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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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12월 9일, 234명의 찬성으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범죄를 공모한 최순실과 박근혜, 자본가들에 분노했던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탄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통이 이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탄핵으로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끝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촛불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보여주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2백만의 촛불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제, 재벌 해체를 외치기 1년 전부터, 10년 전부터 거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던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말이다.

위의 사진은 11월 26일 제5차 국민총궐기에 참여했다가 만난 동지들의 피켓이다. 나에게는 그날의 참가자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피켓이었다. 촛불 이전부터 거리에서 싸워왔던 노동자, 민중에게 과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주장이었다. 이 글은 우리가 촛불의 거리에서 의심하지 않고 지키자고 주장했던 ‘민주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자는 뜻에서 쓴다.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5만에서 시작된 촛불이 12월 3일에는 전국에서 230만의 촛불로 번졌다. 국정농단 사태라 불리는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한 민심이었다. 촛불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이 체제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지기 시작했지만, 분노 이상의 의지와 계획을 가지지 못한 자발적인 촛불의 한계도 드러냈다.

손에 들린 피켓에서, 사회자의 절규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주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구호다. 얼핏보면 이 주장은 별 문제가 없고 수긍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주장은 마치 우리가 충분히 누리던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아니 그렇게 주장한다. 이것이 정말 진실인가?

이러한 논리전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주장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과거 어느 시점으로 되돌리려고 한다는 데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87년 6월을 상상하거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그 시절에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향유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과연 그 시절에 모든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마음껏 향유하며 행복했던가?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주장은 그 시절에도,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우리의 미래를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길 기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리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필요에 따라 옹호할지 몰라도, 다수에 의한 결정, 피억압자의 자주적인 결정과 책임이라는 차원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항상 적대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허위이데올로기에 갇혀있다. 부르주아의 법원조차 불법이라고 판결한 차벽에 분노하고 불법을 깨뜨리기 위해서 행동하기보다는, 그 불법을 넘어서려고하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외치는 모습이 그 예이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청산하기 전에는 사회혁명은 시작될 수 없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이며, 개혁적인 정당의 다수가 국회에 진출하거나, 그런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했던 이런 민주주의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소위 여소야대의 국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한 평생을 민주화투쟁에 나서 개혁적이라고 칭송받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입장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4년에 한번씩 투표는 하지만 여전히 배제와 차별, 착취와 수탈를 당하는 피억압자라는 고통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래서 반민주적인 부르주아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에 갇혀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체제는 생산의 주인인 노동자와 민중을 배제하고 국회와 대통령이 모든 것을 결정해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실적이거나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린 대의 민주주의제도가 최선의 민주적인 제도로 배운다.) 물론 이 동의 과정도 찬찬히 뜯어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배계급은 권력이 소수의 자신들에게 집중되어야만 다수의 노동자, 민중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거나 중립적이라는 그럴듯한 국가론을 유포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고 경험했던 민주주의는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를 당연하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작동했던 (자본가)계급독재였다.

단언컨대 우리가 경험있던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과 미래를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미래와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이 진실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동의했다고 믿었던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과거의 미신을 청산해야만 비로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바꾸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없다

진주촛불에서 한 참가자의 자유발언이 화제다. 그 주장에 매우 공감하며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하기를 원하며 그 발언 전문을 여기에 인용한다.

안녕하세요. 19살 청소년 ㅇㅇㅇ입니다.저는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성취도 없이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분야로 일을 하면 조금이나마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취업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저는 여전히 괴롭습니다.

결국 취업을 하게 되면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처럼 회사는 나를 고용하고, 나는 회사에 복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의 이윤을 위해 나의 인권은 유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삶을 옥죄여오는 돈과 노동의 굴레에 갇혀버렸고,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건물들이 있는데 왜 정작 내 집은 없는 걸까? 이렇게 마트와 음식점이 많은데 왜 정작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걸까? 옷 가게에 가면 옷들이 넘쳐나는데 왜 정작 내가 입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걸까? 세상에는 사람들이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이 충분해 보이는데 왜 아직도 부족하다면서 끊임없이 일해야만 할까?

여러분 저는 정말로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일하기 위해 공부해야 할까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이제 거짓말 같습니다. 자급자족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국가와 특수집단이 자연을 소유, 독점하고 사람들을 돈에 의해 움직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말을 듣고 정부 시스템에 따르는 자만이 물건을 소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기업과 돈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해야 나도 잘 산다며 뼈 빠지게 일한 값은 모두 기득권에게 돌아갔습니다.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 이루어졌지만 국민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저는 회사와 국가의 부속품이 되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민을 속여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킨 것이 아닙니까?자본주의에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 혹은 돈에 의해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낙오시키고 소수가 독점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 속에 나와 나의 삶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과 현 시국을 논하는 이때에, 우리의 서글픈 일상도 함께 논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 우리는 구의역에서 사망한 19살 노동자의 죽음에 슬퍼했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 과격하고 이기적인 집단이라며 외면했다. 세월호 학살에 슬퍼했지만 매년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가고, 하루 40명의 사람들이 삶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한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좋은 정책이라고 말하지만 최저임금도 못받는 노동자가 200만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해고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함께 싸우기는커녕 자신의 고용을 보장받으려고 안절부절하다못해 자본가의 편에 서기도 한다.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정유라의 말에 분노하면서도 내 아이는 1등석에 앉기를 바란다. 용산학살과 쫓겨나는 세입자의 소식에 분노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아파트를 잘 굴려서 대박나기를 바란다.

