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계급투쟁의 틀로 분석한 독일혁명

0
2139
[사진: http://www.wikiwand.com/en/German_revolutions_of_1848%E2%80%9349 | 독일혁명 당시 베를린의 모습을 그린 역사화]

『사회주의자』는 중요한 사회주의 고전을 소개하는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쉽게 설명하는 글들을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고전을 직접 읽어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는 꼭지입니다.

“사회주의 선전보급”은 『사회주의자』의 핵심 목표입니다. 편집위원회는 앞으로 사회주의 선전보급을 위해 다양한 기획과 연재를 진행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는 주로 맑스의 중요 저작을 소개했다. 이제는 엥겔스의 저작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저작으로 이번 기사에서는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을 다룬다. 이 저작은 한국에는 소나무 출판사에서 1988년 출판된 『독일 혁명사 2부작』에 『독일 농민전쟁』과 함께 묶여 실렸고,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2권에 실렸다.

이 저작은 그 동안 많이 읽힌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저작을 연재기사에서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맑스와 엥겔스가 현실 정치를 어떻게 분석했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현실 정치를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라는 틀을 가지고 분석했는데,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은 이를 가장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렇다면 다른 유명한 저작, 이를테면 맑스가 쓴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이 있는데도 굳이 이 저작을 택했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독일혁명이 바로 맑스와 엥겔스가 직접 참여한 혁명이기 때문이다.

1848년 독일혁명이 발발하다

지난 번 기사 「노동자 해방 사상 사회주의의 정수, 『공산당 선언』」에서 설명한 대로, 1847년 여름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됐다. 맑스와 엥겔스가 새로 결성한 조직의 강령 작성을 위임받아 저술한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말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우연히도 『공산당 선언』이 등장과 거의 동시에 전유럽 차원의 혁명이 발발했다.

1848년 2월 24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그 불길은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독일이 곧장 혁명에 동참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3월 13일 민중 봉기가 일어나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신성동맹 형성을 주도한 메테르니히를 몰아냈다.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3월 18일 베를린 민중은 무기를 들고 국왕 세력과 18시간 동안 전투를 벌여 결국 국왕을 굴복시켰다.

[사진: 사회주의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맑스와 엥겔스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혁명 소식을 들은 직후 중앙위원회를 브뤼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혁명의 기운이 거세지자 브뤼셀 정부는 혁명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맑스의 절친으로 훗날 『자본론』 1권을 헌정받는 빌헬름 볼프는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3월 3일 맑스 역시 벨기에 정부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공산주의자동맹은 다시 중앙위원회를 파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마침 프랑스는 공화국이 수립되어 혁명적 분위기가 드높았고, 3년 전 추방되었던 맑스의 귀환을 환영했다. 파리에 온 맑스는 군사적 수단을 이용하여 프랑스에서 독일로 혁명을 수출하려는 독일 망명객들의 성마른 시도에 반대하는 한편, 동지들과 추후 방향을 논의했다. 그 사이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월 31일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라는 강령을 작성하여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란 말로 시작하는 이 강령은 독일 전체가 “단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상정하던 입헌군주제나 스위스 식의 연방국가와는 다른 철저한 민주주의적 입장이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바라 본 독일혁명의 성격

