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성의 이해는 『자본론』 이해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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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자본론』 Ⅰ권 제1판 서문에서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라고 『자본론』의 목적을 밝혔다. 맑스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론을 정립하고 이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다. 맑스의 말처럼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자본론』(김수행 역 제2개역판) Ⅲ권, 995쪽)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전도되어(뒤집혀) 나타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데에서 맑스가 정립한 방법론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맑스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구사하여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현상을 뚫고 들어가 자본주의적 착취구조를 규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맑스는 잉여가치론을 통해 자본가의 착취가 발생하는 비밀을 밝혀내었다. 또한 자본의 축적에 따라 노동자의 처지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한편에서는 부가 축적되지만 동시에 다른 맞은편에서는 빈궁,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야만화, 도덕적 타락이 축적되어간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더 나아가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전환되는 것, 상품의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것,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노동자의 착취로 발생한 잉여가치가 이윤, 이자, 지대로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등도 밝혀내었다. 이로써 맑스는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물신성의 이해는 『자본론』 이해의 핵심이다

당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읽을 때 이 점(경제적 운동 법칙)에 주목한다. 그리고 많은 『자본론』 해설서, 구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들 역시 이 점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과 비교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 서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다른 측면에서의 특징에는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맑스가 경제적 운동 법칙을 밝히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념, 범주, 현상형태들이 본질을 은폐, 왜곡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본질이 이러한 현상형태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즉, 맑스가 본질을 밝히는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착취적 본성을 은폐, 왜곡한다는 특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맑스의 『자본론』 Ⅰ, Ⅱ, Ⅲ권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방식의 서술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맑스는 상품을 분석하는 제1권 제1장에서 상품을 다룬 후 곧바로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상품의 물신성을 폭로한다. 제2장에서는 화폐 출현의 필연성을 다룬 후 곧바로 화폐의 물신성을 폭로한다. 제7장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 후 잉여가치가 ‘상품교환의 법칙’, 즉 ‘등가교환의 법칙’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도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3권 제1편은 이윤이 잉여가치가 전환된 형태라는 것을 밝힌 후 이 이윤형태가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원천을 은폐하여 자본관계, 착취관계를 신비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양상은 수 없이 반복된다.

맑스가 이런 양상을 『자본론』에서 수없이 반복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념, 범주, 현상형태에 매몰될 경우 노동자조차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형태를 당연한 것,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경제적 운동 법칙, 진리를 밝힌 후에도 이 진리가 현상형태에 의해 은폐, 왜곡된다는 심각한 측면을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다.

맑스가 밝혔듯이 자본주의는 자신의 정체를 겉으로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겉으로는 사람들 사이에 등가교환이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대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계약관계인 것처럼 나타나는 사회로서 이 사회에서 현상형태가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맑스의 『자본론』은 다양한 사례들을 폭로하고 있다. 현상형태가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품의 물신성에서 출발하는 물신성이다. 상품물신성에서 출발하는 물신성이 점점 더 전개되고 또 다른 현상형태들, 소외형태들과도 결합하면서 자본주의의 자기은폐, 왜곡 정도는 갈수록 심화된다.

『자본론』은 제1권 제1장에서 상품물신성을 폭로하고 연이어 전개되는 화폐물신성을 폭로한다. 곧이어 자본의 신비화, 물신성을 폭로하고 제2권에서는 생산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의 유통과정에서도 발생하는 신비화를 폭로한다. 제3권에서는 이윤, 이자, 지대의 은폐, 왜곡, 물신화 심화 현상을 폭로한다. 그리고 『자본론』의 마지막 편인 제7편의 제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물신화, 신비화가 완성된 삼위일체의 공식을 폭로하고, 1,006~1,011쪽에서는 『자본론』에서 그 동안 다룬 물신화, 신비화 현상을 모두 종합하여 요약까지 한다.

