자들이 확고한 계급의식과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은 점차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정치적 독자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대중적 정치조직인 “전국 헌장 연합”(이하 ‘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주요 산업 도시를 중심으로 차티스트 운동이 확산되면서 1841년 10월에 1만 6천 명이었던 ‘연합’의 회원은 1842년 8월에 이르러 5만 명으로 늘어났고, 헌장에 서명한 사람의 수도 330만 명을 넘어섰다.

차티스트 운동은 1842년 8월 총파업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랭카셔 지역에서 시작된 파업은 맨체스터, 체셔, 서부 요크셔 지역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은 ‘헌장’ 도입과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의 요구안을 외치며 행진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하나의 공장에 국한되지 않는 전노동자계급의 요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나 총파업 투쟁에 대해 뚜렷한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연합’의 대표자들은 파업이 들불처럼 번지자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지배계급은 이를 틈타 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보름간 이어졌던 8월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이 단일한 계급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줬고, 1847년에 여성, 아동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하는 타협안 통과라는 부르주아지의 양보조치로 이어졌다.

엥겔스는 차티스트 운동을 “모든 부르주아적 성분들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노동자들의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노동자들에게 ‘참정권 확대’는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는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들은 공통의 계급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만들었고, 부르주아 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 분투했다.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지와는 다른 이해를 가진 독자적 계급임을 자각하고 대중적 정치투쟁으로까지 나아간 차티스트 운동 이후 과학적 사회주의의 등장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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