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0
1645

[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⑨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⑩ 1905년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대중파업, 노동자 소비에트

⑪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⑫ 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다

⑬ 1918년 11월 독일 혁명: 유럽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다

⑭ 1919년 코민테른의 창립: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수립

⑮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러시아 혁명이 민족해방운동의 횃불로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

1830년 7월 프랑스,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 등의 대중적 투쟁으로 반동적인 부르봉 왕조가 무너졌다. 그렇지만 그 투쟁의 결실을 챙긴 것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재산에 따른 선거권 제한도 여전했고, 특히 노동자들의 생활은 늘 곤궁했다. 이러한 결과 과학적 사회주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우쳐 나갔다. 1838-1840년대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1844년 독일의 실레지아 직조공 봉기와 함께 프랑스 리옹(Lyon) 직조공들의 두 차례에 걸친 봉기는 이렇듯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해 내딛은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프랑스에서 산업 노동자계급은 영국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조금 느리게 형성된 편이었다. 1826년 기준 공업 인구는 총인구의 13% 정도에 그쳤으며,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대도시인 리옹에도 3만여 명의 직조공들이 8천여 명 정도의 소규모 작업장 소유자들에게 고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직조공들은 상인이 작업장 소유자들에게 주는 대금의 절반 정도를 임금으로 가져갔으며,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한 채 폐병에 걸려가며 하루에 15시간씩 고된 노동을 했다.

그러던 중 1826년 영국, 미국, 남아메리카 등지로부터 들어오던 주문이 감소됨에 따라 리옹의 견직 산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안 그래도 어렵던 노동자들의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졌고, 상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자 임금을 낮추며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설상가상으로, 1831년 3월에는 창문과 출입문에 세금을 부과하는 등 빈민의 부담을 더욱 늘리는 새로운 재정법이 통과되기까지 했다. 1831년 10월, 리옹의 노동자들은 자체 위원회를 조직하여 시 지사에게 고용주들과의 협상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소폭의 임금 인상이 의결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이조차 거부하며 창고와 사무소를 폐쇄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쌓여 왔던 노동자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11월 20일, 노동자들은 리옹 인근의 광장에 모여서, 작업을 중단하고 리옹 시내에 들어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다음날 노동자들이 리옹으로 출발하자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국민방위군과 시 경찰이 막아섰다. 군대와 경찰의 발포에 맞서 노동자들은 돌, 몽둥이 등으로 대항한 끝에 리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한 노동자들은 건물들을 점령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가 쓰인 검은 깃발을 들었다. 11월 23일, 노동자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정부군을 리옹에서 몰아냈다. 노동자들은 도시를 점령하였고, 시청, 병기고, 화약창고를 장악했다. 그러나 11월 28일 증원된 군대가 다시 돌아왔고 12월 3일 노동자들이 도시를 빼앗김으로써 1차 리옹 봉기는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1834년 리옹의 노동자들은 또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1834년 4월 5일 리옹에서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의 충돌이 있었고, 9일 아침 조합 금지 법안에 맞서 공화정을 요구하며 투쟁할 것을 호소하는 전단이 리옹 시내에 흩뿌려졌다. 발포하는 헌병들에 맞서, 리옹의 직조공들은 “공화정 아니면 죽음!”이라는 깃발을 들고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사업은 전인류의 사업이고 우리 조국의 행복, 장래의 안전을 위한 사업이다.”라는 선언도 발표했다. 그러나 2차 리옹 봉기 역시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1차 봉기는 정치적 요구사항을 내걸지 않은 데 반해 2차 봉기는 공화정이라는 정치적 요구사항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맑스는 이에 대해 “리옹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오로지 정치적 목적들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들이 실제로는 사회주의의 병사들이었는데도 자신들이 공화국의 병사일 뿐이라고 믿었다. …… 그들의 정치적 오성은 그들의 사회적 본능을 기만하였다.”라고 썼다. 실제로 당시 리옹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경험의 부족 등으로 인해 아직 노동자계급 고유의 정치 강령이나 명확한 행동 계획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옹 봉기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내딛은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라는 그들의 외침이 지금까지 전세계의 노동자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