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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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경남도민일보

자본주의가 만성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매년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산재사고로 사망하고, 하루 40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2015년).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해고의 불안에 떨고 있고, 청년들은 수많은 스펙에도 불구하고 취업이 거부당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보듯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4대강에 이어서 온 산천이 파헤쳐지고 있다.

미르재단이나, 우병우 수석의 문제, 유성, 갑을오토텍의 노동조합 파괴, 대우해양조선의 문제 등 자본가계급과 그 정권의 부패도 더 이상 감춰지지 못하고 터져 나오고 있다. 마치 모든 인간들이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인간의 탐욕이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문제는 문제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탐욕이 문제일까’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다. 아니, 회의해야 한다. 운동이 과학이라면.

운동은 과학적 이성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그 중에서 과학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석하고, 현실적이며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운동이 과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모든 현상이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현상에 가려지거나 부분적으로만 드러내는 모순의 퍼즐들을 맞춰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험이나 직관으로만 가능하지 않다. 원인에 대한 진단이 틀리면 대안도 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동은 과학이어야 한다.

인간의 탐욕이 문제일까?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는 주장은 특히 4대강의 녹조와 설악산 케이블카로 대표되는 산지난개발 등 생태문제에서 많이 주장되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이 생태환경을 무참하게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 용산학살로 대표되는 재개발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주장은 생태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에서도 매우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정규직 양보론(노사정대타협)이다. 귀족노조로 비난받고 있는 노동운동이 솔선해서 임금 등을 양보하면 더 많은 미조직노동자(비정규직)를 조직할 수 있고,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낮은 조직율과 영향력으로 위기에 처한 노동운동을 극복하자고 한다.

어떻게 보면 매우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인간들이 욕심을 조금씩 줄이면, 자제할 수 있다면 매우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보인다. 자본가는 이윤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노동자는 저고용의 시대에 임금 등을 양보하고, 인간들은 편리함에 대한 욕심을 줄이면 과연 새로운, 평등한 세상이 가능할까? 과연 이런 희망대로 될 수 있을까? 인간이 탐욕을 조금씩 줄일 수 있다면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할까? 단언컨대 아니다.

인간의 탐욕이 죄라면 인간은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믿어야만 한다. 과연 인간은 태어낼 때부터 어떤 심성을 갖고 태어날까? 그러나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그러한 심성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일 뿐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인간이 성장하는데 있어 주변 (교육)환경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고 있는 교훈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주장과 배치된다.

탐욕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강요한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주장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의 탐욕을 강제하는 조건(구조)의 문제라고 말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것인가, 파업에 나설 것인가, 해고를 감수하고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은 대부분 전적으로 자신의 삶(생존)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경우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숫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기 어려운 강요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나 계획과 다른 선택을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새로운 삶(세상)은 올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엔 ‘원인과 결과’, ‘현상과 본질’이라는 범주가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범주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리가 없다”는 말이다. 결과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결과는 없다. 수많은 연관이 얽히면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연관이 단순하지 않아서 직관이나 경험만으로는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현상은 본질은 단 한 번에 100%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드러난 현상만 보고 본질을 단박에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현상은 부분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거나 감추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이 필요한 것이고, 운동은 반드시 과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열거한 끔직한 사회적 문제들이 단순히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설득만하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그 진실을 보여주기만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만 판단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이 사회가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대안을 만들 수 있을까? 각자 개인의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면 우린 그저 개인들이 결단하기만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조직)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조직(운동)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개인의 의지와 계획에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것이며, 강제하고 있는 현실에 맞서 그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윤을 위한 착취시스템,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사회이다. 즉 이윤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시스템이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설마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팽창하던 제국주의가 세계시장을 필요로 했고, 더 이상 평화적으로 분점할 수 없었던 제국주의국가들의 시장쟁탈전이었다는 건 보수적인 역사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윤을 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조건에서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계획대로 선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극소수의 의지주의자들이 이 상황을 거부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지 않고,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 40명의 자살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바로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청년실업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범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이 될 수 없다. 강제하고 있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자본주의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분배의 몫과 방식을 결정하는 자본가계급이 지배계급이라는 점이다. 또한 자본가계급은 권력과 학교, 언론 등 이 사회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한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는 주장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것을 가로막고, 개인의 문제로 해체하려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운동은 과학이어야 한다

운동은 탐욕 그 자체가 아니라 탐욕을 강제하는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집단적인 실천이다. 그 조건을 완화하거나 완전히 해체해서,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과 모두의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계급이 배타적으로 소유한 생산수단을 생산자인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인 소유로 전화시키는 것으로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우리 운동은 바로 그 ‘사회적 소유’를 쟁취하기 위한 실천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회를 나는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개인의 결단도 소중하고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이 끔찍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은 과학이어야 한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의 연관을 파악하고,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실천으로 그것을 검증하고 실현시켜나가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는 도덕적 감수성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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