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보수-진보 ‘프레이밍’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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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YTN 뉴스 캡쳐]

야구에는 ‘프레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미트질’이라고 하는데 포수가 투수의 공을 잡을 때 심판에게 유리한 판정을 받기 위해 글러브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움직이는 행동을 말한다. 유능한 포수는 프레이밍을 통해 볼도 스트라이크로 만들곤 한다.

이런 ‘프레이밍’은 비단 야구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사실 정말 프레이밍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볼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키는 곳이 바로 주류 정치권과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파업은 언제나 불법이고 경제를 뒤흔드는 일이다. 북한에 우호적 입장을 내걸고 남북의 통일을 추구하면 종북이 된다. 이렇다보니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볼을 스트라이크로 뒤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중에서도 지배계급의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뒤바뀌어 놓는 ‘프레이밍’이 있다. 새누리당 잔당세력을 ‘보수’로,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세력을 ‘진보’로 위치시키는 거짓 보수-진보 구도가 그것이다.

거짓 진보-보수 프레이밍

어느 샌가부터 한국 사회의 정치구도를 설명하는 틀로 보수-진보 구도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언론뿐 아니라 정치권, 심지어 학계에서도 보수-진보 구도를 통해 정치를 설명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하다 못 해 박근혜 탄핵선고에서조차 보충의견 중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를 거론하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 구도에 의하면, 구 새누리당 세력(현재의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등)은 ‘보수’이고, 자유주의 세력(더불어 민주당)은 ‘진보’가 된다. 어느 사회나 정치 스펙트럼 상의 구분으로서 보수와 진보가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정치적 설명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에서 현재 횡행하고 있는 보수-진보 구도가 전혀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거짓 ‘프레이밍’이라는 점에 있다. 야구의 ‘프레이밍’처럼 ‘볼’이 ‘스트라이크’로 판정받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짓 보수-진보 구도는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과거에는 아무도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자유주의 정당들에 대해 ‘진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전에 새정치민주연합,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 등등 여러 이름의 정당이 그 계보를 이어갔지만, 이 정당들은 모두 실제 정치적 내용에서도 보수였고 따라서 모든 이가 이 정당들을 ‘보수야당’이라고 칭했다. 그랬기 때문에, 보수야당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시대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던 것이다. 반면 새누리당과 그 전신인 당들(민정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역시 단순히 보수가 아닌 수구반동세력으로 규정되고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샌가부터 이 세력들 스스로 뿐 아니라 대중도 새누리당 및 그 잔당을 ‘보수’로, 더불어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세력을 ‘진보’로 여기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근년 이 두 세력의 정치적 성격이 변화라도 한 것일까? 다시 말해 한쪽은 수구를 벗어나 최소한 보수로 ‘좌클릭’한 것이고, 다른 한 쪽도 마찬가지로 보수를 벗어나 진보로 ‘좌클릭’한 것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겉으로만 보면 과거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정치세력들이 실제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엄청 좌클릭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의 잔당들이 ‘보수’인가?

먼저 새누리당에 뿌리를 둔 잔당들이 ‘보수’인지 살펴보자.

새누리당은 박근혜 퇴진투쟁 이후 박근혜와 갈라선 바른정당과 여전히 박근혜를 추종하는 자유한국당으로 갈라졌다. 이들은 거짓 보수-진보 구도를 열심히 활용하는 세력이다. 스스로를 역사적 폐물인 수구세력으로 내세울 세력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수구보다는 나은 보수로 이미지화하려는 것이다.

현재 새누리당 잔당들은 두 당으로 갈라선 이후에는 서로 자기가 진짜 ‘보수’라며 ‘보수’ 간판을 가져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가령 자유한국당은 “우리가 보수의 진짜 적통”이라며, “보수의 힘으로 자유시장 경제를 확고히 하고, 우리 국민이 마음 편히 잘 수 있도록 안보를 굳건히 해야 한다”, “우리가 보수 개혁을 위한 선봉이자 이 나라의 민족과 보수를 새롭게 만드는 일에 함께 매진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바른정당도 예외는 아니다. 1월 24일 정병국은 대표수락 연설에서 “바른정당이야말로 진짜 보수세력이자 적통 보수”이라고 주장했고, “새누리당이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라는 보수의 기본 가치를 배신하고 자신의 패권을 지키고 기득권만 옹호했다”며 “대통령만 비호했지 진정한 보수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이승만 반공독재정권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독재의 피를 이어받은 수구반공세력이라는 점은 역사적으로 쉽게 입증되는 사실이다. 비단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최근의 모습을 살펴봐도 새누리당 잔당세력이 수구세력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어버이연합, ‘일베’와 같은 극우세력을 자기 이해를 위해 동원하는 등의 행동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어떤 세력인지 보여주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권은 탄핵소추된 1월 초까지도 친박단체들과 수시로 전화연락을 해서 탄핵반대집회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계엄령과 동족 ‘학살’을 스스럼없이 주장하는 태극기집회를 보수세력의 집회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 집회 속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 주장과 행동, 이 집회에서 버젓이 참여하는 김문수, 김진태와 같은 정치세력, 이 집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박근혜 무리를 두고 수구반동라고 규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진보’인가?

