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제와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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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편집자 설명] 『사회주의자』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대안의 내용을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기사는 그 두 번째 기사다. 뒤이어 게재되는 기사 2편―‘생태문제와 사회주의’, ‘여성억압 문제와 사회주의’―은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라는 시각에서 생태문제, 여성억압 문제를 바라보는 글이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을 잡기 위한 문제의식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

생태문제와 사회주의

여성억압 문제와 사회주의

이번 호의 연재기사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으로써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그 기사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애초 사회주의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해방’이다. 이러한 인간해방의 관점은 모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함을 의미하고 이를 통해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해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해방의 관점이 비단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억압과 착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해방의 관점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1. 인간해방의 관점은 자연에 대해서까지 이어진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그 산물이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산물을 가지고 생존을 해결하고 사회를 유지·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인간해방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바로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특성으로 여겨왔다.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노동을 하기 때문이고,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역시 바로 노동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관계 맺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노동은 바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구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을 가지고 자신의 필요에 맞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론』 1권에서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의 노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 개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동떨어진 채 혼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살아간다면 노동과정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된 개인의 생산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의 노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진행한다. 또한 노동과정에서 다양한 협업과 분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역사 단계마다 고유한 노동형태와 생산관계가 등장하게 된다.

노동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와 상호작용한다.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곧장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에 영향을 미쳐, 만약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면 그 변화는 자연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그 단적인 예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이윤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가들의 태도는 자연에 대해서까지 연장된다. 즉 자연을 이윤 획득에 사용될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맑스가 초창기에 쓴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저작은 노동의 소외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데, 그에 따르면 노동의 소외는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 노동과정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 유적 존재인 인간의 자기 소외로 나타나고, 그것의 직접적 결과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로 귀결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이런 노동의 소외를 인간들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로부터의,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모든 자기 소외는,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들에 대해 그 자신과 자연을 위치시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초창기부터 사회주의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변혁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변혁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같은 저작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의 총체성을 견지해야 한다.

인간해방의 관점이 자연에 대해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그 다음으로 다뤄야 할 주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어떠한 이론적 틀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가다. 첫 번째 연재기사인 성두현의 「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을 잡기 위한 문제의식」은 “생태, 여성, 소수자 문제 등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더욱더 예리한 무기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문제들을 사회주의 대안에 수용할 때에는 반드시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주의자는 생태문제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유기적으로 설명해내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령 생태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대응에 적극 나서고 있는 주류 환경운동,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을 당연시하고 사회주의 운동은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야 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과학적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생태문제와 사회주의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시킬 경우, 각각의 문제들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여 오히려 서로 분리된 실천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경우에 따라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청산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은 실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생태문제와 사회주의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시킨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생태사회주의” 조류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의 내용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사회주의의 중심적 사상을 포기하면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노동자의 주체성, 계급투쟁의 절대 우위성, 그리고 생산양식의 변형으로서의 혁명개념에 집착하지 않는 특징을 보여준다.”(문순홍, 『생태학의 담론』)

생태사회주의는 1970년대에 등장하여, 이른바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유명한 프랑스 맑스주의자 미쉘 뢰비의 경우에도 맑스주의가 생산지상주의에 빠져있어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는 「비판적 맑스주의에서 자기 해방의 중심성」이란 글에서 “맑스가 어떤 통합된 생태적 전망을 견지했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한계만 일단 제거되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산력의 무제한적 발전이라는 그의 낙관주의적이고 ‘프로메테우스적’인 구상은 오늘날 옹호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생태사회주의의 한계를 비판한 제임스 오코너의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한 ‘일차모순’과 생태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차모순’으로 기계적으로 나누는 이원론에 갇혔다. 그는 애초 생태문제와 사회주의를 통합하고 이 둘을 아우르는 하나의 운동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취지가 무색하게 계급문제에 기반을 둔 운동을 경시하고 생태문제를 대변하는 신사회운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주의 총체성 속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3. 물질대사 개념을 통해 생태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1절에서 우리는 노동이 인간과 자연 사이를 이어주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인간의 특성임을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맑스가 제시한 ‘물질대사(metabolism)’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 자연과 상호작용을 한다. 외부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흡수하고 이를 자신의 생명 유지에 활용하는 한편, 이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을 다시 자연에 돌려준다. 이러한 생명체와 외부 자연 사이의 물질 교환 과정을 ‘물질대사’라고 부른다.

