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탈성장,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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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획] 『사회주의자』에서는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기후위기의 실상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연재기사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연재는 △배출감축 목표, △‘순’배출제로, △‘정의로운 전환’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러한 연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자』의 다양한 글들에서 이미 꾸준히 주장해왔던 바로,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이고 사회주의 생태운동을 형성해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다. 이번 기사는 네 번째 주제로 ‘탈성장’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다.

① 각국의 2050년 배출제로 선언이 공문구에 그치는 이유

② ‘순’배출제로의 문제점: 탄소 포집 기술은 사기다

③ 정의로운 전환, 기후운동판 ‘노동존중’을 넘어설 수 없다

④ 탈성장,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담론

어느 시기든 새로운 사회적 이슈가 등장하면, 그 이슈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새로운 용어들이 출현하기 마련이다. 이런 새로운 용어들은 해당 이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넓혀주고 향후 해결방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용어들이 실상은 기존의 지배적 사회 관계나 계급 구조,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거나 혹여 그러한 것들을 겉으로는 비판하는 듯해도 근본적으로는 기존의 관계나 구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게 존재한다. 따라서 비단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해당 이슈의 근본적 해결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용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가 담고 있는 실제 의미를 면밀히 따져 그것의 수용 여부를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후운동에서 최근 많이 거론되는 ‘탈성장’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일이다. 애초 주류 환경운동은 오래 전부터 생태문제의 원인을 ‘경제성장’, ‘소비주의’, ‘생산주의’ 등에서 찾았기 때문에, 무제한적 경제성장 추구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후위기의 원인 규명과 해법 제시에서도 나타났다. ‘경제성장’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고, ‘녹색성장’이든 ‘지속가능한 발전’이든 모두 경제성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으며,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탈성장’으로 가서 경제 규모를 축소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기존 환경운동은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고, 심지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단체, 정당들에서도 ‘탈성장’ 용어를 아무런 내용 검토 없이 당연한 듯 쓰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변혁노동자당은 꾸준히 ‘탈성장’, ‘성장제일주의 반대’ 등을 주장해왔다. 지난 4월에 있던 청년 시국선언의 경우, 사회변혁노동자당 외에도 노동해방투쟁연대 청년운동팀이 참여했는데, 이 청년 시국선언에서는 “나는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을 선언한다”는 선언 문구를 쉽게 접할 할 수 있었다(‘정의로운 전환’의 한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연재]정의로운 전환, 기후운동판 ‘노동존중’을 넘어설 수 없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만약 ‘탈성장’ 용어가 기후위기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해법을 내포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변혁이라는 문제의식과도 잘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탈성장’ 용어가 무제한적 경제성장이 기후위기를 포함한 많은 생태문제들을 낳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지적이 말 그대로 현상에 머물면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제시하는 해법 역시 ‘성장 없는 자본주의’라는 실현될 수 없는 도덕적 호소에 그치게 된다. 따라서 탈성장은 기후위기의 주범이 자본주의이고,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싸워야한다는 문제의식을 애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맑스는 왜 프루동주의를 비판했는가?

‘탈성장’ 용어의 한계를 검토하는 데 앞서 맑스의 프루동주의 비판을 살펴보고자 한다. 맑스의 프루동주의 비판은 주류 환경운동의 주장이 지닌 한계를 이해하고, 그것과 대비되는 사회주의 관점의 생태운동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프루동주의가 현대 환경운동의 주장과 행동에서 상당수 답습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점을 반영하는 듯 실제로 최근 환경운동 내에서 프루동의 평전을 발간하기 위한 펀딩이 이루어지고 있다).