『자본론』 전체를 조망하면, 물신성 문제가 『자본론』의 시작과 마무리를 차지하고 그 중간에서는 다른 현상형태, 소외형태와 결합되어 전개되며 마지막에서는 전체가 요약되어 강조된다는 것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물신성은 맑스가 『자본론』의 분석을 이것으로부터 시작한 상품에 부착된 특성이고 따라서 상품생산과 유통의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인 화폐에서 더욱더 전개된다. 이것은 자본물신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삼위일체의 공식으로 완성된다. 맑스는 그 동안 다룬 물신화, 신비화 현상을 모두 종합하여 요약하여 강조한다. 이처럼 물신성은 『자본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범주이며, 맑스가 『자본론』을 쓸 때 가졌던 문제의식이 응축되어 있는 범주이다. 때문에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관통하는 물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물신성의 이해는 『자본론』 이해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맑스 후대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물신성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대한 것은 심각한 후퇴이다. (필자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 글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니다. 다른 기회에 이런 종류의 글을 쓰도록 하겠다.)

맑스는 『자본론』을 관통하는 물신성, 신비화의 문제를 압축, 요약한 원고를 남겨 놓았다. 맑스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를 잘 활용해야 한다. 『자본론』 Ⅲ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 요약을 기본으로 하면서 『자본론』에서 물신성과 관련하여 서술된 주요한 내용들을 재정리해봄으로써 문제의식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도록 하겠다.

상품 형태 자체가 물신성을 만들어낸다.

상품 생산 사회에서 물건들을 생산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전도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상품생산자들이 독립적으로 서로 의존하지 않은 채 사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이로 인해 자기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품 생산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자신들의 노동 자체에서의 개인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게 되지 않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자본론』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러한 물신성 현상은 상품생산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생산형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신성은 상품생산 형태 때문에 발생하는 객관적인 것이다. 단순하게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이 아니다. 물신성은 환상임에 틀림없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환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사회에서 물신성은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의식, 노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의식이 각성되는 것을 가로막고 이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물신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현실을 당연하고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상품물신성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것이 다음의 화폐물신성, 자본물신성 등 모든 물신성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물신성 전개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전면화 되지만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도 부차적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부터 존재했고 이 때문에 상품물신성은 비교적 쉽게 인식된다. 즉, 물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듯한 겉모습을 취하지만 그 배후에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있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인식된다. 그러나 상품물신성에서 출발해서 물신성이 전개되면서 환상은 더욱더 전개되고, 그 결과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는 점점 더 은폐되고 본질은 점점 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자본주의와 물신성」 참조)

화폐물신성

상품물신성은 화폐물신성으로 발전한다. 화폐형태는 오로지 상품세계 전체의 공동사업(『자본론』 Ⅰ권 제1장 제3절)으로만 생길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자본론』 Ⅰ권 제2장)이 금과 은과 같은 상품을 화폐로 만든 것이다. 원래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금도 개별적인 교환에서 개별적 등가물로서 그리고 전개된 교환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등가물 상품과 나란히 특수한 등가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금은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기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금이 상품세계의 가치표현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독점하자마자 화폐상품이 된 것이다. 맑스는 제3절에서 가치형태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부터 출발해서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추적함으로써 ‘다른 모든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가능성을 갖는’ 화폐의 신비를 철저히 폭로하였다. 가장 단순한 가치형태에서의 등가형태가 이미 화폐의 신비성을 맹아적으로 갖고 있고 이것이 화폐형태에서 완성된다고 맑스는 폭로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즉, 화폐물신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의 상품, 화폐물신성을 요약한 것이 『자본론』 Ⅲ권의 다음 구절이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상품생산 일반의 가장 단순한 범주들[즉 상품과 화폐]을 논의하는 곳에서, 사회적 관계[이 속에서 부의 소재적 요소들이 생산과정의 담당자로 역할한다]를 사물 그것의 속성으로 전환시켜 버리는 신비주의(상품의 경우)나, 더욱 뚜렷하게는 생산관계 그것을 사물로 전환시켜 버리는 신비주의(화폐의 경우)를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사회형태는 상품생산과 화폐유통을 내포하는 한, 이러한 왜곡을 면할 수 없다.

