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네오콘이 사랑한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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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Albin Lohr-Jones/Pacific Press/Zuma

우리 월마트의 주주이자 이사로서 저는 항상 이 회사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잘 해 온 것들과 그 방식도 자랑스럽습니다. (1990년 6월)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경찰이 필요하고 반복적인 범법자들에게 내릴 더 엄하고 강력한 형량이 필요합니다. … 폭력적인 범법자들을 거리에 돌아다니지 않게 할 만큼 오랫동안 수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감옥이 필요합니다. (1994년 8월)

[복지 수급을 받다가 취업을 한 사람들에 대해] 이제 이 사람들은 더 이상 먹튀(deadbeat)가 아니라고, 실제로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됐다고 우리가 말했죠.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을까요? (2002년 4월)

[성인 동반 없이 미국 국경을 넘는 멕시코 아동들에 대해] 가족 중에 부양능력이 있는 어른이 파악되는 즉시 다시 돌려보내져야 합니다. (2014년 6월)

(Doug Henwood, 『My Turn』, Seven Stories Press, 2016, 151-164쪽)

한 미국 대선후보가 과거에 한 발언들이다. 강경한 노조탄압 정책으로 악명 높은 월마트 경영진을 자랑스러워하고, 이제까지 수많은 흑인과 빈민을 죽인 미국 경찰력이 더 강력해져야 한다고 외치고, 복지 수혜자를 ‘먹튀’라고 표현하며 그들이 드디어 일을 한다고 환영하고, 아동 이주자를 당장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 이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자본가 출신이자 소수자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한 말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모두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한 말이다.

사실 힐러리 클린턴이 별로 진보적이지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은 이미 많은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최근 며칠 동안에만도 갖가지 폭로가 이어졌다. 선거 유세에서는 평범한 미국 서민을 위해 금융자본의 탐욕을 규제할 것처럼 말하는 클린턴이 알고 보니 2013년 골드만삭스 비공개 강연에서 “일반인들은 성공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다.”는 발언을 했고, 2014년 도이체방크가 개최한 비공개 행사에서는 “금융개혁은 금융기관들이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부고발 전문 인터넷 언론 <위키리크스>가 클린턴에게 불리한 이메일 폭로를 예고하자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를 “그냥 드론으로 죽일 수는 없나요?”라고 말했다는 폭로도 있다. 오바마 행정부 국무장관 재임 시절로 소급되는 이메일 스캔들과 ‘클린턴 재단’ 관련 부패 의혹은 힐러리 클린턴이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에 앞서 기본적인 신뢰조차 받기 어려운 정치인임을 잘 보여준다. 설사 이 많은 폭로나 의혹을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 해도 클린턴은 이라크 전쟁에 찬성투표를 하고 리비아 침공을 주도한 경력이 있는 대표적인 민주당 우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민주당원과 저명 활동가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이 내놓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령 1970년대에 FBI의 탄압을 받으며 급진 사회운동의 선봉에 선 흑인 활동가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조차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인지 질문을 받자 “저는 제가 클린턴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아도취한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답변했다. 결국 트럼프의 당선을 막으려면 대동단결해서 클린턴을 밀어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클린턴 지지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활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은 클린턴의 경선 상대였던 샌더스를 지지하는 젊은 여성들을 그저 또래 남성을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며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이처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클린턴 지지를 호소하는 일군의 지지자들은 클린턴의 젠더와 관련된 모욕이 아닌 그가 직무상 벌인 일들에 대한 비판까지도 모두 이중잣대이자 성차별이라고 몰아간다. 그들은 불리할 때마다 클린턴을 성차별의 희생자로 묘사하면서 생물학적 여성은 모두 공통의 억압을 받는 자매이기 때문에 클린턴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다수 여성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린턴 지지자들이 말하는 대로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서로 자매와 다름이 없다면 이제까지 클린턴이 꾸준히 해 온 정치는 바로 자신의 자매들 중 다수를 죽이고 희생시키는 배신의 정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클린턴은 철저히 자본가계급과 미 제국의 편에 서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 억압, 차별을 강화하는 정치를 해 왔다. 이러한 정치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집단은 바로 여성이다.