1809년에 태어나 1865년에 사망한 피에르 조세프 프루동은 초기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무정부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40년에 발간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유에 대한 비판가인 그는 1846년 『경제적 모순들의 체제 혹은 빈곤의 철학』이라는 방대한 책을 출판했다. 맑스는 이 책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는 책을 내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의 빈곤』(1847년)이었다. 이 책이 나온 후에도 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프루동과 프루동의 추종자들을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맑스가 프루동을 비판한 것은 프루동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매우 잘못된 인식을 유포하였기 때문이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는 않고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경제적 범주나 개념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원칙이나 이념, 정의, 진리로 제시했다. 이를테면 맑스는 베를린의 슈바이처에게 보내는 1865년 1월 24일자 편지에서 “프루동이 경제적 범주를 물질적 생산의 특정한 단계에 상응하는 역사적 생산관계의 이론적 표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그 범주들을 이전부터 존재해온 영원한 이념으로 변형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내세운 원칙, 정의, 진리는 옳은 것인데, 그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1846년 12월 28일자 편지에서 맑스는 프루동의 접근이 “독점이란 선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경제적 범주이며, 따라서 신으로부터의 유출이기 때문”이고 또 “경쟁 또한 선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 역시 경제적 범주이기 때문”인데, “선하지 않은 것은 독점과 경쟁의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프루동이 영원한 정의로, 이상으로 생각한 것은 소생산자들의 상품생산사회였다.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생산자들이 남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은 채 상품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상품이 제 가치대로 등가교환되는 것이 프루동에게는 가장 좋은 사회였던 것이다. 이것은 프루동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아직 산업프롤레타리아트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소규모 수공업 생산자들 사이에서 프루동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프루동주의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소생산자들이 대자본과의 경쟁에 몰락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프루동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소생산자들의 상품생산사회를 이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 사회에서 상품생산이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화폐가 출현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게 되면 노동력의 상품화와 더불어 자본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데, 프루동주의는 이러한 상품생산사회의 경제적 범주들의 내적 관계를 도외시한 채 상품생산은 좋은 것인데 화폐나 자본이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및 임금노동제의 철폐와 더불어 상품생산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프루동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되는 폐해는 없는 자본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이를테면 상품생산은 유지하되 화폐를 없애고 그 대신 노동화폐로 그것을 대체하자고 주장하거나 은행, 신용제도는 그대로 둔 채 이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식인 것이다.

‘탈성장’의 문제 역시 이러한 프루동주의의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비단 어느 사회에서나 나름의 경제적인 양적 성장이 존재해왔으나, 지금과 같이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하고 그러한 성장이 인간과 지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정도에 이른 것은 자본주의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윤 추구가 생산의 목적이고, 더 나아가 기존에 벌어들인 이윤을 재투자하여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본의 축적, 확대재생산은 “생산을 위한 생산”을 체제의 고유한 특징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맑스는 『자본론』 1권에서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Moses)며 예언자(prophets)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 중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자본론』, 1권, 24장)라고 말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성장을 비판하는 것은 분명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제한적 성장, 즉 “생산을 위한 생산”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을 체제의 필연적 산물로 만드는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건드리지 않고 ‘성장’만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탈성장’론은 현 사회의 성장 추구를 ‘중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판하지만, 자본주의와 성장을 분리시키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 성장 없는 사회를 꿈꾼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성장 추구를 자본주의 자체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그칠 뿐 자본주의에서 근본적인 상품생산, 임금노동,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등은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탈성장론은 성장은 비판하되 그것을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자본주의의 기본 범주와 법칙은 그대로 둠으로써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에는 실현 불가능한 ‘성장 없는 자본주의’ 주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세르주 라투슈: 자본주의 극복 없는 탈성장을 주장하는 대표적 사례

