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착취와 자연 파괴: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동전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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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지난 12월 2일부터 제2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1992년 6월 리우데자이네루에서 개최된 리우 정상회의에서 채택되었는데, 이 협약에 따라 매년 협약에 서명한 당사국들이 모여 회의를 연다. 이번 총회는 애초 칠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민중의 투쟁으로 칠레는 총회 개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스페인으로 총회 장소가 급하게 변경되었던 것이다. 칠레로 향하다 스페인으로 방향을 바꾼 툰베리는 지난 6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기후행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지금과 같이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지 않을 겁니다. 변화는 대중들로부터, 행동을 요구하는 민중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변화를 가져 올 사람들입니다.”

노동과 환경이 대립된다는 그릇된 편견

툰베리의 외침처럼 기후위기를 막는 원동력은, 기후위기를 낳은 지배계급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민중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에서도 가장 큰 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야말로 기후위기를 막을 가장 중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이 지금까지의 기후위기 운동, 그리고 환경운동 전반에서 경시되어 왔다. 아니 오히려 노동자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며 반환경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일도 빈번했다. 가령 환경운동에는 고용에 눈이 먼 노동자들이 환경은 등한시한다는 이른바 “노동 대 환경의 대립”이라는 편견이 존재해왔다. 11월 27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10주년 심포지엄에서 한재각 소장은 「한국의 2050년 온실가스 배출제로와 정책 과제」란 발표문에서 “두산중공업이 영위하는 석탄발전 관련 생산․영업 활동의 지속은 국내외의 탈석탄 캠페인의 핵심적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면서 “전형적인 ‘노동’ 대 ‘환경’의 구도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당일 토론자로 나가 “두산중공업이 영위하는 석탄발전 관련 생산·영업 활동의 지속”은 자본의 영업활동인데, 이것이 곧장 “전형적인 ‘노동’ 대 ‘환경’의 구도”로 치환되고 있다는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였다.

물론 이러한 환경운동이 말하는 “노동 대 환경”의 대립에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제 앞의 협소한 이익을 위해 자연환경의 파괴에 나 몰라라 한 경우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기후위기와 같은 심각한 인류적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도 이러한 잘못된 대립을 기정사실화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 세력들에서 노동자를 빼버린다면 그 투쟁은 승리할 수 없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기후위기 운동에서 배제된다면 그 운동은 제 아무리 정당해도 소수에 국한되는 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들은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의 선두로 설 역량과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만 아니라 더 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싸워오고, 작업장 환경 악화와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투쟁해온 경험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예컨대 2013년 키스톤XL이라는 미국의 대규모 석유파이프라인 공사에 반대한 미국 운송노조와 통합여객노조의 경우나 몇 년 전 기후위기 문제를 적극적으로 자기 의제화하여 대안을 제시한 영국 노동조합들의 “백만 개 기후 일자리” 운동을 그 예로 들 수 있다(필자가 2013년에 쓴 「생태를 자신의 요구로 만든 노동자들의 이야기」(『해방』 79호)를 참조). 또한 ‘에너지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해 2012년 출범한 국제적 노동조합 모임인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Trade Unions for Energy Democracy)”도 한 예가 될 수 있다(구준모, 「노동운동, 기후·에너지 위기에 새롭게 접근하자」(『오늘보다』 창간준비1호)).

더 근본적으로 보면, 기후위기의 원인은 바로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가 기후위기를 낳게 되는 방식은 바로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 억압하는 방식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노동자의 객관적 처지에 비추어볼 때, 노동자가 자신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자본주의와 싸우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자는 기후위기 운동의 중심에서 이 운동을 이끌어갈 막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체제

필자는 이미 「맑스주의 생태론을 말하다 ②」에서 ‘물질대사’ 개념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과 자연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끊임없는 물질대사 과정을 겪는데, 이 물질대사 과정은 노동이라는 인간 고유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과정은 어느 한 형태로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띤다. 이 형태는 인간의 노동형태, 혹은 생산방식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는 그 고유의 생산방식이 존재하고, 이 생산방식이 자본주의만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과정을 규정하게 된다. 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방식이 아니라 이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방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이윤에 대한 욕망은 가히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규명한 맑스의 『자본론』에서 매우 인상적인 사례로 설명되고 있다.

