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 무너지는 지배질서와 새로운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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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Damien Meyer/AFP/Getty Images]

한국에서는 촛불투쟁으로 가능해진 조기대선으로 한창 시끄러울 무렵, 프랑스에서도 대선이 있었다. 39세의 젊은 신인 정치인 엠마뉘엘 마크롱이 4월 23일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 5월 7일 2차 결선투표에서는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느 르펜을 압도적 표차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선거 결과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이 글은 프랑스 대선을 규정한 여러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대선 결과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008년 자본주의 대공황과 프랑스 지배질서의 약화

2008년 발발한 대공황은 전세계 자본주의에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남겼고, 여전히 세계 경제는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공황은 노동자민중의 삶에 악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지배체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민중을 체제에 붙어있게 해주는 초보적인 대의성조차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며 “금권정치”라는 계급적 본질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서 혁명적 상황의 주요 징후 중 하나로 지적한 “지배계급이 어떤 변화가 없이는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경우”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다. 예컨대 극우세력을 대변하는 트럼프가 권력을 잡은 미국이 그 한 사례라면, 좌파의 약진과 성장도 많은 곳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프랑스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 6-7위의 GDP 규모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GDP 성장률이 급락했다. 2007년 2.36%를 하던 GDP 성장률은 2009년 -2.94%로 최악을 기록했고, 그 후 지금까지 한 해를 제외하고는 1%대를 넘기지 못했다. 실업률 역시 급증했다. 2008년 7.5%였던 실업률은 현재 10%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15세에서 24세까지의 청년실업률은 25%에 육박할 정도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한편 재정악화를 우려한 유럽연합은 정부부채 상한을 GDP 대비 60%로 정해놓았으나, 프랑스의 정부부채는 GDP 대비 9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급증했다.

여기에 더욱 확실한 결정타를 남긴 것은 바로 대공황 극복책으로 신자유주의를 더욱 강화시킨 것이었다. 대공황 자체가 신자유주의 30년의 결과였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신자유주의의 지속 강화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른 대안은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자본가들의 권력을 대거 박탈하는 식의 자기 계급에 반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2008년 이후 유럽연합이라는 초국가적 제도를 이용하여 유럽 각국에 긴축재정과 사회보장 축소, 노동권 후퇴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가장 대표적 국가가 바로 그리스일 것인데,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대공황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우파 인민운동연합(2015년 해산하고 공화당으로 바뀜) 니콜라스 사르코지였다. 그는 집권 초기에는 사회당 우파와 손을 잡고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경제성장에 관한 아탈리 보고서, 금융 및 세계화에 관한 베드린 보고서, 공공투자에 관한 주페-로카드 보고서 등 초당적 보고서 작성을 추진하고 사회당 출신 인물을 내각에 기용했다. 이번에 프랑스 대통령이 된 마크롱 역시 이 시기 사르코지 정부에 입각했다.

1958년 제5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프랑스에서는 대부분 중도 우파 공화당 계열 정당과 중도 좌파 사회당이 서로 경쟁하며 번갈아 집권하며 급진세력의 등장을 배제하고 지배체제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적이었던 시기에는 이것이 가능했으나, 대공황으로 인해 이런 양당 구조는 불안정해졌고 자본가들에겐 새로운 지배질서가 필요했다. 사르코지 정부의 행보는, 양 세력이 기존의 좌우파 구분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함께 협력해서 지배체제를 안정화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자본가계급 역시 바라던 바였다.

이런 프랑스 판 “협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이제 기존 지배세력이 좌우파의 탈을 버리고 자본주의 체제 구원을 위해 함께 힘을 모으길 바랐지만, 대공황 이후 프랑스 민중의 민심은 기존 질서로부터 멀어졌고 그 결과 프랑스 정치의 양극화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보통선거에 입각한 대중의 지지에 의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으로서는 이런 변화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사르코지는 2009년부터 우경화되는 지지자들을 달래고 극우 국민전선으로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족정체성을 부각하는 등 민족주의, 인종주의적 정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지지자를 잡기 위한 우경화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르코지는 2012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패하고 만다.