‘탈성장’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남부유럽에서 주로 나왔다. ‘탈성장’의 프랑스어인 ‘데크로상스(décroissance)’는 1972년에 프랑스 생태주의자 앙드레 고르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후 ‘탈성장’ 용어는 점차 확산되어 2004년에는 프랑스에서 『라 데크로상스』라는 잡지가 나왔고, 2008년에는 ‘생태학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위한 경제적 탈성장’ 국제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데크로상스’의 영어 번역어인 ‘degrowth’가 처음 사용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탈성장’이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모두 추적하기는 어렵다. 그 중에서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지금의 탈성장론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많은 이들에게 대표적인 탈성장론자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나 그의 주장은 위에서 말한 탈성장론의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2006년 1월에 실린 「다운시프트된 지구」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서 “자족적 경제사회 건설”을 꿈꾸는 그는 “경제 축소가 자본주의와 양립가능한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면서, 생태적으로 양립가능한 자본주의는 이론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탈성장’을 자본주의 극복과 연동시키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취지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탈성장을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권력이 시장이 아닌 외부기구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를 위한 대안으로 “사민주의 시대의 케인즈-포드주의적 규제 하에 존재했던” 기제들이 현실성 있고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계급투쟁에서 자본이 승리했고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임금노동, 통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은 사회를 혼란 속으로 떨어트릴 것”이기 때문에, 이미 경제에 통합된 사회제도들을 저버리지 않고 다른 원리에 따라 재배치하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식은 20세기 초반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외부비용의 내부화를 주장했던 루이스 세실 피구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고, 피구의 주장을 따르는 “개량주의 조치가 혁명을 만들 것”이라는 게 라투슈의 주장이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 혁명을 배제한 온건한 방식으로 탈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기업을 해체해 소규모 기업들로 만들고, 인구 3만 정도의 소규모 공동체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는 소생산자들의 상품생산사회를 꿈꾼 프루동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입장의 ‘탈성장’론 역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낸 요르고스 칼리스

대표적인 탈성장론자인 세르주 라투슈의 입장을 소개함으로써, 탈성장론의 기본 구상이 성장 자체만을 문제 삼으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용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탈성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탈성장론자로 세르주 라투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입장에서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르주 라투슈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탈성장론자로 알려진 요르고스 칼리스의 주장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는 그리스 태생의 생태경제학자로 현재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대학교수로 있다.

탈성장론에 대해 적잖은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성장의 문제점은 인정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에서도 성장이 존재할 수 있고 그때의 성장은 자본주의에서의 성장과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각 사회마다 다른, 성장의 구체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또한 이미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룬 선진국과 아직 가난하고 민중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남반부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논쟁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제한적 성장 자체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경우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같은 주장은 타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칼리스는 “성장 없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반박에 나섰다. 사회주의와 탈성장을 연관시킨 그의 주장은, 작고한 제임스 오코너가 1989년에 창간한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잡지 2017년호에 「성장 없는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리고 같은 제목의 글이 티모시 파리크와 공저로 올해 2월 10일 『용감한 신유럽』이라는 온라인 매체에 게재되었다.

그는 2017년 논문 앞부분에서 탈성장론 진영에서 탈성장은 “자본주의 극복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 2014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4차 ‘생태학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위한 경제적 탈성장’ 국제회의를 든다. 이 회의 때 이뤄진 여론조사의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여론조사를 진행해 분석한 데니스 에버스버그와 매티아스 슈멜저의 논문 「탈성장 스펙트럼」을 보면, 2014년 9월 2일부터 6일까지 열린 회의 참석자 3천5백여 명 중 응답자는 814명에 불과하고, 그 중 685명은 독일 거주자이며, 또 응답자의 3분의 2는 학위 소유자, 나머지 3분의 1 중 대다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여론조사의 대상 자체가 특정 계층에 상당히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질문지의 질문 역시 “현실가능한 대안사회의 개념이 없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보는가”와 같이 응답자들이 탈성장을 반자본주의와 연결시켜 보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것이었다.