박근혜가 퇴진하면 앞서 이야기했던 이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부패, 비리가 사라지고 우리의 고통도 더 이상 없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야 한다. 이 체제가 강요하고 있는 부당한 것에 맞서 자신의 삶의 현장 곳곳에서 저항하고, 서로의 권리를 함께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부르주아의 법률이 규정한 합법/비합법의 프레임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의지가 제시하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위에서 민주주의는 없다

이번 박근혜 게이트는 자본가계급이 뇌물과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통제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한 이윤을 합법적으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수탈하는 자본주의의 계급적 본질이 폭로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벌도 공범이며, 해체하자고 한다. 과연 자본가들은 이 사태의 공범인가? 박근혜정권이 재벌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과정이며 형식에 불과한 평가일 뿐 자본가계급은 뇌물로 권력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정치권력에 합법,비합법적으로 정치자금과 뇌물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를 위해서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권력의 부패는 피할 수 없다. 삼성이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닌가? 삼성은 200억원에 달하는 뇌물을 줬다. 무엇을 바라고 주었을까? 노무현도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문민정부에서도 삼성경제연구소의 제안이 그대로 정책으로 추진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아직도 재벌이 공범일 뿐인가?

자본가들이 주범이고 배후라면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이윤의 원천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문제삼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생산수단을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세상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저 자본가계급이 추천한 관리자 한 명을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지금 촛불에서 외쳐지고 있는 자본가들의 친목단체인 전경련 해체는 의미가 없다. 자본가들의 담합은 전경련이 없어도 항상 있어왔지 않는가?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대한 개입 없이, 가족의 지배가 아닌 전문경영인의 취임과 같은 방식의 형식적인 지배구조 개선으로 자본가들의 계급착취를 근절시키고 모두를 위한 생산을 하는게 가능하겠는가?

모든 권력을 싸우는 노동자, 민중에게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새누리당을 비판하고 있지만 고작 300명의 국회의원에게, 고작 단 한명의 대통령에게, 착취와 수탈을 합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법의 보호 속에서 자신 스스로의 운명을 위탁하고 있는 우리의 투쟁에 대해서 의심하자. 왜, 국회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리인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그래서 국회는 생산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와 민중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집단이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가? 고작 4, 5년에 한번씩 치러지는 선거에 참여하여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민주적인 행동인 것처럼 유포되고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가? 이런 지배자들의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새로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상상을 하지 못하는가? 국회가 없으면, 대통령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1871년 파리의 노동자, 민중은 파리꼬뮌을 건설했다. 파리꼬뮌의 노동자,민중은 부르주아의 대의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에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개혁안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공무원의 임금은 노동자의 최고임금을 초과할 수 없다. 2. 법관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소환된다. 3. 경영자는 노동자에 의해서 선출된다. 4. 군대를 해산하고 민병대를 조직한다. 파리꼬뮌의 노동자,민중은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추앙받는 3권분립이 아니라 행정과 입법을 통일했으며, 저항권을 시민의 권리로 승인했다. 평의회원원들을 비롯한 모든 선출직에 대한 소환제도를 도입했으며, 노동자에 의한 경영진 선출과 자주관리를 도입해서 자본가계급의 계급지배 원천을 차단해 모두를 위한 생산이 되도록 했다. 비록 72일만에 끝났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밀고나가야 할 노동자의 민주주의가 150여 년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도 분명히 투쟁으로 승리한 경험이 있다. 이승만은 탄핵으로 물러났는가? 박정희도 탄핵으로 물러났는가? 이승만은 4.19로, 박정희도 부마항쟁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들불처럼 타오른 투쟁이 권력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켜 제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분노한 대중에 쫓겨 델라루사가 대통령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본가계급의 관리인인 자유주의 정당이 추진하는 탄핵이 성공하기를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범죄자 박근혜의 단죄를, 우리의 운명을 지금 국회에, 저들이 임명한 헌법재판소에 위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역사에서 온전하게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은 없다. 생산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와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계획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그런 민주주의는 5.16과 12.12와 같은 군사쿠데타나 6.29와 같은 보수세력들의 야합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졌다. 이제는 이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 소수의 국회나 대통령에게 위임되어 관리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력을 싸우고 있는 우리 스스로 행사하는 것,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정치가 쳐놓은 ‘합법’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것,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퍼지도록 하는 것,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생산하는 대중인 노동자의 손에 쥐는 것이 민주주의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됐다. 흔들리지 말고 나가자. 우리의 해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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