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을 핑계로 자본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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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마이뉴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지도 어언 20년, 2018년 현재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형태의 노동이 거의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2년 전인 2016년에 이미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32.5%에 달하였다. ‘공식 통계’가 고려하지 않는 특수고용직이나 불법파견 등 편법적인 고용형태까지 감안하면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대적인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과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노동자들 역시 늘어났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도 공공운수노조, 금속노조, 서비스연맹 등을 필두로 비정규직 조합원이 점점 늘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운동에는, 비정규직이 어려운 현실에 처한 이유가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좀 더 많이 가진 노동자들이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것을 내어놓는 ‘모범’을 보여야 자본과 국가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의 배경에는 사실 자본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으며, ‘사회적 연대’라는 것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사회적 연대’라는 말장난

민주노총 김명환 지도부는 이른바 ‘사회연대전략’을 핵심 기조로 내걸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25일,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해당 입장문에서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위한 논의가 아니라 사회적 대화기구 재편 논의임을 분명히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기구’와 ‘사회적 대화기구’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소위 ‘사회적 대화’나 ‘사회적 타협’이라는 것이 1998년 노사정위원회 이래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의 광풍을 선사하는 수단이 되어왔던 지난 역사를 토대로 냉정히 평가하자면, 이는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는 비단 현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4개 선본 중 현 지도부를 포함한 3개 선본에서 사회적 연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역시 비정규직이 처한 현실을 논거로 정규직의 양보를 요구하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다. 그는 작년 11월 21일 한국사회경제학회와 더불어민주당이 공동 주최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조건들” 토론회에서 “기업별 테두리 안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편가르지 말고 노동자끼리 나누고 양보하는 임금연대를 전면화해야 한다”거나 “노동조합에서 최저임금 1만원을 위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자”라면서 자본에게 지워야 할 책임을 노동계급 내부로 떠넘기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조합이 민간영역에서 소득주도성장을 부르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기존 정권들의 실패한 노동정책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문재인정권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자본가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는 행보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인 오건호는 최근,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를 거론하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용보험료 등을 더 냄으로써 실업급여를 강화하는 방식의 사회적 연대를 민주노총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가 민주노총의 ‘사회연대노총’으로의 방향전환을 촉구하면서 겉으로 내세우는 구실 역시 ‘비정규직을 위해서’이다.

노동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사회적 연대’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위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이상적인 방향이라 선전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처럼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비용부담을 좀 더 하고, 그것을 통해 비정규직과 같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노동자들의, 나아가서는 노동자들과 비(非)노동자들 모두의 연대와 화합을 이끌어내자는 논리이다.

마치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일컫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개념을 노동계에 적용한 것 같은 위화감을 주기도 하는 사회연대전략 개념은,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바로 ‘정규직보다 더 많이 가진 자본가들이 내놓아야 할 몫에 대해서는 왜 아무 얘기도 없는가?’라는 의문이다. 왜 그들은 자본가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책임만을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사회연대전략 자체에 자본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상화하는 스웨덴은, 이미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길을 걸어왔다. 보수연합정부, 그리고 뒤이어 정권을 잡은 사민당 모두 그러했다. 이들은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을 큰 폭으로 낮추고 간접세 비중을 확대했으며, 실업급여율을 줄이고 각종 비용을 인상시켰다. 이는 오건호 스스로 내놓은 자료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기초진료비 개인부담 인상, 치과진료 요금 인상, 최저생계비와 학생 교육지원금 인하, 극빈층 기초생활비 지원금 삭감 등을 추진했다. 병가수당과 부모보험의 소득대체율도 인하하고 이혼 가정의 자녀 부양비에 대한 감독도 강화했다. 또한 1차 진료소 통폐합, 의료인력 구조조정 등 사회서비스 인프라를 슬림화했다. 모두 복지지출을 절감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보편적 제도였던 기초연금이 저소득계층 노인에게만 지급되는 최소보장연금으로 축소되었다. 소득비례연금의 급여도 전체 경제 상황과 고령화 진행에 연동돼 자동조정 되도록 하는 재정안정화 장치를 마련했다. 필요 재정도 기존에 고용주가 모두 부담하던 것을 노사가 각각 9.25%씩 분담해 18.5%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출처 : 오건호, 「1990년대 이후 스웨덴 재정·복지개혁 내용과 평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2013년 5월)

요약하면 ‘복지축소, 노동자에 대한 비용전가, 국민연금에서 노동자 부담비율 증가’. 이것이 북유럽식 ‘사회적 연대’의 실체였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그렇게 원해 마지않는 ‘북유럽식 복지모델’을 현재 가장 원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스웨덴 민중들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한때 잘나가는 복지국가로 여겨졌던 스웨덴이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른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복지는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서만 유지하거나 확대할 수 있는데, 현재 자본주의 경제는 저성장이 ‘뉴 노멀’이라고 불리는 상태이다. 실물성장은 둔화되는데 금융만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상태이고, 그로 인한 공황이 더 이상 특이한 일이 아니게 된 시대이다. 그래서 복지를 줄이고 각종 서비스를 민영화하는 식으로, 개인에게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방식으로 돌려버리는 게 현 시대 자본과 자본가정권의 이해관계가 되어 있다. 스웨덴 사민당의 우경화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이후부터 유럽 경제가 저성장 상태가 되자 그렇게 방향을 선회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노동자를 위한다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나팔수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하는 이들이 좀 더 치밀하게 연구하지 못해서, 혹은 미처 몰라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사실 이들은 사회연대전략이 자본의 복지부담을 경감시켜주고 노동계급 전체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다 알면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스웨덴 복지후퇴의 현실을 보여주는 보고서는 다름아닌 지금 사회적 연대를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는 오건호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이들이 스웨덴 모델 같은 사회연대 모델을 좋은 것이라고 선전하는 이유는, 이들이 겉으로는 ‘노동계 인사’라는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에서 자신의 밥그릇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오건호의 경우도, 스웨덴 복지후퇴의 현실을 보여주는 (위에도 인용한) 바로 그 보고서에서, 해당 정책을 재정개혁, 재정안정성 확충 같은 자본가들의 언어를 써가며 정당화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의 입장을 전파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연대전략이 좋다는 말이 여러 인사들의 입과 언론매체를 통해 나오는 것은, 그것이 현재 한국 자본의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게 아니라 유지하려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겉으로는 언제나 비정규직을 위한다느니,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다느니 하는 말로 자신들의 친(親)자본적인 행태를 포장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늘 경계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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