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준, 자본론 번역자의 궤변이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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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한겨레신문 캡쳐 사진

강신준의 이상한 칼럼

경제학자이자 자본론 번역자인 강신준 교수는 최근 한겨레신문과 부산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며, 경제현안들에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주장과 비평을 내놓고 있다. 강신준은 2012~13년, 경향신문에 자본론 해설을 연재하면서 여러 학자에게 자본론을 자의적으로 재단한다고 비판받은 바 있다. 이번에도 강신준의 칼럼에 비판이 덧붙여졌는데, 역시나 자본주의에 대한 이상한 해석이 문제였다. 강신준은 여러 칼럼(「알파고 일자리 절벽 괴담의 해답」(한겨레), 「구조조정 위기의 숨겨진 원인」(부산일보), 「가계부채 증가와 민생경제의 진실」(부산일보))에서 반복하여 자본주의의 본질,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봉건제에서 이 둘이 분리되면서 교환이 양자를 연결하는 구조의 경제제도이다. 이렇게 구조가 변화한 까닭은 경제의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봉건제에서는 자급이 경제적 목표이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된 것이다. 돈을 버는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구매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대개 우리는 수익이라고 부른다. 이 수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목표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구매가 시장에서 곧 수요이며 판매가 공급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구매와 판매의 차익을 얻는다는 말은 곧 공급이 수요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 과잉이고 이 과잉상태를 극대화하는 것을 경제적 목표로 하는 경제구조인 것이다. 당연히 소비가 부족해서 물건이 팔리지 않는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경제가 좋지 않다는 말은 언제나 소비 부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만성적인 수요 부족 때문에 결국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경제구조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였다. 사회안전망과 복지는 그런 균형을 맞추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강신준, 「알피고 일자리 절벽 괴담의 해답」)

강신준의 학문적 태만

수익 최대화가 목표가 되면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구매와 판매 사이 차익의 존재로 인해 소비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게 자본주의의 구조이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이라는 강신준의 해석은 일찍이 경향신문에서의 자본론 강의, 특히 자본론 2권에 대한 해설에서 드러났던 문제였다. 지난 경향신문 지면에서 강신준은 자본이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여 애초의 크기에 잉여가치가 더해지는 자본의 순환과정에 대해 설명한 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위의 예에서 본다면 ‘화폐(100원)―상품(생산수단+노동력: 100원)’의 100원이 수요이고 ‘상품(140원)―화폐(140원)’의 140원이 공급이며 이 둘 간의 차액인 40원이 자본가가 원래 목표로 했던 잉여가치입니다. 세 가지 형태의 자본순환은 모두 생산과 결합되어 있고 이들 각자의 순환은 이처럼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하는 교환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들 각각의 순환은 사회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총순환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각 개별 순환들 사이의 연결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개별 순환 그 자체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합쳐져 있는 사회적 총순환이 어떻게 순조롭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마르크스는 이처럼 자본유통의 첫 번째 성격인 순환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교환에서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강신준, 『오늘 ‘자본’을 읽다』 중, Ⅲ. 제2권 : (1)자본의 순환」)

이러한 생각의 오류에 대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성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자본 A가 100원으로 다른 상품(생산수단)을 구매할 때 다른 자본 B는 이 생산수단을 자본 A에게 판매하는데, 그때 자본 B는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도 함께 실현한다. 또 자본 A가 상품 140원을 판매할 때는, 또 다른 자본 C가 자본 순환의 첫 국면(구매)에 들어가면서 자본 A의 상품 140원을 구매하고, 그럼으로써 A의 잉여가치 40원도 실현된다. 이렇게 개별자본의 순환은 다른 개별자본의 순환과의 총체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맑스는 재생산표식에서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을 총괄하고, 여기서 사회적 총생산물이 가치적 측면에서도, 또 소재적 측면에서도 어떻게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사실 잉여가치 실현문제와 관련된 강 교수의 이런 이해방식은 일찍이 이 문제를 제기한 혁명적 맑스주의자 룩셈부르크와 동일하다. 다만 로자의 문제제기와 이론적 오류가 이미 논쟁사를 통해 극복된 지금, 10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이런 방식으로 재생산 문제를 설명하는 강 교수의 학문적 태만은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성구,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미디어 오늘))