17년 만에 집권한 사회당, 완전히 추락하다

사회당의 집권은 미테랑 이후 17년 만이었다. 선거 기간 동안 올랑드는 각종 급진적 공약을 내걸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금융계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사회보장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백만 유로(약 12억3천만 원) 이상 고소득자에게 75%의 소득세를 물겠다는 공약도 제시했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올랑드 정부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집권 초기까지는 올랑드 정부도 녹색당을 주요 부처에 입각시키고, 내각의 절반을 여성으로 임명하며, 동성혼을 허용하는 토비라 법을 통과시키는 등 좌파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2년 말, 소득세 75% 법안이 헌법평의회에 보내져 부자에 대한 불법적 차별이라는 이유로 위헌 판단이 내려졌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12월 예산부차관 제롬 카후작이 해외에 불법 은행계좌를 보유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사르코지 시절과는 다른 “정상적”이고 “도덕적” 대통령이라는 올랑드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됐고, 좌파 지지자들의 실망도 컸다.

이 사건은 올랑드 정권의 전환점이 됐다. 올랑드는 정권 유지를 위해 우선회하여 우파세력을 포용했다. 2013년 1월 은행 개혁이 무산됐고, 불법이민자 추방이 급증했다. 프랑스 시민권이 없는 사람에게도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을 주던 정책이 중지됐고, 고용 확대 약속의 반대급부로 자본에게 많은 재정 선물을 안겨주는 “책임협약”이 체결됐다. 사회당과 정부 내에 “프롱드파”(17세기 파리민중이 주도한 프롱드의 난에서 따온 명칭)라는 이름의 반대파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올랑드는 내각 내 좌파들과 더 이상 동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2014년 4월 소폭 개각, 8월 대규모 개각을 단행해 정부 내 사회당 좌파를 완전히 정리하는 동시에 사회당 우파인 마누엘 발즈를 총리에 임명했다. 우파로 물갈이된 8월 개각에서 마크롱이 경제부장관으로 임명됐다. 마크롱은 장관 취임과 동시에 35시간 노동제 재검토를 들고 나왔다.

이로써 올랑드의 우경화는 더욱 강화됐고, 이는 여러 정책으로 드러났다. 우선 2014년 말, 규제를 완화하고 시장 역할을 강화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마크롱법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은 그때까지 프랑스에선 상상도 못하던 일요일 노동을 가능하게 했기에 큰 논란이 되었다. 대중과 의회가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당의 공약에 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랑드 정권은 입법절차를 단축하는 헌법 49조 3항을 이용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2015년 발생한 두 차례의 파리 테러와 비상사태 선포를 기회로 올랑드는 테러 사건으로 유죄를 받은 프랑스 시민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반민주적 개헌을 추진했다. 이 개헌은 사회당 좌파뿐 아니라 공화주의를 고수하는 온건 우파들까지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결국 부결됐다.

그리고 올랑드 정부의 우경화는 2016년 2월 17일 엘 콤리 법 의회 제출과 함께 종장으로 치달았다. 이 법은 법정 노동시간 증가, 초과노동수당 삭감, 해고 용이화, 퇴직수당 제한, 공식 휴일 축소 등의 폭넓은 노동개악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작업장에서는 노조의 반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작업장 내 총투표를 도입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른바 “규범 서열”을 완전히 바꿔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역관계를 근본적으로 역전시키는 목적을 담은 법이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좌파전선 소속 캐롤린 드 하스의 인터넷 반대 청원에는 130만 명이 참여하여 프랑스 사상 최대 청원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투쟁하기 시작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파리의 레퍼블리크 광장을 점거하고 밤샘시위와 토론을 이어가면서 이른바 뉘 드부(nuit debout, ‘밤샘’을 의미함) 운동이 출현했고, 최대노조 CGT를 중심으로 산업의 각 부문에서 파업의 물결이 일었다. 전력, 운송 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사진: worldzine]