(『자본론』 Ⅲ권, 1,006쪽)

이 구절에서 맑스는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문맥상 물신성으로 대체하여 읽어도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물신성

그러나 [자본이 지배적인 범주이고 규정적인 생산관계를 형성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이 요술에 걸려 왜곡된 세계는 훨씬 더 전개된다.

(『자본론』 Ⅲ권, 1,006쪽, 강조는 인용자)

화폐소유자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재료와 기계 등, 자신이 소유하는 생산수단과 결합시켜 상품을 만들게 해서 이 상품을 팔면 자본가는 재료비용, 기계 마모비용,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화폐로 받게 된다. 즉, 잉여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자본가를 위해 재생산하는 필요노동시간 이상으로 노동하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가 노동력의 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필요노동시간 이상으로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착취가 발생하는 비밀이다. 그런데 이 잉여가치는 ‘등가교환의 법칙’, ‘자유로운 계약관계’라는 틀 속에서 이를 어기지 않은 채 발생한다. 이것 때문에 외관상 마치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가치대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착취는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이에 대해서는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러한 착취의 은폐, 왜곡에 임금 형태가 가세한다. 이 점은 『자본론』 Ⅰ권 제6편 임금 제19장이 폭로하고 있다. 임금형태의 문제는 물신성 문제 자체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상이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를 가능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소득의 원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념이다. 자본가 역시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임금이라는 개념, 범주가 문제이다. 이 개념이 본질을 은폐, 왜곡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의 가격[즉 일정한 양의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일정한 양의 화폐]로 나타난다.”(『자본론』 Ⅰ, 723쪽) 실제로 임금은 노동력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임금형태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표현한다. 그 결과 임금형태는 노동일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한다. , 전체노동이 지불노동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이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의 형태로[또는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임금형태는 자본관계, 착취관계를 은폐하고 왜곡한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 현상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일체의 정의관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체의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의 토대가 되고 있다.

(『자본론』 Ⅰ권, 730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임금의 형태로 전환됨으로써 마치 자본가는, 예컨대 필요노동시간 6시간의 대가가 아니라 하루 노동일 12시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전부 지불한 것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착취관계는 철저히 은폐된다. 만약 노동자조차 이러한 현상형태에 매몰되어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경우, 착취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문제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느냐가 되고, 임금노동제의 철폐가 아니라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 되는데, 이는 이미 임금노동제를 전제하는 것으로, 즉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자본물신성은 심각하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발달과 비교할 때 자본물신성은 아직 의식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자본을 먼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으로서] 고찰한다면, 이 관계는 매우 단순하여 진정한 관련이 이 과정의 담당자인 자본가 자신에게 감명을 주어 그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된다.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이것을 적절히 증명하고 있다.”(『자본론』 Ⅲ권, 1,006, 1,007쪽)

상대적 잉여가치의 발달에 따라 더욱더 신비로운 일이 발생한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발달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모든 생산력이 노동 그것에 속하는 힘이 아니라 자본에 속하는 힘으로서, 즉, 자본 자신의 태내에서 생겨나는 힘으로서 나타난다. 또 하나의 전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본은 매우 신비스러운 것으로 된다. 맑스는 이러한 전도 현상을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부분에서 반복하여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협업에서 노동자가 발휘하는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노동자들이 일정한 조건 하에 놓일 때는 언제나 무상으로 발휘되며,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로 이러한 조건 하에 놓는 것은 자본이다. 이 생산력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 것이고, 또 이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에 속하기 전에는 노동자 자신에 의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생산력은 자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생산력으로,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대표적 방법 중 하나인 매뉴팩쳐에서 각종 노동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자본론』 Ⅰ권, 486쪽)