강신준은 자본론 2권이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고, 반면에 김성구는 수요과 공급의 균형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며 서로 해석이 정반대인데, 김성구가 전자에 대해 100년 묵은 “학문적 태만”으로 지적한 것은 매우 합당하다. 강신준이 범한 오류는 마르크스가 경멸했던 악명 높은 「인구론」의 저자 맬서스에게서도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맬서스는 자본가는 축적하는 계급이어서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지주계급이 생산과 소비의 균형, 나아가 사회발전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즉 자본가의 이윤이 ‘생산적으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과소평가한 탓에 지주의 낭비벽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잉여가치(이윤)의 존재 자체가 공급과잉을 증명한다는 말 역시 궤변인데, 이 궤변을 굳이 이해해보자면 상품생산을 위해 비용으로 지출된 화폐량보다 생산된 상품의 가격이 크기 때문에 팔리지 못하는 상품이 있을 수밖에 없다거나, 이윤은 수요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다는 말 같다. 불황과 어두운 경기전망에 한 푼이라도 남으면 저마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때에야 이윤이 곧 수요위축일 수 있겠지만, 원래 그렇다는 식의 생각은 남의 돈까지 긁어모아 사업을 키우고 경쟁력 강화에 애쓰면서 상품재고와 주문장 소진에 이바지하는 자본의 부지런한 일상과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상품가격보다 생산과정에서 지출된 화폐량이 작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생각도 거래량이 화폐량으로만 규정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1만원권(화폐량)이 10번 거래(화폐유통속도)되면 거래량이 10만원이 되는 것처럼, 돈은 돌고 돌아 모든 상품을 소화해낼 정도의 수요로 커질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위기가 불가피한 현상임은 분명하지만 공급과잉(수요부족)이 정상상태라는 건 이론의 과잉이다.

강신준이 말하지 않는 것

강신준이 자본주의에 대해 잘못 말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일은 쉽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칼럼에서는 무언가 애매해진다.

노동자의 경제학에서는 임금을 무엇보다 ‘사회적 총수요’로 간주한다. 이 점은 거시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는 생산이 소비에 비해 과잉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런 과잉이 누적되면서 경기변동과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임금 인상은 수요 증가를 가져와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강신준, 「임금 인상은 경제를 어렵게 만드나?」(부산일보))

어떤 해법이 필요할까? 먼저 법인세를 올리고 특혜를 줄여 대기업의 곳간으로 들어가는 돈을 줄이고, 그런 다음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비정규 노동을 억제하여 일반 국민들의 주머니를 불려 줘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부족한 소비를 메꾸어 경제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올바른 길이자 유일한 방법이다.(강신준, 「가계부채 증가와 민생경제의 진실」(부산일보))

