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강령 초안 비판」: 짧은 비판에 담긴 사회주의의 핵심

0
2059
[사진: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는 중요한 사회주의 고전을 소개하는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쉽게 설명하는 글들을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고전을 직접 읽어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는 꼭지입니다.

“사회주의 선전보급”은 『사회주의자』의 핵심 목표입니다. 편집위원회는 앞으로 사회주의 선전보급을 위해 다양한 기획과 연재를 진행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관심 부탁드립니다.

1875년 5월 등장한 「고타강령 초안 비판」은 몇 장 되지 않은 매우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맑스의 핵심 저술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사회주의의 핵심을 간결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미국 청년세대 사이에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가 친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 표현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이 바로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 이 말이 실리고 나서부터였다.

그렇다면 맑스는 어떤 배경에서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쓰게 된 것일까? 이 글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우선 맑스 개인에게로 다가가보자. 맑스는 1843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래 정치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나 1848년 독일 혁명이 실패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다음부터는 부르주아 사회의 경제적 토대인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건설되자 그는 다시 정치활동의 일선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정치활동은 1871년 파리코뮌 전후로 최고조에 이른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될 무렵부터 사망할 때까지 맑스는 다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연구활동과 성장하는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노동운동에 대한 자문으로 역할을 제한했다. 그러나 이런 제한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회주의 활동 경험을 축적하고 엄청난 이론으로 무장한 노혁명가가 유럽 사회주의노동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그러한 와중에 1875년 독일에서 두 노동자 정치세력의 통합이 진행되었고, 이에 대해 맑스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성장하는 독일 노동운동과 고타 통합당대회

19세기 중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보다 자본주의 발전이 더디고 봉건제의 유산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후진국 독일에서도 자본주의는 성장하고 있었고, 노동자계급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1844년 발생한 슐레지엔 직조공 봉기는 독일에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맑스는 슐레지엔 직조공 봉기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즉각 간파했으며 이 봉기를 적극 지지했다. 이것은 맑스가 『독불연보』 발행을 함께하기로 한 브루노 바우어와 결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바우어는 슐레지엔 봉기를 폄훼하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슐레지엔 직조공 봉기는 향후 독일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 케테 콜비츠의 판화로 형상화됐다.

[사진설명: 페르디난트 라살레(1825. 4. 11. – 1864. 8. 31.)

1848년 독일 혁명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비록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맑스와 엥겔스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자동맹’, 각종 노동자교육협회 등을 통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 패배하고 반동기가 도래하면서 독일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60년대 초가 되자 노동자 조직의 흐름이 다시 활성화됐다.

1862년 노동자들의 독자적 조직인 ‘전독일노동자협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이를 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진 중앙위원회라는 노동자 조직은 라살레를 초청하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시대의 특성과 노동자계급의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은 이후 『노동자강령』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인쇄되어 널리 읽히게 된다. 라살레가 독일 노동운동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페르디난트 라살레는 초기 독일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1825년 슐레지엔 지역의 비단상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법철학 전문가가 됐고 특히 헤겔철학에 심취했다. 1848년에는 ‘공산주의자동맹’ 회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라살레는 1862년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결성된 독일 최초의 독자적 노동자 정치조직인 ‘전독일노동자협회’의 의장을 맡게 된다. 이후 이 조직은 ‘라살레파’로 불리게 된다. 라살레는 석달 후 한 여인과의 연애문제로 상대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따라서 그가 ‘전독일노동자협회’ 의장을 맡은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영향력은 매우 컸다.

[사진설명: 빌헬름 리프크네히트(1826 – 1900)]

한편 초기 독일 노동운동에 큰 기여를 한 또 다른 지도자가 존재한다. 그는 바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였다. 리프크네히트는 1826년에 태어나 1848년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동맹’ 회원으로 적극 활동했고 혁명이 패배한 후에는 맑스, 엥겔스 등과 더불어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망명기간 동안 맑스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도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1862년 프로이센이 사면령을 내리자 곧장 독일로 넘어가 ‘전독일노동자협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라살레파와의 차이는 분명했고 분열은 예정되어 있었다. 리프크네히트는 한동안 기간지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진에 참여하는 등 라살레파와 협력했지만 라살레파가 프로이센 국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이론적, 정치적 차이가 더욱 분명해지자 ‘전독일노동자협회’에서 나와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시기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했던 지도자가 아우구스트 베벨이다. 베벨은 앞선 두 인물과 달리 노동자계급 출신이었다. 1840년에 독일 쾰른 부근에서 태어난 베벨은 라이프치히에서 목수, 소목장으로 도제생활을 했다. 그 후 직인 신분으로 독일 전역을 돌며 일을 했는데, 이런 경험은 다른 노동자의 삶을 폭넓게 접하게 하고 정치적 식견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실 오랜 기간 여러 지역을 떠돌며 일을 하는 직인은 초기 노동운동에서 선진적 역할을 담당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심인물인 요제프 몰, 하인리히 바우어 등이 모두 직인 출신이었다. 베벨은 1860년 라이프치히도 되돌아와 소뿔단추를 만드는 선반공으로 일했다. 그리고 점차 노동운동에 관여하면서 사회주의자로 성장해갔다.

