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대중파업, 노동자 소비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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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건으로 간추린 사회주의노동운동사>는 『사회주의자』 27호부터 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 기사입니다. 그동안 지면 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기사를 매달 한 편씩 게재합니다. 사회주의노동운동사의 전모를 다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겠지만 역사적 중요 사건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① 러다이트 운동,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계급적 행동

② 리옹 봉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향한 한 걸음

③ 차티즘,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정치운동

④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⑤ 1848년 프랑스 6월 봉기: 노동자, 부르주아 국가의 실체를 깨닫다

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⑦ 1871년 파리코뮌,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국가

⑧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과 독일 사민당의 성장

⑨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⑩ 1905년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대중파업, 노동자 소비에트

1871년 파리 코뮌의 패배 이후 자본주의는 수십 년 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중,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여기에 파열구를 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배경은 러일 전쟁에 대한 러시아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전쟁 반대 운동과 파업이 확산된 것이었다. 1905년 1월 9일, 가퐁 신부가 이끈 시위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가퐁 신부는 비밀경찰과 서로 연락하던 인물로서, 차르에게 청원을 하기 위해 사전에 정부에 통보한 후 대중들을 이끌고 동궁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민중은 비무장한 상태로 대사면, 시민의 자유, 정당한 임금, 인민에 대한 토지의 점차적 양도, 보통 평등 선거권에 기초한 헌법제정회의 소집 등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날 차르는 비무장의 시위 대중에 발포를 했고, 이로 인해 동궁 앞 광장에서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차르는 민중을 폭력 앞에 굴복시켜 저항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이와 같은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 사건은 오히려 민중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혁명은 더욱 격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무엇보다 대중파업이 크게 확산되었다. 1월 중에는 4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했는데, 이 숫자는 지난 10년간의 파업 노동자 수를 넘는 숫자였다. 파업은 모든 공업중심지로 확산되었다. 이 때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약 28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이 때 최초로 노동자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중요한 섬유공업 중심지인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노동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파업투쟁 중에 전권대표자소비에트를 창설했다.

저항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6월에는 흑해 함대에 속해 있던 전함 포템킨 호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함대의 다른 전함들은 포템킨 호의 수병들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포템킨 호의 반란은 세계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905년 혁명은 러시아에 의해 억압받던 민족들의 저항의식 역시 고취했다. 피억압 소수민족 학생들은 차르의 초상과 러시아어 교과서를 찢어 버리고, 러시아 관리들에게 “러시아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렇게 혁명이 점점 더 발전하자 겁을 먹은 차르는 8월 19일 비록 자문의회에 불과하지만 ‘제국의회’를 인정하는 양보 조치를 취했다.

한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 두 분파인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혁명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했다. 둘 다 당시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았지만,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지도하고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를 도와야 한다고 보았으며 농민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한 반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확고하게 지도하지 못할 것이며 노동자계급이 농민을 동맹군으로 삼아 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달리 맑스주의를 철저히 실천하는 혁명적 태도를 취한 것이다.

가을이 되자 투쟁은 더욱 더 고양되었다. 농민들은 약 2,000여 채의 지주 가옥을 불태우고 귀족들이 인민들로부터 약탈한 식량을 다시 빼앗아와 자신들 사이에서 분배했다. 10월에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8시간 노동제를 중심적인 요구로 하는 파업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농민도 함께 참여하는 노동자 소비에트는 이제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출현했다. 이에 10월 17일 차르는 입법권이 있는 의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러한 입법의회 역시 거부했다.

혁명의 정점은 12월 20일 발발한 모스크바 봉기였다. 모스크바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봉기는 9일 만에 패배로 끝났다. 파업은 1906년, 1907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 규모는 점차 작아졌고, 1907년 6월 3일 차르는 의회를 해산하고 수상 스톨리핀을 내세워 공공연한 반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이 세계사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역시 1905년 혁명의 중요한 의의다. 레닌이 이야기하였듯이, “1905년의 “총연습”이 없었더라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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