이러한 노동개악 추진으로 올랑드 정권은 노동자민중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다. 2016년 4월 올랑드에 대한 지지는 14%로 하락했고, 11월에 들어서는 더 떨어져 4%가 됐다. 또한 올랑드 정권은 법안을 49조 3항을 이용해 통과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대중이 정권뿐만 아니라 사회당 전체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49조 3항은 법안 통과를 정부에 대한 신임과 결부시키는 조항이어서, 하원인 국민의회가 24시간 내에 정부 불신임안을 상정시키지 못하면 곧장 상원으로 법안이 넘어가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다른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당 좌파는 정부 불신임안에 찬성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당론을 어기고 찬성을 하면 영구제명하겠다는 사무총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이탈하고 말았다. 불신임안은 부결됐고, 이 사태를 겪은 대중들의 입장에서 사회당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정치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2017년 대선, 지배질서의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나다

위에서 설명한 2008년 대공황 이후 상황전개로 인해, 프랑스 민중은 기존 정치에 실망하고 점차 이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민전선의 약진으로 드러났다. 비시정권 민병대, 나치 친위대 출신과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군대 베테랑, 20세기 중반 극우민족주의 조직 등이 참여하여 결성되었고 1972년 창당된 국민전선은 프랑스의 대표적 극우세력으로서 파시즘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2002년 국민전선이 2002년 1차 선거에서 16.86%, 480만 표를 얻어 결선투표에 진출한 일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경제위기가 가속화되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그리고 이를 대행하는 유럽연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 문제가 사실은 자본주의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프랑스의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고, 일자리를 빼앗은 다른 나라를 응징하고 프랑스 내 이민자를 추방하자는 국민전선의 선전에 이끌렸다. 다른 한편, 국민전선은 당을 창당한 장 마리 르펜과 결별하면서까지 극우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한 결과 국민전선은 많은 이들에게 이제는 프랑스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당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심지어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성소수자도 적지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국민전선의 세력 확장은 전통적 우파의 우경화에 일조했다. 공화당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 당내 경선을 진행했는데, “프랑스의 대처”를 자처한 당내에서 가장 우파인 프랑수아 피용이 알랭 쥐페 전 총리와 사르코지 전 대통령을 꺾고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페넬로페게이트” 등의 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서 피용의 지지율은 17%로 급락했고, 공화당 지도부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피용이 버텼기에 공화당은 아무런 대안 없이 대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집권 사회당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올랑드가 2016년 11월 지지율 하락을 못 이기고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현직 대통령의 대선 불출마는 올랑드가 처음이었다.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사회당은 “좌파경선”이란 이름 하에 모든 좌파 세력이 참여하는 완전개방형 경선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력한 좌파 후보인 멜랑숑은 이미 2016년 2월 대선출마를 선언한 상태였고 “좌파경선” 참여를 두고 동요했던 프랑스공산당도 결국 멜랑숑을 밀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사회당 후보들로만 경선이 치러지게 됐다.

2017년 1월 진행된 완전개방형 경선은 성공한 듯 했다. 1차 투표에서는 160만 명이, 2차 투표에는 2백만 명이 경선에 참여했다. 주요 후보로 사회당 우파 마누엘 발즈와 좌파 부느아 아몽, 아르노 몽뜨부르가 입후보했는데, 아몽이 발즈를 이기고 사회당 후보로 선출됐다. 이는 사회당 내부에서도 정치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몽은 프랑스의 샌더스를 자처하면서 보건‧교육부문 등 공공지출 확대, 노동시간 단축, 자본 및 부자 과세 등 여러 급진적 정책을 제시했다. 그의 핵심 정책은 월 750 유로(92만원) 기본소득이었다.