매뉴팩쳐는 노동자의 일체의 생산적인 능력과 소질을 억압하면서 특수한 기능만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자를 기형적인 불구자로 만든다. …… 독립적으로 어떤 물건을 만드는 것에 부적합해진 매뉴팩쳐 노동자는 자본가의 작업장의 부속물로서만 생산적 활동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자본론』 Ⅰ권, 486, 487쪽)

그러나 매뉴팩쳐에서는 그러한 능력은 다만 작업장 전체를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생산상의 정신적 능력이 한 방면에서는 확대되면서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완전히 소멸된다. 부분노동자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자본에 집적된다. 부분노동자들이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또 자기를 지배하는 힘으로 상대하게 되는 것은 매뉴팩쳐적 분업의 결과다. 이 분리과정은, 개개의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가 집단적 노동유기체의 통일성과 의지를 대표하게 되는 단순협업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분리과정은 노동자를 부분노동자로 전락시켜 불구자로 만드는 매뉴팩쳐에서 더욱 발전한다. 끝으로, 이 분리과정은 과학을 노동과는 별개인 생산잠재력으로 만들고, 과학을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대공업에서 완성된다.

(『자본론』 Ⅰ권, 487, 488쪽)

전도 현상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가장 대표적 방법인 기계제 대공업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어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도 노동자가 노동조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노동조건이 노동자를 사용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러나 이 거꾸로 된 관계는 기계의 출현과 함께 비로소 기술적인 분명한 현실성을 얻게 된다. 자동장치로 전환됨으로써 노동수단은 노동과정의 진행 중에 자본[즉 살아있는 노동력을 지배하며 흡수하는 죽은 노동]으로서 노동자와 대립한다. 생산과정의 지적요소들을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전자를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 대공업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개별 기계 취급노동자의 특수한 기능은 [기계체제에 구체화되어 있는] 과학과 거대한 물리력과 사회적 집단노동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사라져 버리며, 기계체계는 이 세 가지 힘들과 함께 고용주의 지배력을 구성하게 된다.”(『자본론』 Ⅰ권, 568쪽, 강조는 인용자)

본질을 은폐하는 이윤이라는 형태

『자본론』 Ⅲ권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모습은, 사회의 표면에서 각종 자본들의 상호작용과 경쟁에서 등장하는 자본의 형태, 그리고 생산담당자 자신들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등장하는 자본의 형태로 한발 한발 접근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형태들은 더욱더 본질을 은폐한다.

비용가격은 생산물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C)과 노동력의 가격(V)의 합계인데 잉여가치는 비용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이다. 잉여가치가 비용가격과 비교될 때 C와 V의 구별은 무시된다. 투하 총자본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서,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전화 형태를 갖게 된다. 이윤에서는 자본의 모든 성분, 계기가 초과가치의 원천으로서 나타나는 것에 의하여, 자본관계는 신비화된다. 총자본과 잉여가치의 크기 사이에는 내면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로부터 출발하면 가변자본(V)과 잉여가치(S)의 관계는 이해될 수 없다.

자본가의 의식에서 이윤은 잉여가치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본가는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을 잊어버리고 상품가치의 실현(잉여가치의 실현도 포함한다)을 잉여가치의 생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유통과정에서 가치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유통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생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본가는 잘못 생각하여 그의 이윤이 노동의 착취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착취와 무관한 다른 사정, 특히 사업수완 등, 자기 자신의 개인적 행동에 연유한다고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잉여가치의 이윤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제3권 제1편에서 본 바와 같이] 생산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유통과정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잉여가치는 이윤의 형태에서는 노동에 지출된 자본부분[여기로부터 잉여가치가 발생한다]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과 관련을 맺는다. 이윤율은 그 자신의 법칙들에 의해 규제되는데, 이 법칙들은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더라도 이윤율의 변동을 허용하고 심하게는 이 변동을 일으키기조차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잉여가치의 진정한 성질을 더욱 더 숨기며 따라서 자본의 진정한 메카니즘을 숨긴다.