새누리당의 잔당들이 보수-진보 구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자유주의 세력도 스스로가 ‘진보’로 포장되는 것에 적극적이다. 가령 대표적 자유주의자 최장집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진보와 보수가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볼 때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이다”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유시민, 조국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칭 타칭 ‘진보’로 행세하면서 언론에서 진보인사로 소비되고 있다(필자는 이에 대해 “진보를 가장한 자유주의자”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대표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인 더불어민주당은 굳이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최근 행보만 보더라도, 전혀 ‘진보’라 부를 수 없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작년 말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수십만 민중이 거리에 나서고 있을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퇴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이 박근혜 퇴진으로 돌아선 것은 민중의 거센 압력에 의해 퇴진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박근혜를 퇴진으로 내몬 근본동력”을 읽어보기 바란다.)

더 나아가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들인 안희정, 문재인, 이재명은 연일 ‘보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안희정은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든 수구세력들과 대연정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은 박근혜 퇴진 물결이 거셀 때에 계속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했고 더 이상 퇴진 요구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퇴진 입장을 받아들였다. 얼마전에는 안보에 집착하며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을 영입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최근 문재인이 영입한 민주당 인사들이 반노조 친기업 발언을 해서 큰 문제가 되었다. 양향자 더민주 최고위원은 페이스북에 “전문 시위꾼처럼 귀족 노조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한다”며 반올림을 비난했다. 경제부총리, 감사원장 출신으로 문재인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전윤철은 3월 1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악성노조”를 운운하여 논란이 되었다. 사실 “악성노조” 발언으로 가려졌지만 이 인터뷰에는 훨씬 문제가 될 발언이 많았다. 예컨대 전윤철은 “국가 주도로 대규모 서비스산업단지를 개발해서 먹을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을 상대로 하는 의료단지뿐만 아니라 카지노도 새만금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증거들이 널려있는데,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세력을 ‘진보’라 부를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는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들 중 한 명인 이재명의 솔직한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재명은 적지 않은 노동자들에게서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야말로 자유주의세력의 본질을 가장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는 작년 12월 10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한 특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저더러 진보좌파라 하는데 진보가 아닌 진짜 보수로,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기회가 공평하고 공정 경쟁하고 기여한 만큼 합당한 배분을 받는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다. “그걸 잘 지키는 게 보수의 가치”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진보라고 하는 사람은 보수의 탈을 쓴 수구 기득권 세력”이다.

그런데 이재명의 거침없고 솔직한 태도에 끌린 지지자들은 이재명의 이런 자기고백에 대해 귀를 닫고, 그를 진보적, 노동자 후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요컨대 이재명의 말마따나 더불어민주당이 바로 진짜 보수정당인 것이다.

지배계급의 합작품, 거짓 보수-진보 구도를 걷어내자

각 세력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에 맞춰 각각 올바른 이름을 부여하면, 한국의 주류 정치는 우경일색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거짓 보수-진보 구도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실을 감출 수 있었다. 수구세력이 거짓 보수-진보 구도를 택한 것은 스스로를 보수로 칭함으로써 보수성향의 사람들을 폭넓게 수구세력 쪽으로 견인하는 한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반대세력인 자유주의세력을 쉽사리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세력은 스스로를 ‘진보’로 포장함으로써, 노동자와 민중의 의식을 호도하고 진보운동세력을 포섭․견인하여 왼편의 급진적 세력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주류 언론도 지배질서 유지에 용이한 거짓 보수-진보 구도를 유포하는 데 앞장섰다.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할 것없이 이런 구도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거짓 구도가 계속 유포되다 보니, 실제로 자유주의세력을 ‘진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보수와 진보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보수와 진보는 어느 시기나 동일한 고정되고 추상적인 구분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구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진보를 규정한다면, 노동자와 민중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고 억압과 착취의 굴레를 더욱 영속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이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정치적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이 그 규정의 핵심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급진적 정치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등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거짓 보수-진보 정치 구도는 노동자민중의 삶이 악화되는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의제에서 제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이 거짓 구도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모순이 계속 악화되고 있고 이로 인해 심각한 삶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부합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말하고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적 요구를 제기하며 투쟁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치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이 눈의 띄게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존재하겠지만, 주류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 유포하는 거짓 보수-진보 구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유주의가 진보를 참칭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를 문제삼는 사회주의 정치가 들어설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청산과정에 있는 수구세력을 보수라고 생각하고 보수세력인 자유주의를 진보로 생각하는 왜곡된 정치구도를 깨부숴야 한다. 노동자민중으로 하여금 자기 이해에 반하는 자유주의 세력을 진보로 오인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 시기에, 노동자민중이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악화된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주역이 되고자 한다면, 이런 거짓 ‘프레이밍’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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