그러나 경선의 성공은 착시에 불과했다. 개방형으로 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사회당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아몽을 선택하는 것과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에 투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아몽의 지지율은 계속 5%대에 머물렀다. 그의 핵심 정책인 기본 소득 역시 별로 호소력이 없었다. 릴 제2 대학 정치학 교수 레미 르페브르에 따르면, “아몽의 보편적 소득 호소는 사실 프랑스 노동자와 연결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복지정책을 둘러싼 우익의 수사와 비슷하게, 많은 이들은 이것을 “아무 것도 안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아몽의 좌파 정책이 부담스럽고 아몽이 당선될 수 없다고 본 발즈와 같은 사회당 우파는 자기당 후보를 버리고 중도 마크롱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제 우리는 마크롱에 이르게 된다. 마크롱은 전형적인 인사이더(insider), 체제 내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른바 엘리트 교육기관 그랑 제콜 중 하나인 국립행정학교를 2004년 졸업한 후 재정감독청 관료로 일했다. 마크롱은 문화적 이슈에서는 다소 진보적 성향을 보였지만 경제정책에서는 철저하게 친시장 자유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회당 당원으로 사회당계 우파 관리, 기업경영자 조직인 “그라쿠스단”에 참여했다. 2007년에는 공화당 사르코지 대통령에 의해 아탈리 위원회 보고관으로 임명됐고 2010년에는 당시 총리 피용의 참모로 기용됐다. 올랑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그의 비서실 부장으로, 2014년에는 경제부장관에 임명됐다. 한마디로 말해 마크롱은 프랑스 주류 엘리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은 사회당과 공화당이라는 좌우구분이 사실상 겉치장에 불과할 뿐, 두 세력 공히 자본가계급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지배체제를 잘 지탱해온 제5공화국 정치제도가 2008년 대공황의 여파로 불안정해지자,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기존의 양당구도라는 허울을 스스럼없이 버리고, 공화당-사회당 주류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한 중도 대연합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지배질서를 재편하는 것을 꿈꾸어 왔다. 공화당 온건파로 총리를 지낸 알랭 쥐페의 주장이 이를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함께 통치하고 우파와 좌파 양쪽의 두 극단세력을 배제하는” 대연정을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마크롱이 2016년 8월 창당한 “앙 마르셰!(전진)”에 입당한 생고뱅(건축자재 및 유리 제조회사) 회장 장 루이 베파는 “알랭 쥐페가 대통령, 임마누엘 마크롱이 총리를 하는 대연정이 프랑스를 통치해서 함께 슈뢰더 식의 개혁을 수행하는 것을 보는 게 꿈”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좌파, 좌파전선, 녹색당이 20%, 그리고 대략 비슷한 비율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극우가 현재 20% 혹은 그 이상으로 존재한다. 60%가 남는데, 그것이 둘로 분열된다면 우리는 개혁을 위한 다수를 절대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자본가계급의 구상을 집행할 적임자로 간택된 인물이 바로 마크롱이었던 것이다. 마크롱은 비록 지배엘리트지만, 젊고 선출직에 나간 적이 없는 참신한 이미지를 가졌다. 프랑스에서는 대선 직후 총선이 치러지는데, 마크롱이 안정적 통치를 하려면 지금은 단 1석도 보유하고 있지 못한 그의 정당 ‘앙 마르셰!’가 이번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해야만 한다. 따라서 총선에서 공화당과 사회당 양당의 중도파가 마크롱 쪽에 합류하는 대대적인 정계 개편이 일어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본가계급의 지배질서 재편 구상은 쉽사리 그들의 바람대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지금 프랑스가 겪는 정치질서 해체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으로서는 그 계급적 한계로 인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크롱의 당선은 자본가계급이 지배질서의 와해를 막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멜랑숑이 약진하게 된 이유

이러한 프랑스 대선에서 장 뤽 멜랑숑의 약진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는 이번 대선 1차 투표에서 19.6%를 받아 4위를 했다. 2012년 좌파전선 이름으로 나간 대선에서 획득한 11.1%에 비하면 대단한 전진을 이룬 것이다. 1위 마크롱 24.1%, 2위 르펜 21.3%, 3위 피용 20.0%에 비하면 다른 후보와의 격차도 그리 크지 않았다.

