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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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⑨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⑩ 1905년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대중파업, 노동자 소비에트

⑪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⑫ 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다

⑬ 1918년 11월 독일 혁명: 유럽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다

⑭ 1919년 코민테른의 창립: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수립

⑮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러시아 혁명이 민족해방운동의 횃불로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자들을 무의미한 학살극에 내몰고 후방에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는 가혹한 생활조건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갔고 노동자들은 이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켰다.

1917년 2월 혁명은 2월 23일(신력 3월 8일)에 발생했다. 이 혁명은 국제 여성의 날에 맞춰 일어난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전부터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1905년 혁명 이후 도래한 반동기를 거쳐 1912년부터 점차 제 힘을 찾기 시작했다. 1914년 전쟁 발발은 노동자의 투쟁을 잠시 주춤시켰으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노동자 투쟁은 다시 거세게 진출했다. 이미 1917년 1월에는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정치파업이 벌어졌고, 오랜 투쟁 역사를 지닌 푸틸로프 공장이 2월 17일 파업에 들어갔다. 오래 축적된 차르 체제의 모순과 전쟁으로까지 나간 제국주의의 모순이 중첩된 상태에서, 노동자 민중이 구체제를 거부하고 혁명에 나선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소비에트는 이미 1905년 혁명에서 출현했던 것이었는데, 2월 27일 노동자, 병사 대표들이 타우리데궁에 모여 소비에트를 출범시켰다. 이 당시 정세에서 실제 권력은 소비에트에 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가 직접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면 실제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3월 2일 두마임시위원회가 소비에트와 교섭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소비에트는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서 러시아 혁명의 독특한 특징인 ‘이중권력’이 출현하게 된다. 이것은 아직 혁명적 대중이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고 당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화해주의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4월 4일 4월 테제를 발표하여 혁명의 발전 방향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혁명의 전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레닌은 혁명적 당과 노동자계급의 임무가 혁명의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당이 대중들의 투쟁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역관계를 고려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하에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혁명의 전진을 가로 막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 소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비판, 소비에트 내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투쟁, 민중 다수의 조직, 대중교육 및 계급의식 고양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이윽고 올바른 것으로 판명났다. 임시정부는 혁명적 대중이 증오하는 전쟁 지속 입장으로 일관했고, 오히려 혁명세력을 탄압하여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또한 8월 25일에는 반동 장군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혁명세력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이중권력 상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 사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를 획득했다.

정세의 흐름을 분석한 레닌은 위기가 무르익었다는 판단 아래 무장봉기를 호소했고, 10월 10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무장봉기 준비를 결정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아래 군사혁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또한 거의 노동자로 이루어진 적위대가 혁명무장력의 핵심이었다. 10월 24일 적위대는 수도의 전략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0월 25일 군사혁명위원회는 러시아 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를 발표했고, 같은 날 저녁에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최되었다. 10월 혁명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발생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10월 혁명을 계기로 마침내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역사적 이행 시기가 현실화되었다. 10월 혁명은 이미 자본주의가 역사 발전에서 그 진보적 역할을 다하고 반동화되고 이미 쇠퇴해가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입증했다. 10월 혁명은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해방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었고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의 민족해방투쟁에도 일대 고양을 가져왔다. 10월 혁명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성격을 혁명적 실천을 통해 입증했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인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역시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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