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러시아 혁명이 민족해방운동의 횃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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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⑨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⑩ 1905년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대중파업, 노동자 소비에트

⑪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⑫ 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다

⑬ 1918년 11월 독일 혁명: 유럽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다

⑭ 1919년 코민테른의 창립: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수립

⑮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러시아 혁명이 민족해방운동의 횃불로

1922년 1월, 144명의 동아시아 출신 사회주의자, 민족운동가들이 부푼 기대를 안고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입성하게 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조선인 56명, 중국인 42명, 일본인 16명, 몽골인 14명, 부리야트인 3명, 인도인 2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억압 민족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피억압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모스크바는 혁명의 수도인 동시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구심점이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은 짜르의 압제로부터 러시아 인민들을 구하기 위한 혁명일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억압 질서로부터 전세계 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과 제1인터내셔널은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레닌 역시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식민지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에도 주목했으며, 식민지 피억압민중의 단결이 전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억압을 끊어낼 무기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는 이를 위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반면 제2인터내셔널은 민족해방투쟁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레닌 등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새로 세운 코민테른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맑스주의적 원칙을 복원했다.

코민테른 2차 대회는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통과시켰고, 이 테제는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코민테른은 2차 대회 직후인 1920년 9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1,900여명이 참여하는 동방인민대회를 개최했다. 1922년 초에는 미국 주도의 위싱턴 회의에 대항하는 극동인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모스크바로 모여든 동아시아의 민족 대표들 역시 그러한 희망의 빛을 따라 걸음을 옮긴 이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보인 행태에 대한 실망과 분노 또한 이들의 걸음을 재촉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동아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은 유럽 열강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파리강화회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1921년 11월, 파리에서 다루지 못한 아시아·태평양 문제를 논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9개국이 참가하는 워싱턴 회의가 열렸으나, 이는 ‘식민지 해방’이 아니라, 자본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균형 잡힌 지배’를 추구하며 미·영·프·일의 4개국 조약으로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이에 코민테른 집행위원장 지노비예프는 “마치 한국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 워싱턴회의에서는 코리아란 단어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파리강화회의에도 파견된 바 있는 조선인 대표 김규식은 극동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서 한 발언에서 과거에 워싱턴이 민주주의의 중심지로, 모스크바는 짜르의 압제와 제국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져 왔다면, 이제 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워싱턴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연설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약 2주간 이어졌다. 논의의 결과 조선과 중국의 당면 과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하며, 양국 모두 아직 공산당의 세력이 약하고,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는 시기를 겪고 있으므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인 대표로는 여운형, 김규식, 김단야, 김상덕, 김시현, 권애라, 김재봉, 장덕진, 조동호 등의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 민족운동가들이 참여했다. 파견단체들은 대부분 고려공산당, 이르쿠르크공산청년회, 신한청년단, 대한광복군총영, 대한청년연합회 등 사회주의 조직이 중심이었고, 여러 민족해방단체가 함께했다. 당시 조선 대표들은 일본인 대표 가따야마, 중국인 대표 취추바이와 함께 레닌과 만나 조선 문제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1920년대에 조선의 민족해방 운동이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 15회에 걸쳐서 1년 이상 연재해온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 시리즈는 이번 글을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동안 연재기사에 많은 관심을 보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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