멜랑숑은 비록 당내 좌파이긴 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사회당의 시장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주류 정치인이었다. 그랬던 그는 점차 왼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유럽연합의 사회경제 정책과 이를 지지하는 사회당에 비판적이었으며 2005년에는 유럽헌법 국민투표 부결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2008년 사회당에서 탈당한 후 독일 좌파당(Die Linke)를 모델로 하여 ‘좌파당’을 창당하고 공산당, 단일좌파 등의 좌파조직과 함께 ‘좌파전선’을 결성했다. 2016년 2월 멜랑숑은 좌파전선과 무관하게 대선 출마를 일찌감치 발표하고 선거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라 프랑스 앵수미즈(굴종하지 않는 프랑스)”를 결성한다.

[사진: jacobin]

그의 정치이념은 전통적 좌파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기존의 좌파-우파 구분이 낡은 것이라며 버리고, ‘민중(우리)’과 ‘그들’이라는 대립 구도를 전면에 내걸었는데, ‘민중(우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그들’은 바로 좌우를 막론한 기존 “정치계급”을 의미한다. 그리고 프랑스 제5공화국은 사실상 “대통령 왕정”에 불과한 “구체제”이기 때문에 “제6공화국”을 수립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제헌의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멜랑숑의 이러한 이념은 스페인 포데모스,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 샹탈 무페와 에른스트 라클라우의 민중주의, 프랑스 혁명을 잡탕처럼 뒤섞어 놓은 것이다. 멜랑숑의 오랜 동지인 라켈 가리도는 자신들의 이념을 “인간주의적 민중주의”라고 규정한다. 경제정책 역시 멜랑숑의 정치자문인 리엠 호앙-응곡에 따르면 “사회적, 생태적 케인즈주의”라고 한다. 실제로 멜랑숑의 주요 정책은 ① 제6공화국 수립, ② 유럽 조약들과의 단절(멜랑숑 조약 재협상을 추구하는 플랜 A만 아니라 플랜 A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을 떠나는 플랜 B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③ 생태적 계획 도입(가령 자연의 수용력만큼 생산하고,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100% 이행), ④ 프랑스 대외정책의 독립성 추구(NATO 탈퇴 포함)이다.

이렇게 정치이념과 노선, 정책을 살펴보면 멜랑숑과 그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정치이념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추상적 수사로 점철되어 있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경제적으로는 케인즈주의에 머무른다. 또한 그의 담론은 사실 국민전선과 같은 극우세력의 담론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가령 ‘민중(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은 극우세력도 사용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와 ‘그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다를 뿐이다. 주류 ‘정치계급’에 대한 비판도 닮아 있다. 또한 멜랑숑의 주장에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그의 선거유세에는 프랑스 국기가 유난히도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이 프랑스 내에서도 많이 제기되는지, 가리도는 멜랑숑이 주장하는 ‘국민’(nation)은 극우와 같이 인종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며, 자신들은 민족주의가 아닌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방어한 바 있다. 한편 멜랑숑 개인의 능력과 인기에 의존하는 운동방식 역시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멜랑숑은 수많은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2016년 엘 콤리 법에 맞서 싸운 노동자, 학생은 멜랑숑을 지지했다. 3월 18일 바스티유 광장에서의 선거유세에는 12만 명의 인파가 참여했고, 4월 9일 마르세유 유세에도 7만 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멜랑숑이 좌파와 노동자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적 정치세력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의 정책 때문일까? 그의 뛰어난 TV 토론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탁월한 소셜 미디어 활용 때문일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성공요인은 바로 그가 기존 지배질서와 철저하게 단절했다는 점이다.