당시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았다. 독일에서 자본주의 대산업의 발전은 막 시작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지도 겨우 성장하고 있었다.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나 뵈멘의 노동자 봉기와 같이 노동자들의 독자적 투쟁이 등장하고 있었지만, 노동자 역시 미발전 상태로 독자적 정치세력으로까지는 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인구의 상당수는 도시 소상인, 소상점주와 농민과 같은 소부르주아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의 수많은 소국들은 모두 봉건적, 절대주의적 군주제 국가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은 곧장 자신의 계급적 억압상태를 철폐할 수 없었고, 우선 다른 민중들과 함께 힘을 모아 봉건적, 절대주의적 왕정을 무너트리고 단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봉건제의 폐지는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지지만, 노동자를 포함한 전체 인민의 입장에서 진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 획득되는 정치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새로 수립된 자본주의 체제는, 미발전 상태였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투쟁을 전면화시키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이 투쟁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들은 4월 초 독일로 돌아온 후 이러한 노선에 입각하여 투쟁했다. 6월 1일 쾰른에서 맑스와 그 동지들이 주도하여 창간한 『신라인 신문』의 부제목이 “민주주의 기관지”라고 달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독일 각지에 수십 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고, 회원 수도 수백명에 달하는 작지 않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교육협회를 형성해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도시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동맹하여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했다. 특히 『신라인 신문』 편집실은 공산주의자동맹의 활동 중심이 됐다. 당시 편집실에는 자체 방어를 위한 8정의 소총과 250발의 실탄이 보관되어 있었다. 또한 식자공들은 이곳에서 모두 붉은 자코뱅 모자를 쓰고 인쇄작업을 했다. 그래서 반동세력도 이곳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으로 여겼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적극 나서야 하지만, 이 혁명이 여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1884년에 쓴 「맑스와 『신라인 신문』 1848-49」에서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소부르주아지가 열심히 퍼뜨리고 있던 환상, 즉 혁명은 3월의 날들로 종료되었으며 사람들은 이제 그 열매를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에 반대하였다. 우리에게 2월과 3월은, 그것이 종결이 아니라 반대로 장구한 혁명 운동의 출발점이 될 때에만 진정한 혁명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독일혁명의 연속적 성격을 표명한 것이었다. 즉 당장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더 철저히 전개시켜야 하고, 더 나아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투쟁을 더욱 촉진시켜 사회주의 혁명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독일혁명 이전에 나온 『공산당 선언』에서도 표명된 견해이기도 했다. 『공산당 선언』 4장에 따르면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단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 서곡”이었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아직은 미성숙 상태로 민주주의의 급진파에 머무르고 있지만, 자체 계급의식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했다.

혁명의 패배와 이에 대한 평가 작업

1848년 10월말, 11월초 반동세력이 힘을 되찾으면서, 독일혁명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1849년 4월 초부터 독일혁명의 결과로 소집된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와 반동 왕정세력이 독일 헌법 제정을 둘러싸고 충돌하면서, 혁명은 종장으로 치닫는다. 복권한 반동세력의 탄압으로 『신라인 신문』은 1849년 5월 19일자 신문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빨간 잉크로 인쇄된 마지막 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언제 어디서나 다음과 같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

당시 독일 이곳저곳에서 민중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반동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신라인 신문』 폐간 이후 맑스는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봉기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파리의 민주주의자들과 논의하기 위해 파리로 이동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패배를 겪은 직후였다. 맑스는 1849년 8월 23일 프랑스 경찰로부터 24시간 이내에 프랑스의 수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런던으로 떠났다. 그곳이 그가 죽을 때까지 지내게 될 곳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조만간 혁명이 다시 도래하리라 믿으면 말이다.

한편 엥겔스는 6월 무렵 독일혁명의 마지막 불씨를 살리기 위해 바덴, 팔츠 지역의 봉기 대열에 동참한다. 엥겔스는 같은 회원인 아우구스트 빌리히가 이끄는 800명 규모의 의용군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수천의 노동자들과 수많은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이 이 봉기에 참여해 용맹하게 반동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그 중 한 전투에서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심인물로 같은 의용군에 참여한 요제프 몰이 전사했다. 프로이센군에 밀린 봉기세력은 결국 스위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엥겔스는 11월이 되어서야 런던에 도착해 맑스와 합류했다.

런던에 도착한 맑스와 엥겔스는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온 독일 망명자들을 후원하고, 조직을 다시 추스르는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혁명이 조만간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1848년 혁명을 평가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맑스의 유명한 저작인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부르메르 18일』과 엥겔스의 『독일 농민전쟁』 등이 그 산물이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역시 맑스, 엥겔스가 1850년대 초반 진행했던 혁명에 대한 평가 작업 중 하나였다. 이 사실은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서두를 통해 알 수 있다. 서두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운동의 제1막의 끝과 제2막의 시작 사이에 우리에게 허여되는 아마도 매우 짧을 듯한 막간은 매우 필요한 한 가지 작업을 위한 시간을 준다. 즉 최근의 폭동과 그 패배 양자를 필연적이게 만든 원인들에 대한 연구를 위한 시간을 준다.

계급투쟁의 틀로 분석하는 독일혁명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은 시종일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들을 중심으로 1848년 독일혁명을 설명한다. 이 저작에서 엥겔스는 단지 계급을 병렬적으로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의 역사발전 정도와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각 계급의 위치를 파악했고, 이에 따라 각 계급과 그것을 대표하는 당파들이 필연적으로 드러내게 되는 행동 양태들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 패배의] 원인들은 몇몇 지도자들의 우연적 노력들, 재능들, 결점들, 과오들 혹은 배신행위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격동을 맞이한 국민들 각각의 일반적 사회 상태와 존재 조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1848년 2월과 3월의 갑작스러운 운동들은 개개인들의 작품이었던 것이 아니라, 잘 이해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모든 나라의 수많은 계급들이 아주 분명히 감지했던 국민적 욕구들과 필요들의 자연 발생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표현이었다.