월마트 자본의 사외이사

힐러리 클린턴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월마트 사외이사를 지냈다. 세계 1위 유통업체인 월마트가 노동조합 결성을 탄압하고 노동자의 다수가 여성임에도 임금과 승진에 성차별을 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외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클린턴은 이런 것들에 전혀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당시 월마트의 최고운영책임자(chief operating officer)이자 이사회 부의장이었던 자는 클린턴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결정들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었다고 그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 클린턴은 2005년 5천 달러 이상의 선거자금 기부는 거부하는 등 한때 자신이 복무한 월마트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의 책임을 언급하거나 월마트를 제대로 비판한 적은 없다. 2008년 ABC 뉴스에서 월마트의 강경한 반노조 정책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클린턴은 자신의 지난 책임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노조가 미국의 번영에 꼭 필요하다는 일반론만 이야기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그리고 월마트는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 퇴임 후 설립한 ‘클린턴 재단’에 꾸준히 기부금을 보내고 있다. 그 액수는 2013년 한 해에만 100만~5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거액에 대한 답례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14년 클린턴 재단은 월마트를 “소녀 및 여성의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으로 평가한 바 있다.

“먹튀”에게 복지는 안 돼!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개인적 책임과 근로기회에 관한 법안(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Reconciliation Act, 이하 PRWORA)’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현금 지원 대상자 자격 제한, 수급 기간 최대 5년으로 단축, 수급 2년 내 취업 의무화, 연방정부에서 주 정부로 공적 부조 주체 변경 등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축소하는 일련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합법적으로 등록을 한 이주자까지도 시민권을 얻기 전까지는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었다. 이로써 PRWORA는 ‘시혜적’ 복지에서 ‘생산적’ 복지로의 일대 전환을 일궜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빈민의 입장에서 재평가하자면 이 전환은 사회적 임금의 무자비한 삭감이며 빈곤의 책임을 개인의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당시 영부인으로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저술가 리자 페더스톤(Liza Featherstone)에 따르면 “노동부장관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를 비롯해 행정부 내 다른 이들이 대안을 제시하는데도” 클린턴은 “전통적 복지를 종식하는 더 강력한 정책을 옹호”했다. 실제로 1997년에 힐러리 클린턴은 “저는 복지 급여를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특정 행동들에 적용하는 것을 옹호해 왔습니다.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시키지 않거나, 부모 프로그램에 불참하거나, 학생-교사 협의회에 나오지 않으면 복지 급여를 받을 수 없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때 클린턴에게 가난한 여성이란 생존권과 인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형편없는 부모여서 국가가 처벌하고 훈육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PRWORA 이후 미국의 복지 수급율은 줄어들었는데, 이 결과는 그만큼 미국인이 실제로 빈곤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복지 제도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진보적 격월간지 <카운터펀치(Counterpunch)>의 제프리 생클레어(Jeffrey St Clair)에 따르면 PRWORA 이전에는 “아이가 있는 빈곤 가정의 70% 이상이 일정한 현금 지원을 받았다. 2010년에 이르자 어떠한 현금 지원이든 수급 비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졌고 수급량도 개혁 이전에 비해 50% 이상 줄어들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라틴계 이주자의 경우 PRWORA 이후 기존 여성 수급자의 2/3가 수급을 중단당하거나 정지당했는데, 그들 중 자신의 가족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줄 만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은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이러한 비참함은 오직 빈곤층 여성만의 것이었다. 실제 상황이 어떻든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과 제가 백악관을 떠날 때쯤 복지 수급자 수가 1410만 명에서 580만 명으로 60% 줄어들었고 수백만 명의 부모가 취업을 했습니다.”라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네오콘이 좋아하는 외교정책

“나는 그의 외교정책이 마음에 든다. … 만약 그가 우리가 기대하는 정책을 펼친다면 그것은 네오콘이라고 불려도 괜찮을 그런 정책일 것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분명 다른 이름으로 부를 테지만 말이다.” 미국 신보수주의자를 뜻하는 일명 네오콘(neoconservative)으로 불리는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 2014년에 한 말이다.