(『자본론』 Ⅲ권, 1,008쪽)

본질을 더욱더 은폐하는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

은폐는 이윤의 평균이윤으로의 전환과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고 가정할 때 어떤 생산부문에서 유기적 구성이 보다 높거나 회전속도가 보다 느릴 경우, 이윤율은 낮아진다. 반대로 유기적 구성이 낮거나 회전속도가 빠르면 이윤율은 높아진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현실에서 자본들 사이의 이윤율이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본간 경쟁으로 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쪽(가령 유기적 구성이 낮은 쪽)으로 이동하여 그쪽에서의 이윤율을 하락시키고 이윤율이 낮은 쪽(가령 유기적 구성이 높은 쪽)의 이윤율을 상승시켜 이윤율을 균등화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실제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각자본가는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가 아니라, 총잉여가치 중에서 총자본에서 점하는 투하자본의 비율에 따라 자기 몫의 평균이윤을 차지한다. 마치 주식회사의 주주가 보유주식수에 따라 자기 몫을 차지하듯이 말이다. 이때 각각의 생산분야에서의 이윤과 잉여가치사이의 현실적인 양적 차이가 발생한다(물론 사회전체의 차원에서는 이윤과 잉여가치가 일치하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양적 차이는 이제 이윤의 진정한 성격과 원천을 자본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은폐한다.

이러한 내용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이윤의 평균이윤으로의 전환과 가치의 생산가격[시장가격을 규제하는 평균]으로의 전형과 함께 더욱 더 심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복잡한 사회적 과정인 자본들의 균등화과정이 개입하는데, 이 과정은 상품들의 상대적인 평균가격을 그들의 가치로부터 분리시키며 각종 생산분야(특정 생산분야의 개별투자들은 무시한다.)의 평균이윤을 각 분야의 자본에 의한 현실적인 노동착취로부터 분리시킨다. 상품의 평균 가격은 그 가치[즉 상품에 실현되어 있는 노동]와 다르게 보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다르며, 개별자본의 평균이윤은 그 자본이 자기의 노동자로부터 끌어낸 잉여가치와 다르다. …… 정상적인 평균이윤 그것은 착취와는 무관하게 자본에 내재하는 것처럼 되며, 극심한 착취나 예외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의 평균적인 착취까지도 오직 평균이윤으로부터의 편차만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 평균이윤 그 자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본론』 Ⅲ권, 1,008, 1,009쪽)

이자낳는 자본에서 자본관계는 가장 외면적이고 물신화된 형태에 도달한다.

이자낳는 자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윤은 이자 및 기업가 이득으로 분할된다. 이윤의 한 부분이 이자로 전환되기 때문에, 다른 부분이 기업가 이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자낳는 자본 그것이 자기의 대립물로 삼고 있는 것이 임금노동이 아니라 기능하는 자본이기 때문에, 기업가 이득은, 이자와 달리, 자본소유와는 관계없는 것으로서, 기업가 이득=감독임금이라는 허상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기능자본가의 머릿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관념이 생긴다. “즉, 그의 기업가 이득은 임금노동과 대립되기는 커녕 그리고 타인의 불불노동에 불과한 것이기는 커녕―오히려 그 자체가 임금이며 ‘감독임금’이고 보통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은 임금이라는 것이다.”(『자본론』 Ⅲ권, 465쪽)

이자낳는 자본에서 자본관계는 가장 외면적이고 물신화된 형태에 도달한다.

완성된 형태의 자본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이며, 따라서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잉여가치를 낳는 자본이다. 이자낳는 자본의 형태에서 자본은 이러한 형태로 직접적으로―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매개 없이―나타난다. 자본은 이자[즉 자기자신의 증가]의 신비로운 그리고 자기창조적인 원천으로서 나타난다. 사물(화폐․상품․가치)은 이제 단순한 사물로서 이미 자본이며, 자본은 단순한 사물로서 나타난다. 총재생산과정의 결과가 사물 그것에 내재하는 속성으로서 나타난다. …… 그러나 이자낳는 자본에서는 이 자동적인 물신이 순수한 형태―즉 자기 자신을 증식시키는 가치, 화폐를 낳는 화폐―로 완성되며, 이 형태에서는 자본은 더 이상 자기의 기원의 흔적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가 하나의 사물―즉 화폐―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완성되고 있다.