강신준의 이론체계에서 임금인상과 분배개선은 자본주의 모순(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법이자 정책방향이다. 임금인상과 분배개선이 진보적 대안, 정책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자 노동운동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때문에 분배 문제를 경제위기의 원인이자 해법으로 제시하는 강신준이 그럴 듯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전제에서 도출된 대안이라는 건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 강신준은 임금인상을 통한 수요진작을 만능열쇠처럼 말하지만, 이러한 류의 수요 측면 접근이야말로 미국, 유럽에서의 70년대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발흥의 배경 중 하나였다. 강신준의 이행경로에 가장 근접한 모델이 자본주의 황금기 주역인 포디즘-케인즈주의 체제인데, 이 시기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성 향상에 비례해 상승했고 재정적자와 복지국가도 수요 증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도 위기와 혼돈, 붕괴, 불가피한 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포디즘-케인즈주의의 파산은 자본주의에는 수요 부양도 힘쓰지 못하는 차원, 심층이 존재한다는 역사적 증거이다. 그리고 그 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이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들이 소비하는 재화를 생산할 만큼만 일한다면 이윤도 자본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일할 때에만 이윤이 발생하며, 이윤의 크기는 바로 잉여노동시간과 일치한다. 때문에 이윤이 목적인 자본은 잉여노동을 추출하는 경제적 강제이자 사회적 권력인 것이다. 또한 자본은 과거의 잉여노동이 축적된 이른바 ‘죽은 노동’이며, ‘산 노동’을 착취해서만 축적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런데 산 노동을 착취하는 정도에 비해 비대하게 축적돼있는 죽은 노동(대규모의 기계장치, 설비, 건물 등)의 상태는 곧 이윤율이 저하된 것인데, 이윤율이 떨어질수록 자본축적은 둔화되고 경제는 정체되며 쉽게 위기에 빠진다. 자본 자신이 자본의 장애물인 셈이다. 이윤율 저하의 상황에서는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더라도, 모든 상품이 팔리더라도 축적이 느려지고 경제는 하강한다. 실제로 많은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1970년대 이후 선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성장둔화와 잦은 경제위기)에 대해 이윤율 저하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추악한 본질은 현상 아래에 숨어 있고, 현상은 본질을 부정하기조차 한다. 즉 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이윤과 이자는 자본의 생산성에 대한 대가로, 상품가격은 그 상품이 주는 유용함의 반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은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대로만 기술해왔을 뿐이며, 반면에 마르크스는 본질과 현상 사이에 놓인 모순적 관계를 “물신성”이라 부르며, 이의 비판을 위해 자본론을 쓰고 남겼다. 물신성 비판 없이 자본주의 본질은 온전히 인식될 수 없으며, 이 점이 자본론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강신준식 진보의 문제

강신준이 임금인상과 분배개선을 내세우면서 잘못된 이론에 근거하는 문제도 있지만, 또 심각한 문제는 이게 그 자체로 해결책이며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 인양 호도한다는 점이다. (“부족한 소비를 메꾸어 경제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올바른 길이자 유일한 방법”,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만성적인 수요 부족 때문에 결국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경제구조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예상”) 노동조합은 열심히 투쟁하고 협상하여 임금을 올리고(덧붙여 노동시간 단축과 공동결정까지), 진보정당은 집권하여 복지 확대와 소비의 사회화에 힘쓴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해갈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런 생각은 사회개량의 성과는 축적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정도의 자생적인 계급의식이면 충분하다는 믿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 특히 신자유주의 반동은 이런 믿음이 부서지기 쉬운 허약한 사실들 위에 서있었는지를 일깨워준다. 지난 시기의 투쟁이 획득한 권리가 의문시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같은 노동시장의 분할은 노동자들 내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며, 임금인상 요구조차 이기적인 행태로 매도당한다.

자본이 노동착취의 기구이고 경제적 강제이자 사회적 권력이라는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투쟁의 장임을 의미한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은 방어와 전진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거점이지,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진정한 해결은 자본을 폐지하는 투쟁, 새로운 원리로 조직화된 노동이 자본을 대신해가는 과정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과정은 자생적 의식에 의존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일상은 그 본질을 왜곡하고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상상력을 억누른다. 때문에 자본주의를 극복해가자면 물신성 비판, 자본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자본주의 너머에 대한 비전 등이 결합된 사회주의 의식은 반드시 필요한 출발점이다.

사회주의 전략은 임금인상과 분배개선 즉, 노동자의 삶의 개선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확보와 신장을 위해 자본주의와 투쟁해야 함을 내세우며, 투쟁과정에서는 사회주의 의식의 고양을 위해 행동한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강신준 교수의 주장에 심각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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