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본론』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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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지금 우리는 과잉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끝날 줄 모르는 경기침체와 구조조정, 전쟁과 테러,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의 자연재해와 생태위기, 질병과 혐오의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특히 한국의 노동자민중은 ‘노동개악’, ‘사회보장성 악화’ 등 각종의 희생을 강요받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다 못해 곤두박질 칠 위기에 놓여 있다.

이쯤 됐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류가 만든 엄청난 생산력이 왜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보다 큰 착취와 폭력, 무한경쟁과 대량살상의 수단으로 귀결되는지, 어째서 한쪽에 과잉자본이 축적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 빈곤이 양산되는지 말이다.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먹고 살 길을 찾지 못해 고통 받는 반면에 다른 누군가는 노동강도에 못 이겨 지게차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고 있다. 비정규직이 문제라 지적하니 무기 계약직을 대안으로 내놓는 현실을 두고 이를 모순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이 모순이겠는가? 이러한 물음과 답답함에 대해 150년 전 자본주의의 모순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현실을 보다 계급적으로 또한 과학적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착취에 있다!

물론 아직도 마르크스, 또는 『자본론』 타령이냐며 고리타분한 이야기라 혀부터 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포기하는 걸 세기 어려워 ‘N포 세대’라 불리는 한국의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가 보인다.”라거나 “정규직이 이기심을 버려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말보다 고리타분한 것은 없다. 오히려 한 해 수 조원을 주식배당금으로 갈취하는 자들을 지켜 보는 노동자민중에게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다름 아닌 ‘착취’에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와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팔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임금노동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그들이 지출한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져가는데,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의 착취이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잉여노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으로 마치 자본가가 투하한 총 자본의 대가처럼 전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일하는 노동자가 없는 이상 기계는 홀로 돌아가지 않는다. 노동력과 결합하지 않는 생산수단은 그저 죽은 노동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물신성으로 인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사회라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은폐되고 자본가는 물론이거니와 노동자들에게조차 현상이 왜곡되는 것이다.

과거 노예제에서는 노예가, 그리고 봉건제에서는 농노가 착취의 대상이었다면 임금노동관계에서의 임금노동자는 자본의 착취를 받고 있다. 자본가는 오직 노동자를 착취하여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에만 고용을 창출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노동자민중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착취당하지 않고선 안 되는 사회이며, 반대로 자본가에게는 착취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인 셈이다. 이를 우리는 다른 말로 계급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또한 그것의 사회적 관계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자본’이 아닌 그것의 세포형태인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실업을 해결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실업’에 대한 『자본론』의 분석을 살펴보자. 실업이란 ‘사회가 필요한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존재하는 상태’ 혹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 이상의 노동력이 산재한 상태’, 즉 자본의 필요보다 과잉된 노동인구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과잉인구는 생산력에 비한 과잉인구를 의미했기에 곧 죽음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큼 물질적 생산력이 증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과잉된 상태로, 쉽게 말해 남아돌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바로 ‘자본에 대한’ 과잉, 더 자세히는 ‘자본의 필요에 대한’ 과잉뿐이다.

자본은 끊임없는 잉여가치의 착취와 축적을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경쟁의 결과로 생산력이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되며, 기존의 기계에 대한 새로운 기계의 대체가 가능해진다. 그로 인해 ‘기계 한 대와 열 명의 노동자’가 해내던 일을 ‘한 대의 기계와 한 명의 노동자’가 해낼 수 있게 된다면 자본가에게 있어 이전의 아홉 명의 노동자를 계속 고용해야할 이유는 사라진다. 이처럼 자본에게 필요하지 않게 된, 고용에서 탈락한 아홉 명의 노동자가 ‘상대적 과잉인구’, ‘실업자’로 전락한다.

즉 임금노동자라는 이유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반대편에 독점된 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과잉인구’로 분류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인구법칙을 결정하는 것이 그 사회의 생산력이었다면 지금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구법칙을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적이며 배타적인 자본이 한 사회의 생산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한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한편 실업, 상대적 과잉인구가 해소되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바로 임금의 적절한(?) 조정 때문이다. 모두가 알듯이 상품의 가격은 시장에서의 교환에 따라 때로는 상승하기도 하고 하락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에 있어서도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은 노동력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 피할 수 없는 변수이다. 이 경우 자본가에게 있어 상대적 과잉인구는 현재 고용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고용할 산업예비군의 임금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또한 상대적 인구는 노동력 상품이 소비되는 방식, 즉 노동강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당장 자신과 다를 것 없는 예비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대체될 수 있다는, 잘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보다 더 낮은 임금, 더 높은 노동강도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면서 자본이 목표하는 바에 더 손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자를 노동자의 적으로 삼는 것만큼 자본에게 이득 되는 일은 없다.

산업예비군[즉 상대적 과잉인구]은 침체기와 평균 정도의 호황기에는 현역노동자군에 압력을 가하고, 과잉생산과 열광적인 확장기에는 현역군의 요구[예: 임금인상]를 억제한다. 따라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용하는 배경이며, 이 법칙의 작용범위를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욕과 지배욕에 절대로 유리한 한계 안에 국한시킨다.

노동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으로

『자본론』은 우리에게 낮은 임금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계약직이라 할지라도, 자본에게 일자리를 구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실업의 압박이 단지 실업자들만이 아니라 이미 취업해있는 노동자들을 압박하는지 알려준다. 동시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언론과 교육이 한사코 노동자들의 불만이 파업이나, 투쟁이라는 수단으로 표출되지 못하게 하는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불경시 하는지 알려준다.

마치 과거 고전경제학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직면한 이후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자본의 착취를 가리는 데 급급했던 것처럼 본질과 현상이 전도되는 물신성과 자본주의 천년왕국의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민중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 환경의 악화, 노동 강도의 강화, 노동 시간의 연장과 같은 자본의 요구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민중과 여성, 소수자 등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무차별적인 자연파괴, 부의 양극화와 각자도생조차 보장하기 힘든 사회적 파탄과 혼란은 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론』은 이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의 질곡을 헤쳐 나갈 방향, 노동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으로 향하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책이나 열심히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옛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교훈이나 찾자 라거나 주변에 아는 척을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자본론』을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자본론』이 필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이다.

더 나아가 자본과 시장에 대한 적나라한 방임과 규제철폐, 혹은 정부와 공공기관의 적절한 규제와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와 문제의 본질은 제쳐 둔 채 자본주의의 잘못된 결과만을 수정하여 민중의 처지를 개선하겠노라는 조야한 사탕발림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올라가는 사람만이 영광스러운 학문의 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가파른 학습의 오솔길은 우리의 삶과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과정이며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한 실천의 과정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길을 가자. 마르크스가 인용하기도 했던 위대한 플로렌스 사람이 이야기 하였듯이 “남이야 뭐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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