논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비착취적이며 평등한 세계는 자본주의와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성장은 지속가능할 수 없다, 어떠한 경제성장도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또 성장문제가 어떠한 체제가 되었든 그 체제보다 위에 존재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성장은 결국 물질과 에너지 투입량의 증가로 나타나고, 이런 증가를 지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주의에서도 자본주의와 똑같은 무제한적인 양적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사회의 경제 규모가 얼마나 어떻게 성장할지, 산업의 어떤 부분이 축소되고 어떤 부분이 증가할지는 그 사회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민주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칼리스의 주장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성장 자체가 그 사회를 판가름하는 최고의 기준이 되어 사회주의에서도 어떠한 성장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경제적 현상으로서의 ‘성장’을 넘어 ‘성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운송수단으로서 차량이 줄어들고 자전거가 점점 늘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와 달리 보건, 돌봄, 사회보장 등이 확대될 것이지만 이 역시 ‘성장’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성장’이란 말 대신 ‘증가(increase)’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본주의와 완전히 단절하는 모종의 사회주의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탈성장이 사실상 자본주의 틀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한 명백한 반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책의 예로 “최저임금, 기본소득, 노동시간 단축”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는 있지만 상품, 화폐 관계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상품생산을 의문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해외 인터뷰] 캐나다 사회주의자 존 클라크, 기본소득을 낱낱이 비판하다」를 참고하기 바람).

탈성장이 아닌 반자본주의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투쟁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탈성장의 가장 급진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스의 경우에도 사실상 자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장 문제만을 절대시하며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구의 수용력을 넘어서는 무제한적 경제성장은 지금과 같은 세계화된 경제구조에서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문제의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각 경제체제가 취하는 성장의 역사적 성격을 도외시하고 이러한 무제한적 성장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점을 망각한다면, 성장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상품, 화폐, 자본, 임금노동 등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법칙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단순히 자본주의의 폐해를 도덕적으로 규탄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탈성장론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나오고 있는 탈성장론 역시 위에서 검토한 라투슈나 칼리스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 녹색전환연구소의 이유진은 탈성장을 주장하는 논자 중 한 명으로 『한겨레』에 지난 1월 4일 「성장 외치며 탄소중립 불가능…경제체제를 바꿀 때다」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목이 무색하게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어떠한 내용도 발견할 수 없다.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2020년 6월 30일에 「탈성장: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을 넘어」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의 저자인 권승문은 국내외 탈성장 논의를 검토하고, “에너지전환 시나리오, 나아가 배출제로 시나리오를 위해서는 탈성장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탈성장이 자본주의 극복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다는 점은 4월 26일자로 올라온 그의 「‘미얀마 군부 연류 의혹’ 포스코가 ESG 최상위? 한국도 ‘그린워싱’ 우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탄소중립과 탈탄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 상황에서 ESG가 주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목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자신의 입장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있음을 밝혔다.
  • 두 사람에 앞서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인 홍태희는 2016년 「먼저 지옥문을 닫고, 성장 너머 행복의 나라로 가자!」(황해문화, 2016년 겨울호)에서 경제성장으로 지옥문이 열렸다면서 이 지옥문을 닫기 위해서 탈성장경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시장 경제와 함께 탈성장 경제의 장착”을 주장하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토대를 공격하기보다는 그 외부에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대안적 공간을 형성해 확장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지난 4월 18일 『참세상』에 게재된 채효정의 「탈성장」이라는 글은 그 동안 채효정이 연재하는 ‘워커스 사전’의 한 꼭지로 나온 것이다. 그는 노동의 관점에서의 탈성장이나 99%의 탈성장을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탈성장론자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여러 원칙은 이미 세르주 라투슈 같은 탈성장론자들이 빈번히 이야기한 것으로, 이것이 어떻게 탈자본주의와 연결되는지는 불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탈성장론이 탈성장론의 가장 왼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칼리스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다.

논자에 따라서는 탈성장과 반자본주의가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탈성장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성장을 비판하는 것으로만 보고 무작정 수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탈성장은 단순한 용어가 아닌 자체적 이론 체계를 그 배후에 지니고 있는 용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탈성장’론은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특수한 현상을 절대시하여 그것의 핵심 모순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고,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탈성장이 노동자의 구호로 적절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주의세력에서조차 ‘탈성장’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사회주의세력 내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자신의 입장을 세우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사회주의세력이 자기 관점을 분명히 세우고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의 구호로 탈성장이 아닌 반자본주의를 분명히 내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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