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노동자 국제조직, 제1인터내셔널의 임시 규약과 발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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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는 중요한 사회주의 고전을 소개하는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쉽게 설명하는 글들을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고전을 직접 읽어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는 꼭지입니다.

“사회주의 선전보급”은 『사회주의자』의 핵심 목표입니다. 편집위원회는 앞으로 사회주의 선전보급을 위해 다양한 기획과 연재를 진행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관심 부탁드립니다.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는 맑스와 엥겔스의 중요한 저작들을 소개해왔다. 이번 순서에서는 제1인터내셔널의 임시규약과 발기문을 다룬다. 맑스와 엥겔스의 생애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제1인터내셔널과, 맑스가 작성한 제1인터내셔널의 중요 문서인 임시 규약과 발기문을 소개하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다. (임시 규약과 발기문은 매우 짧은 분량이라 별도 단행본으로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두 글은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박종철 출판사) 3권에 실려 있다.)

1860년대 노동운동의 고양,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

1848년 유럽혁명이 노동자 민중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1848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봉기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격렬한 무장투쟁이었다. 다음해 독일에서도 혁명이 패배했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벌어진 혁명운동도 사그라들었다. 경제는 호황으로 돌아섰다. 이것은 노동운동이 전진하는 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1860년 초가 되자 다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투쟁의 경험과 지식의 공유, 노동자계급의 처지 개선과 사회개혁을 위한 공동의 투쟁, 파업파괴를 목적으로 한 외국 노동자의 유입 반대 등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기회는 1862년 영국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영국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을 대외 만방에 알리려는 목적의 만국박람회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위한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박람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노동자들을 억압하였으나, 60년대에 이르러 체제 유지가 어려워지자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이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노동자들의 영국 방문을 지원하였다. 1862년 8월 5일, 영국 노동자들은 박람회에 방문한 70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주었고, 이 자리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국제적 단결을 수립할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들 사이에 계속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윽고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1863년 1월, 민족해방을 원하는 폴란드 봉기가 일어났다.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해방투쟁이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조직 결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운동의 태동기 때부터 이어져온 민주주의적 전통, 국제주의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863년 봉기는 유럽 노동자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1863년 7월 22일, 프랑스의 대표, 톨랭, 페라숑, 리무장 등은 폴란드 인을 기리는 집회에 참여하였다.

1864년 9월, 프랑스 노동자들이 폴란드 문제로 조직된 또 다른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이미 노동자들의 국제적 관심사를 나눌 특별 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1864년 9월 28일, 영국의 노동자들은 프랑스의 대표자들을 환영하기 위한 국제적 집회를 개최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 집회에 모인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을 결성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조직의 규약을 논의할 임시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제1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노동자계급 최초의 국제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가 창립되는 순간이었다.

제1인터내셔널과 맑스

제1인터내셔널의 전기간 동안 맑스가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맑스는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 시기부터 임시 규약 및 발기문 작성, 총평의회의 참여 등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고 제1인터내셔널을 사상적으로 이끌어갔다.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맑스의 사상이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발전을 이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즉 공산당선언에서 천명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이 직접 당면한 목적들과 이익들의 달성을 위해 투쟁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한다”는 원칙을 맑스 스스로가 실천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의 발기문과 임시 규약(1866년 9월에 열린 제네바 대회에서 정식 규약으로 채택된다)이 작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맑스가 엥겔스에게 1864년 11월 4일에 보낸 편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독일의 혁명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맑스는 런던의 다양한 운동세력이 개최하는 집회에 자주 초대되곤 했지만, 이런 활동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이를 거절해왔다. 그러나 1868년 9월의 집회만은 초대를 받고 그 중요성을 감지하여 참석을 하였고 한다. 또한 나중에 총평의회가 되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는 독일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28일 집회 이후, 임시위원회는 규약 초안 작성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맑스는 10월 중순까지도 이 위원회의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못하였다. 소위원회에서 가리발디의 부관인 볼프 소령은 마찌니주의적 색채의 초안을 제시했다. 이윽고 과거 오언주의자였던 벤스턴의 초안이 제출되었는데, 내용이 장황하고 혼란스러웠다. 세 번째로 프랑스인 루베즈가 초안을 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전문을 달고 세부 조항은 볼프의 초안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맑스와 함께 독일 대표로 임시위원회에 선출된 에카리우스로부터 이런 상황을 전해 받고서야, 맑스는 임시위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맑스가 10월 18일 회의에서 반대의견을 전달하자, 10월 20일 맑스의 집에서 규약 논의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규약의 수정이 맑스에게 위임되었다.