(『자본론』Ⅲ권, 479쪽)

여기에서는 더 심한 왜곡이 나타난다. 이자는 기능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하는 이윤 또는 잉여가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이자가 자본의 고유한 과실이며 본원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이윤은 지금 기업가 이득의 형태로 전환되어 재생산과정에서 첨가되는 단순한 추가물·부속품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자본의 물신적 형태와 자본물신의 관념이 여기에서 완성되고 있다.

(『자본론』 Ⅲ권, 480쪽)

이 형태에서는 이윤의 원천이 더 이상 인식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결과가 과정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적인 존재를 획득한다.

이러한 내용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윤의 기업가 이득과 이자로의 분할은―[유통영역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적으로 유통영역으로부터 발생하고 생산과정 그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업이윤과 화폐거래 이윤의 개입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잉여가치의 형태상의 자립화, 즉 잉여가치의 실체나 본질에 대립하는 그 형태의 고정화를 완성한다. 이윤의 일부는 [다른 부분에 대립하여] 자본관계 그것과는 완전히 분리되고,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기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자신의 임금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이자는 노동자의 임금노동이나 자본가 자신의 노동과는 무관하며,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원천으로서의 자본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같이 되어 버린다. 자본이 최초에 자본물신[즉 가치를 낳는 가치]으로서 유통의 표면에 나타났다면, 자본은 이제 또 다시 이자낳는 자본의 모습에서 그것의 가장 소외되고 독특한 형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자본-이자’라는 형태는 [‘토지-지대와 ’노동-임금‘에 대한 제3의 것으로서는] ’자본-이윤‘보다 훨씬 더 일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윤은 아직도 그것의 기원에 대한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지만, 이자에서는 그 기억조차 소멸될 뿐만 아니라 그 기원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재생된다.

(『자본론』 Ⅲ권, 1,011, 1,012쪽)

지대에서도 물신성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자본론』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삼위일체 공식을 다룬 부분의 해당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

끝으로, 잉여가치의 독립적인 원천으로서 자본과 나란히 토지소유도 나타나는데, 이 토지 소유는 평균이윤에 대한 하나의 제한이며 잉여가치의 일부를 [스스로 노동하지도 않고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착취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이자낳는 자본의 경우처럼 자본의 대부에 따른 위험이나 희생과 같은 도덕적인 합리화도 제시할 수 없는] 계급에게로 이전시킨다. 여기에서는 잉여가치가 사회적 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요소인 토지와 직접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잉여가치의 각종 부분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와 고정화는 완성되고 내적 관련은 결정적으로 파괴되며, 그리하여 잉여가치의 원천은 [생산과정의 다른 소재적 요소들과 결부되어 있는] 각종 생산관계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에 의해 완전히 은폐되어 버린다.

(『자본론』 Ⅲ권, 1,010쪽)

삼위일체 공식에서 물신화, 신비화가 완성된다.

자본-이윤(기업가이득+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신비성을 함축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공식이다. 그리고 이 공식은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 이 형태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특징짓는 잉여가치형태인 이윤이 사라져 버린다.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일정한 생산양식인 자본과 나란히, 모든 생산양식에 공통한 토지와 노동이 아무런 추가적인 고려 없이 병렬되고 있다. 또한 자본, 토지, 노동이 이자, 지대, 임금의 원천으로서 현상한다. 사용가치인 토지가 생산물의 가치부분인 지대를 창조한다고 되어있다.

이리하여 토지소유, 자본, 임금노동은 수입의 원천으로부터 이 가치부분 그 자체와 생산물의 해당부분들을 발생시키는 현실적인 원천, 즉, 생산물들의 가치를 발생시키는 궁극의 원천으로 전환된다. 이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물신성이 완성되고 자본주의의 본질은 철저히 은폐, 왜곡된다.