redgun_acryliconcanvas_37x28_2014_sarah_sole클린턴은 상원의원 시절 이라크 전쟁에 찬성투표를 했고, 국무장관일 때는 아프간 전쟁의 확장을 지지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시리아를 폭격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2011년에는 리비아에도 군사개입을 하자고 주장했다. 겉보기엔 리비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행금지구역’을 만든다는 목적의 폭격 제안이었다. 그러나 진짜 의도는 리비아 정세의 주도권을 미국이 잡아서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에 맞선 민중봉기가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멈추도록 하고 석유 자원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이라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민간인의 대량학살, 내전 격화, 사회적 붕괴였다. CBS 뉴스 방송 도중에 카다피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클린턴이 카메라 앞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그가 죽었노라!”라고 농담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역사적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33년 동안 CIA에서 일했다고 밝힌 누군가가 클린턴을 지지한다며 다음의 글을 쓴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안보에 대한 국무장관의 헌신을 보았고, 미국이 계속 안전과 부강을 위해 세계를 이끌어야만 하는 특별한 국가라는 그의 믿음을 보았으며, 필요한 경우 무력을 쓸 수 있고 또 기꺼이 쓰는 모습을 보여줘야지만 외교가 효과를 낸다는 점에 대한 그의 이해를 봤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나는 미국의 젊은 남녀를 험지로 보내느냐 마느냐라는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의 능력을 확인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이러한 ‘능력’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과 자칭 좌파들뿐이다.

여성 운동가를 살해하는 ‘페미니스트’

힐러리 클린턴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UN 제4차 세계여성회의 총회에서 “인권이 곧 여성의 권리이고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2011년에는 유엔 제네바사무소에서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이라는 것이 그렇듯, 인종적, 종교적, 부족적, 민족적 소수자라는 것이 그렇듯, LGBT라는 것이 여러분을 열등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동성애자 권리가 인권이고, 인권이 동성애자 권리인지에 대한 이유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여성 및 성소수자 인권 부문에서 실제로 주도한 성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공화당 인사들처럼 여성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클린턴의 존재는 반가울 수 있다. 하지만 중앙아메리카의 나라인 온두라스의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수자 활동가들에게 힐러리 클린턴의 존재는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야기는 2006년 온두라스에서 마누엘 셀라야(Manuel Zelaya)라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서 출발한다. 셀라야는 애초엔 보수적 강령을 내걸고 당선되었지만 집권 이후 서서히 좌선회하더니 최저임금을 80% 인상하고 무상교육을 실시했으며 급기야 2008년에는 헌법 개정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온두라스 지배계급과 미국은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카리스마적 좌파 대통령인 휴고 차베스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예정된 2009년 6월 28일 온두라스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켜 셀라야를 대통령직에서 쫓아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정부가 이 쿠데타를 비판했지만 미 국무부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군에 의해 무력으로 축출된 이 상황을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것조차 회피했다. 당시 국무장관이던 힐러리 클린턴은 조속한 민주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재선출하면 그만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셀라야를 복귀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고 사실상 쿠데타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도 클린턴이 당시 온두라스 반동 정치에 공모한 정황이 있다. “그[클린턴]의 이메일은 2009년 마누엘 셀라야에 맞선 쿠데타가 초기일 때, 즉 개혁적인 대통령을 복권시킬 기회가 실제로 남아있던 그 때 그[클린턴]가 쿠데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온두라스에서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라틴아메리카 전문 역사학자인 그렉 그랜딘(Greg Grandin)의 논평이다.

쿠데타 이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 테러, 노골적인 부정 선거가 온두라스에 이어졌다. 새로운 정부는 기업의 암살단 운영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첫 표적은 다름 아닌 여성과 성소수자였다. 가장 빨리 이뤄진 조치는 사후피임약 불법화였다. 표현의 자유 증진을 위한 국제 운동 <인덱스 온 센서십(Index on Censorship)>에 따르면 1994년부터 쿠데타 이전까지 온두라스에서 살해된 성소수자는 총 20명이었지만 쿠데타 이후부터 증가해 2015년 한 해에만 37명이 살해되었다. 다국적 인권단체 <글로벌 위트니스>가 2015년에 펴낸 보고서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온두라스에서 총 101명의 시민운동가가 살해되기도 했다. 자본만을 위한 댐 건설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던 여성 환경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Berta Isabel Cáceres Flores)도 올해 3월 그렇게 암살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이 모든 죽음에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역사학자 그랜딘은 다음의 내용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클린턴을 대통령감으로 지지하는 풀뿌리 민주당원들은 아마도 환경운동가들, LGBT 활동가들, 사후피임약 이용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진보적 종교인들, 광산개발과 바이오연료개발에 반대하는 농민들, 온두라스의 잔혹한 경찰-감옥 체제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법률운동가들로 이루어진 연합, 그리고 온두라스 쿠데타를 되돌리려고 노력한 이 연합에 매우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클린턴은 범죄집단에 불과한 온두라스 과두정부에 그들을 넘기는 행위를 했다. 2009년과 2010년 초에 클린턴이 편든 그 범죄집단의 손에 수백 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양당 체제에 균열내기