2012년 대선까지만 해도 멜랑숑이 이런 태도를 명확하게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선 이후 좌파전선 내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그의 태도는 확고해졌다. 당시 공산당이 좌파당과 함께 좌파전선을 형성하면서도 지방선거 등에서는 사회당과의 연합을 계속 추구한 반면 멜랑숑은 이런 이른바 좌파들의 연합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회당은 이미 자본주의 지배질서의 한 축이었고, 올랑드 사회당 정부는 이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내달리다가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멜랑숑이 사회당과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지지를 획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멜랑숑을 지지한 “앙상블!”의 활동가 클레망틴 오탱도 이렇게 정리한다. “2012년 선거운동 이후, 멜랑숑은 다른 길, 즉 올랑드-발즈 정부와 완전히 분리된 사회변혁의 길을 가겠다는 자신의 외침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사회당과의 어떤 종류의 논의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는 좌파가 아닌 좌파와의 단결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일관되게 그렇게 했던 사실이 그의 중요한 성공요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에서 국민의당이나 정의당과 같은 정치세력은 “결선투표제”가 마치 대단한 제도인 것처럼 미화하지만, 사실 프랑스에서 결선투표제는 급진세력의 출현을 막는 안정적 통치기제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이번 결선투표의 경우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자본가계급은 자신들이 소유한 언론 등을 통해 극우세력 국민전선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마크롱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선동했다. 특히 멜랑숑에게 큰 압력이 가해졌다. 그렇지만 결선투표에서 극우 집권은 막아야 된다는 논리로 마크롱 지지를 천명할 경우, 멜랑숑은 그동안 자신이 주장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멜랑숑은 주류 언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에게 특정 후보의 지지를 천명하지 않았다.

‘라 프랑스 앵수미즈’가 1차 투표 이후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설문 결과 응답자 243,000명 중 36.1%가 무효표를 던지겠다고 했고, 29%가 아예 투표를 기권하겠다고 답변했다. 반면 34.8%만이 마크롱을 찍겠다고 답변했다. 이는 멜랑숑 지지자의 대다수가 결선투표제의 덫에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다. 극우세력의 부상은 당연히 위험한 현상이지만, 사실 그동안 국민전선의 존재가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악마를 설정하고 이에 대해 반대한다는 미명하에 민중을 지배질서로 수렴시키는 역할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즉 반국민전선 구도는 지배질서 유지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 Charente Libre]

다행히 이제 많은 사람들이 반국민전선 구도의 함정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가령 자코뱅에 글을 기고한 오렐리언 몽동은 이렇게 말한다. “르펜은,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정치가 전직 파시스트의 정당보다 차라리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허수아비로 봉사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르펜도 아니고 마크롱도 아니다(Ni Marine, ni Macron)”, “마크롱 2017 = 르펜 2022”, “흑사병이냐, 콜레라냐” 등을 외치며 마크롱과 르펜 모두에 반대해 거리에 나와 싸우기도 했고, 다양한 선거 보이코트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총유권자 중 기권, 무효 비율은 34%에 달했다.

이번 프랑스 대선은 프랑스 사회가 자본주의 대공황 이후 심각한 지배질서의 붕괴를 겪고 있고, 이제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 불가피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질서가 어떠한 것인지는 향후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당장 프랑스 지배계급은 마크롱의 집권으로 안도하면서 마크롱을 앞세워 친자본 정책을 밀고 들어갈 것이고,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맞선 좌파, 노동자민중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멜랑숑의 약진으로 확인되었다. 멜랑숑은 여러 정치노선, 정책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민중에게 궁극적 답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중요한 교훈은 새로운 질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단절해야만 한다는 점이고, 이것이 결국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요인이 됐다는 점이다.

요컨대 ‘일시적막’을 택할 것인가, ‘만고처량’을 택할 것인가가 중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되고 기존 질서가 뒤흔들리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견주어 주목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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