상품의 물신화, 화폐의 물신화. 자본 아래에서 물신화는 더욱 발전하여 삼위일체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신비화,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 생산의 소재적 관련과 그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과의 직접적 융합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 공식은 또한 지배계급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그들의 수입원천의 자연적 필연성과 영원한 정당성을 설교하며 하나의 교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자본-이윤(또는 더 적절하게는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경제적 삼위일체[이것은 가치와 부 일반의 구성부분들과 그들의 원천 사이의 관련을 나타낸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신비화, 사회적 관계의 사물화, 생산의 소재적 관련과 그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과의 직접적 융합을 완성한다. 이것은 요술에 걸려 왜곡되고 전도된 세계이며, 그 속에서 자본 도령과 토지 아가씨가 사회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단순한 사물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외관과 기만, 부의 다른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와 고정화, 사물의 인격화와 생산관계의 사물화, 그리고 이러한 일상생활의 신앙을, 고전파 경제학이 다음과 같은 방식에 의해 해체시킨 것은 큰 공적이다. 즉 고전파경제학은 이자를 이윤의 일부로 돌리고 지대를 [평균이윤을 넘는] 초과분으로 돌림으로써 이 둘이 잉여가치라는 점에서 일치하게 하였으며, 유통과정을 단순히 형태의 변환으로서 서술하였고, 끝으로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상품의 가치와 잉여가치를 노동에 돌린 것이다.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의 최고의 대표자들조차 [그들의 비판에 의해 해체된] 환상의 세계에 다소간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부르주아적 입장에서는 불가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다소간 앞뒤사이의 불일치, 풀리지 않는 모순, 반쪽자리 진실에 빠졌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생산담당자들이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피상적이고 불합리한 형태에 매우 만족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러한 외관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외관과 매일 부딪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류경제학-이것은 현실의 생산담당자의 일상적인 관념을 선생인 체하면서 다소 교조주의적으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이 바로 이 삼위일체의 공식[모든 내적 관련이 소멸되어 있다]에서 자기의 공허한 자만심의 [자연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토대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이 공식은 또한 지배계급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그들의 수입원천의 자연적 필연성과 영원한 정당성을 설교하며 하나의 교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론』 Ⅲ권, 1,010, 1,011쪽)

이상에서, 맑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다룬 물신화, 신비화 현상을 제3권에서 모두 요약한 부분을 기본으로 하면서 『자본론』에서 물신성과 관련하여 서술된 주요한 내용들을 재정리해보았다. 재정리를 통해 물신성이 『자본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범주로서 맑스의 문제의식이 응축되어 있는 범주라는 것이 충분히 확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품은 맑스가 분석을 시작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의 기본형태’이고 물신성은 이 상품에 부착된 뗄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 뗄 수 없는 특성이 처음부터 본질을 은폐, 왜곡한다. 따라서 맑스는 물신성 문제를 지엽적인 문제로 대한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폭로해야 할 문제로 대한 것이다. 맑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신성 문제를 수미일관하게 중요하게 다룬 것이다.

물신성 문제가 『자본론』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물신성의 이해는 『자본론』 이해의 핵심이다. 물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본론』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경제주의적으로 협소하게 읽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물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물신성의 이해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자본론』을 제대로 읽느냐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물신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 수 있고 자본주의와 제대로 투쟁할 수 있다. 자본주의 상품생산 사회가 만들어 내는 물신성을 의식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진지한’ 사람들조차도 헛똑똑이가 되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틀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물신성은 자본가들의 음모의 산물이 아니다. 상품생산 사회가 만들어내는 객관적 환상으로서 이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투쟁대상을 정확히 분별해내는 것부터 어렵고 투쟁수단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의식이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와 투쟁해서 승리하겠다는 것은 허황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사회와 투쟁해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물신성이라는 사상적 무기부터 올바로 벼려내야 한다. 물신성의 이해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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