33e2209100000578-0-image-a-24_1462568617604인권이 곧 여성의 권리이고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고 말하고 동성결혼 지지 입장을 밝히는 생물학적 여성이 미국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것은 분명 가슴 벅찬 역사적 진보이다. 그렇지만 이 진전은 결코 힐러리 클린턴 본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두라스에서 클린턴의 공모로 목숨을 잃은 수백 명의 활동가들과 그들의 전 세계 동지들이 인권 운동에 투신한 덕분에 클린턴은 그런 입장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표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과 성소수자가 해방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은 무엇일까. 자신도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며 클린턴 지지를 호소하는 오바마에게 환호하는 것일까, 아니면 베르타 카세레스처럼 억압에 맞서 싸우다 살해된 여성 활동가들과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뜻을 이어가는 정치를 우리 손으로 해나가는 것일까.

오바마와 카세레스 중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의 두려움이다. 흑인, 이민자, 노동자를 더욱 폭력적이고 노골적으로 탄압할 게 빤한 트럼프 같은 작자의 집권이 두렵지는 않은가? 미국 녹색당의 질 스타인(Jill Stein) 같은 좌파 후보는 어차피 당선가능성이 낮은데, 주어진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클린턴 같은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양자택일을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해야만 하며, 거부하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미 미국의 좌파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은 트럼프 당선에 대한 두려움의 정치를 극복하고 민중운동의 힘으로 트럼프와 힐러리 둘 모두와 맞서 싸우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카운터펀치(Counterpunch)>에 기고한 ‘지금이다: 트럼프와 클린턴식 신자유주의 둘 다 패배시키기’라는 글에서 마크 테일러(Mark Lewis Taylor)는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경고는 백인 엘리트나 흑인 엘리트, 혹은 백인의 부와 권력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을 선포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에게로 달려가는 것은 좋게 말하면 가난한 이들의 조직화 능력에 대한 심각한 과소평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약자들이 저항을 할 때 발휘하는 창조성을 선심 쓰듯이 바라보는 오만함이다.” 테일러는 지배계급이 강요하는 지금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미국 민중의 투쟁이 경찰의 인종주의적 만행에 맞서 최근 2년간 조직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와 같은 운동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이제 준비해야 할 것은 민주당 전당대회를 거부하는 식으로(*실제로 지난 7월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민주당전국위원회의 편파적 경선 관리와 클린턴 후보 지명에 항의하는 당원들이 행사 도중 집단으로 대회장을 퇴장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다수 민중의 선택을 직접 보여주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후 그 성과를 토대로 지금의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대안적인 민중정당을 건설하자고 요청한다.

이미 미국의 양당 체제는 약화되고 있다. 최근 진행된 트럼프와 클린턴의 2차 TV 토론은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폭로하려는 싸움이었으며, 정치 혐오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두 후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선 후보로 공공연히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은 미국 양당 체제의 약화 조짐이 가장 선정적으로 드러난 장면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보수 언론조차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정치 지형이 ‘양극화’ 되고 있다며 ‘극좌’와 ‘극우’의 집권 모두를 짐짓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난민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람들의 안위가 아니다. 몇 년째 해결되지 않는 세계적 경제 공황 속에서 민중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이제까지 자본주의가 마치 인간적인 체제인 양 포장하는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적 담론에 어떤 식으로든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 지형의 ‘양극화’로 인해 자유주의적 담론이 약화되어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나고 계급투쟁이 격화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 민중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그런 자유주의적 담론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객관적으로 처해 있는 위기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자본가계급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의 트럼프나 프랑스 극우정당 ‘민족전선’의 대표 마린 르펜 같은 이들의 과격한 발언에 겁을 먹고 자본가계급 정치만이 가능한 지금의 판을 감히 깨지 못하도록, 체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투쟁에 감히 나서지 못하도록 저지하려 한다.

미국 민중은 자본가 출신의 성차별주의자이자 이주자 혐오자인 트럼프도, 제3세계 민중을 학살하며 네오콘의 사랑을 받는 ‘페미니스트’ 클린턴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또 세계 어디에서도 양당 체제라는 그들의 판을 깨고 우리의 판을 새롭게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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