맑스는 인간 역시 자연과 물질대사 작용을 하는데, 인간 고유의 물질대사 방식이 바로 노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본론』 7장에서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과 맺는 구체적 물질대사 관계인 노동형태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생산이 발전해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를테면 동아시아에서 벼는 수천 년 전부터 재배되어 왔으나 벼를 재배하는 방식은 철제 농기구의 등장, 축우의 사용, 이앙법의 도입, 관개시설의 개량, 농기계의 이용과 관개정리 등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변화해왔다. 매 역사 시기마다 노동형태는 서로 달랐고, 그에 따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방식 역시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물질대사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생태문제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기존의 자연 조건이 파괴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 역시 위협받게 됨을 의미한다. 가령 기후위기는 단순히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한 것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의 기온은 지금보다 매우 낮았던 시기도 있었고 매우 높았던 시기도 있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기후위기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홀로세 시대(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시대)의 안정적이었던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이다. 즉 지구 기후의 변화가 그동안 번성해온 인류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후위기가 큰 위기라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영역에도 커다란 충격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을 통해 물질대사의 균열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들과 동떨어진 자연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낳은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대사의 균열 회복은 인간 사회의 변혁과 곧장 연결되는 것이다.

4. 생태문제를 해결하려면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발생한 물질대사의 균열은 특정 사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미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 과거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소아시아 등지에서 경작지를 얻기 위해 숲을 파괴했던 사례나 알프스 산맥 남쪽 경사지에서 소나무 숲을 남벌한 사례 등을 들며 그러한 균열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과거의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다양한 환경 재난이 발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생태문제는 어떠한 사회와도 그 수준을 달리한다. 무수한 생태문제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 규모도 과거 어떤 사회체제와도 비견할 수 없고, 전 지구를 아우를 정도다. 기후위기와 같이 이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태문제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가 무수한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의 본질적 속성이다. 기본적으로 노동과정은 생산자가 생산수단(노동수단+노동대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에 맞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윤 추구가 생산의 목적인 자본주의에서는 무제한적인 이윤을 위해 생산을 무제한적으로 늘려간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수단으로 들어가는 자연의 소재 역시 이 생산의 톱니바퀴 안으로 계속 투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여러 폐기물들을 감당하는 일도 자연이 맡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에 대한 파괴가 당연한 일이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속성은 아무리 제어하려고 한다고 해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하지 않고서는 현재 우리가 직면서 무수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5. 사회주의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발생한 물질대사의 균열을 회복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갈 것이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과거의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생태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는 이윤 추구가 생산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의 생태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생태문제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더욱이 ‘현실’ 사회주의는 이미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바뀐 지 오래였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기사에서 자세히 다를 것이다).

생태사회주의와 상당수 환경운동 세력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생태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해도 생태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사회주의가 생태문제를 수용하며 그 내용을 풍부화시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체제도 다 문제가 있다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취하면서 결국에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생태문제와 관련해서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가 주는 교훈은 역설적으로 인간해방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해서 생산수단이 국유화되고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어도 노동자 민주주의가 심화발전하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해방적인 관계로 변혁되지 못한다면 그 체제는 변질, 퇴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질, 퇴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곧장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맑스는 사회주의는 어떤 완성된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현존 상태를 철폐하는 현실 운동”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우리는 생태문제에 있어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가 만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균열을 회복하고자 하는 구체적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태문제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의 생태문제는 자본이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듯 자연을 수탈, 파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맞선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대사의 균열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회주의에서 자유란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물질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것을 토대로 인간이 자신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 즉 인간해방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인 인간들의 전면적 발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가 상호 조화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더 높이 발전하는 것은 이런 인간들의 전면적 발전의 필수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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