엥겔스는 봉건적, 절대주의적 군주제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반면 현대적 대공업이 막 발전하고 있던 독일의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비롯된 독일 사회의 각 계급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인민의 다양한 계급들은 모든 정치적 조직체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독일 사회의 계급들을 ①봉건귀족, ②부르주아지(중간계급), ③소상인 및 소상점주 계급(소부르주아), ④노동자 계급, ⑤농민층(대농 및 중농, 소자유농, 봉건적 소작농, 농업노동자 등 그 내부에 또 다시 복잡한 층을 갖고 있다)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혁명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이 계급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추적한다.

독일혁명에서 봉건귀족과 이들을 대변하는 왕정, 그리고 왕정을 뒷받침하는 관료제와 군대는 반동세력을 구성한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계급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싸워 이들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동맹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반동적 봉건세력에 맞서 싸울 때는 하나로 일치될 수 있었지만, 혁명 세력 내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을 읽으며 주목할 대목은 다름 아닌 독일혁명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보여준 우유부단하고 배신적인 태도였다. 독일혁명은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이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혁명이 발발한 초기에는 다른 계급들과 함께 반동적 봉건 세력과 투쟁했지만,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이 반동 세력과 혁명세력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독일 자체는 자본주의가 미발전한 상태였지만,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부르주아 혁명을 겪었고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이것은 『공산당 선언』에서도 이미 언급한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봉건세력을 철저히 몰아내야 했지만, 혁명을 철저하게 진행할 경우 이미 자신과 더불어 성장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자신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게 될 상황에 놓이기 됐다.

이런 모순은 프랑스 2월혁명과의 관계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일혁명을 촉발시킨 외적 요인인 프랑스의 혁명은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일으킨 것이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공화국 수립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적 공화국”과 “노동권” 등 자신의 요구를 적극 관철시켰다. 게다가 6월 파리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렬한 무장투쟁까지 일어났다. 독일 노동자들은 아직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었지만, 프랑스를 통해 노동자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목도한 독일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전진을 두려하기 시작했다. 반동세력이 아직 완전히 격퇴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이제 혁명이 그만 멈추길 바랐다. 이런 바람이 실현되려면 이제 혁명적인 민중들을 버리고 반동세력과 한편이 되어야만 했다. 엥겔스는 베를린 봉기를 설명하면서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옛 정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때까지는 전부가 하나로 뭉쳐 있던 당파들 및 사회 계급들이 승리를 얻은 후에 그리고 심지어 투쟁 과정 중에도 둘로 갈라지는 것을, 그리고 이 승리의 이익을 혼자 차지한 바로 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즉각 어제까지의 동맹자들에 맞서서 더 진보적인 모든 계급들 및 당파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패배한 봉건적 및 관료적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보았다.

이런 부르주아지의 태도 때문에 “완전히 기가 죽어 있던 국왕은, 자신에게 ‘자유주의적’ 장관들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장관들에게도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이로서 혁명 초기 민중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반동세력은 힘을 다시 추스르고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독일 혁명에서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 그리고 그 이후 여러 진보적 운동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보인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배신 등은 그 집단에 속하는 개별 인물의 속성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객관적 계급 위치에 비롯된다는 것을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일혁명 분석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이 가장 급진적이고 철저한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투쟁했다는 사실이다. 엥겔스는 이 저작에서 1849년 중반 일어난 봉기에 대해 “봉기자들의 진정한 전투 부대, 즉 제일 먼저 무장하고 군대에 도전한 부대는 도시의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 혁명조차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이 독일혁명에서 확인됐다. 이 진실은 훗날 러시아 혁명에서도 또 다시 입증된다.

마치며

독일혁명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견지한 입장은, 비록 그때에 비해 사회경제적 발전 수준에 차이가 있지만, 지금에 와서도 민주주의 투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우선 민주주의의 쟁취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보다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생각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과 곧장 이어지지 않은 일반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서도 적극 임해왔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보인 불철저하고 동요하는 태도 역시 현재에 와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의 결과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 투쟁에서조차 불철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1848년 독일혁명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의존하는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엥겔스의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상기시킨다. 바로 노동자가 자신의 착취당하는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에 맞는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과제를 위해 실천하고 투쟁해야 한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