맑스는 앞서 나온 잡다한 초안들의 원리 선언 내용을 별도의 발기문에 담는 식으로 해서 규약과 이 원리 선언을 분리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 결과 규약 전문에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온전히 담았고, 조항들 역시 40개에서 10개로 간소화하였다. 또한 발기문 역시 다양한 조류의 내용들을 수용하면서도 맑스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킬 수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이 담긴 임시규약과 발기문

이 시기는 노동운동이 침체를 벗고 다시 일어서는 시기일 뿐 아니라 노동운동 내에서 다른 사상들에 대해 맑스주의가 승리를 이루는 시기가 되었다.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주의, 라살레주의, 프루동주의, 마찌니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이 경합하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의 과학적 사상을 올바르게 세워내는 대중적 노동자 국제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맑스는 “내용은 대담하게, 방법은 유연하게”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보여주는 게 임시 규약과 발기문이다. 이 문서들에는 노동자 계급 내 다양한 조류의 내용에 대해 유연하게 접근하면서도 노동자 해방의 방도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 원칙이 분명하게 담겨 있다.

이를테면 임시 규약의 맨 처음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에 의하여 획득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노동자의 자기해방, 노동자민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노동자 외부의 영웅도, 뛰어난 지도자도, 착한 자선가도 노동자를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기 손으로 해방을 이루어내야 한다. 자본가계급에게 노동자계급을 진상하는 민주대연합, 야권연대가 이제껏 판쳐 온 한국의 정치 실정에서, 제1인터내셔널 임시 규약의 첫 문장은 노동자계급을 깨우는 일성이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 및 의무와 모든 계급 지배의 폐지를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핵심인 인간해방을 표현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새로운 지배와 억압의 체제를 낳는다면 그건 해방일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보편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괴롭히는 억압과 착취를 근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발기문에 담긴 이 구호는 노동자국제주의를 표현한다. 이 구호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구호이자, 익히 알고 있듯이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구호는 역사적으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노동운동을 표현하는 문장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 이전의 노동운동은 프랑스혁명이 남긴 유산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유산이 바로 박애이다. 당시 노동운동은 “모든 인류는 형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인류라는 한 가족인데 자본가들이 지나치게 자기 이익만 쫓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박애라는 구호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계급투쟁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인식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맑스는 의인동맹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모든 인류는 형제”라는 구호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대체하였다.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자각을 분명히 내세우는 이 구호가 제1인터내셔널에서도 채택된 것이다.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것은 따라서 이제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의무입니다. …… 성공의 한 요소를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數)입니다. 그러나 수는 결합이 그들을 단결시키고 지식이 그들을 지도할 때에만 무게를 지닙니다.

이 문장 역시 발기문에 담긴 것이다.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마치 자본가의 주장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운동 내에는 정치투쟁에 반대하는 조류들이 존재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맑스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권력 획득을 노동자 해방의 중요한 목표로 보았다.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마치며

제1인터내셔널은 최초의 노동자 국제조직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과 단결을 위해 모범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870년대 중반 무정부주의 세력과의 내부투쟁, 유럽 지배계급의 탄압 등의 이유로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정신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제1인터내셔널의 정신은 바로 맑스가 확립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신이었다. 비록 제1인터내셔널은 해산됐지만 이 정신에 따라 유럽 노동운동은 급속히 성장했고 1880년대에 이르러서 맑스주의가 노동운동의 사상적 주도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과거 노동자계급의 투쟁 역사는 미래를 꿈꾸는 현재의 노동자계급에게는 귀중한 보고이다. 제1인터내셔널의 역사 역시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보고이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노동자의 역사이다. 제1인터내셔널의 임시 규약과 발기문은 노동자가 꼭 알아야 할 제1인터내셔널의 역사와 정신이 담겨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교훈을 찾아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노동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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