① 자본주의와 노동자 착취

이윤의 원천은 바로 노동자의 잉여노동인데, 잉여노동 자체는 비단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과거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도 존재했다. 다뉴브 제후국의 보야르라는 발칸지역 봉건 대지주와 영국의 공장주를 비교하면서 맑스는 “생산물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 사용가치가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잉여노동은 다소 한정된 욕망의 범위에 의해 제한되며, 잉여노동에 대한 무제한의 욕망이 생산 그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발생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회와 다른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한다(『자본론』 1권). 다뉴브 제후국의 보야르가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부역노동을 강요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잉여노동에 대한 무제한의 욕망이 생산 그 자체의 성격”인 자본주의의 영국 공장주들은 오히려 법률을 통해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들에게 고용되어 일해야 한다. 이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 이상의 일을 하고 이렇게 잉여노동 시간에 발생한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 이윤으로 돌아간다.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성두현,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참고하길 권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의 속상 상 자본가는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몫을 무한정 늘리려고 하고,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수준은 외부적 개입이 없는 한 계속 강화되는 경향을 띤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노동시간을 무한정 늘리려고 하고, 그 결과 노동시간은 “노동일의 도덕적인 한계뿐 아니라 순전히 육체적인 한계까지도 넘어버린다”(『자본론』 1권). 그로 인해 19세기 노동자들의 건강은 악화되고 평균수명이 심각하게 줄어드는 일이 발생했다. 노동시간의 단축이 노동자들의 중요한 투쟁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이윤 추구가 목적인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자에게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같은 수고를 들여도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노동의 양과 강도가 줄어들어야 하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로 나타난다. 따라서 맑스의 지적처럼 “노동일의 무제한 연장은 대공업의 독특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적 기계제 대공업이 확립되면 노동자는 기계의 살아있는 부속물로 전락한다. 이로써 “노동이 가벼워진다는 것조차 고통의 원천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으로부터 일체의 내용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자본론』 1권). 이러한 생산체제에서 자본가는 생산수단 사용을 절약하여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고 노동자는 값싸게 대체 가능한 비용에 불과하기 때문에 “작업 중 노동자의 생명에 필요한 것들(즉 공간·공기·광선)을 체계적으로 빼앗아” 가고, “생명에 위험하고 또한 건강에 해로운 생산과정의 부수물들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모든 수단—노동자의 편의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을 체계적으로 빼앗아” 간다. 자본주의에서 산업재해가 사라지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② 자본주의와 자연파괴

이처럼 무제한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본성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본성이 자연에 대한 파괴로까지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노동과정은 생산자가 생산수단(노동수단+노동대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에 맞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무제한적인 이윤을 위해 생산 역시 무제한적으로 늘려가고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해간다면, 그와 동시에 생산수단으로 들어가는 자연의 소재 역시 이 생산의 톱니바퀴 안으로 계속 투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여러 폐기물들을 감당하는 일도 자연이 맡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자연에 대한 파괴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주목할 점은, 맑스가 노동자 착취와 자연 파괴가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반복해서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맑스는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앞서 설명한 다뉴브 제후국의 보야르와 영국 공장주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맑스는 영국 공장주의 잉여노동에 대한 무제한적 갈망에 대해 “공장노동일의 제한은 영국의 경작지에 구아노 비료를 뿌리게 했던 것과 동일한 필요성을 따른 것”이라면서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이 한 경우에는 토지를 메마르게 했고 다른 경우에는 국민의 생명력을 뿌리째 파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대공장과 농업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한 뒤에야 비로소, 각종 생산과정들을 하나의 사회 전체로 결합하여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게 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에 대한 파괴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은 마치 두더지 게임과 같다. 즉 경우에 따라 어떤 생태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그것은 잠시일 뿐, 그것이 더 큰 형태로 다시 등장하거나 새로운 생태문제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일이 발생한다. 기후위기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생산에 이용하기 쉬운 에너지원으로 화석연료를 무한정 이용하고 여기서 이윤을 얻어왔다는 데에서 비롯된 위기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듯이 자연 파괴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 착취와 자연 파괴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현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주 김용균 동지 사망 1주기를 맞아 여러 추모행사가 개최되었다. 김용균 동지의 사망은 비단 위험의 외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생산에서 하나의 값싼 부속물로 전락하고 생산수단의 사용을 절약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치에도 인색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노동자의 생명에는 인색한 서부발전이 한국 탄소배출 기업 순위에서도 2017년 기준 5위에 해당했다. 포스코의 경우 2018년에만 5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는데, 포스코는 한국의 전체 탄소배출 중 11.3%를 차지하는 탄소배출 1위 기업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운동과 반자본주의를 결합시키고 노동자가 이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는 경우에 따라 일부 개선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악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지난 십수년 간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는 이를 잘 드러낸다. 더욱이 최근 경기후퇴가 가시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처지는 자본주의 착취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이 착취구조를 철폐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동자들이 나서서 반자본주의 투쟁을 벌일 때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투쟁 여하에 따라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에 맞선 투쟁과 긴밀히 결합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 역시 파괴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은 단지 착취와 계급지배를 없애는 것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맺어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 역시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인류를 생존의 위협으로 내모는 탄소배출을 중단하고 사회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 12월 채택된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협정은 지구의 평균 기온을 산업화 이전시기 보다 1.5∼2℃ 이내로 상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구속력 없는 국가들의 자발적 이행에 의존하는 점이나 여전히 시장기제과 같이 기존 질서 테두리 안에서 기후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 등 파리협정이 여러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정한 목표는 자본주의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목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기후과학자들이 이제 좁은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 틴들 기후변화 연구센터 케빈 앤더슨 교수는 2018년 10월 9일 데모크라시 나우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에너지 체제의 완전한 혁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경제운영 방식에 관한 매우 근본적 질문들을 제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근본적 변화가 기후위기를 낳은 원인이 자본주의라는 진실을 우회한 채 논의된다면 그 어떠한 변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인식하면서 이 싸움에 합류하는 노동자들이 없는 한 기후위기에 맞선 싸움은 승리할 수 없다. 이미 기후위기는 노동자들의 일터와 삶터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단 폭염의 위험에 노출된 건설노동자들 뿐 아니라 내연기관의 종말을 앞에 둔 자동차산업의 노동자, 화석연료로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 노동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배를 생산하고 운행하는 노동자, 철강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태워야 하는 노동자, 기후위기의 불평등한 영향에 대응해야 하는 사회복지, 돌봄, 보건 분야의 노동자 등 이 땅의 대다수 노동자들이 기후위기와 직접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제 노동자들이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에서 선두에 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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