[사진설명: 아우구스트 베벨(1840 – 1913)]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당시 ‘전독일노동자협회’와 경합하던 ‘독일노동자협회동맹’에 참여하여 이를 새로운 정치조직으로 변화시킨다. ‘전독일노동자협회’와 마찬가지로 1863년 결성된 ‘독일노동자협회동맹’은 애초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자유주의적 성향의 회원들이 조직을 나간 반면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점차 급진화하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 조직을 기반으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1867년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일부 동참하는 ‘작센 인민당’을 결성하여 의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드디어 1869년 9월 독일중부에 위치한 아이제나하에서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이끈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이후 ‘아이제나하파’로 불렸다. 맑스와 엥겔스는 아이제나하파의 등장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의 오랜 동지들이 주도해서 결성한 당이었기 때문에 이 당에 사상적, 이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에는 라살레파 ‘전독일노동자협회’의 조직력과 규모가 더 컸으나 점차 노동운동의 주도력은 아이제나하파에게 넘어온다. 1874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라살레파는 아이제나하파보다 1만표 더 득표하지만 의원은 아이제나하파가 6명으로 라살레파보다 3명 더 가져갔다. 라살레파의 회원수는 1870년 25,000명 정도 됐으나 1874년에는 5,000명으로 급감했다. 이는 라살레파의 이론적, 실천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로이센 국가와의 협조노선을 밟았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있는데도 노동조합의 의의를 부정했다. 또한 라살레 이후 의장을 지낸 슈바이처는 반민주적, 독재적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커져갔다.

결국 라살레파가 먼저 양파의 통합을 제안하여 조직통합이 시도됐다. 양파 통합 추진의 또 다른 배경으로 독일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지배계급의 노동자 탄압이 거세진 상황이 존재했다. 통일 독일제국의 재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과정에서 반전 태도를 일관되게 지켰을 뿐 아니라 성장일로에 있던 사회주의노동운동 세력을 가장 큰 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1875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고타라는 도시에서 통합당대회가 개최되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 결성됐다. 이 당은 그 후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탄압법(1878년)을 성공적으로 돌파하고 1890년 할레 당대회를 개최하여 당명을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바꿨다. 현재는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한 축이 된 독일사회민주당에 이런 혁명적, 투쟁적 과거가 존재했던 것이다.

라살레주의, 무엇이 문제였나?

앞서 언급했듯이, 라살레가 실제 독일 노동운동에 참여한 기간은 짧았지만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초창기 독일 사회주의노동운동은 이른바 ‘라살레주의’와의 사상투쟁 속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정리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확립하는 과정을 겪었다.

라살레주의의 주요 특징은 우선 국가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있었다. 라살레는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절대이념의 구현으로 보았다. 이를테면 그는 『노동자강령』에서 국가의 목적이 “자유를 향한 인류의 교화 및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국가주의적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화되고 보수화됐다. 1848년 혁명시기 민주적 공화주의자였던 라살레는 점차 왕정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며 프로이센 국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으로 변해갔다. 이후 라살레는 독일통일에 대해서도 프로이센 왕정이 주도하는 방식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는 맑스와 그의 동지들이 오랫동안 ‘단일한 불가분의 독일 공화국’을 요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맑스는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라살레주의가 “현존 사회를 현존 국가의 기초로 취급하는 대신에 도리어 국가를 그 고유의 “정신적이고 윤리적이며 자유로운 기초”를 보유하고 있는 하나의 자립적인 본질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라는 계급국가일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라살레는 자본가계급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또 다른 지배계급인 봉건적 토지소유계급에 대해서는 타협적 태도를 보여, 자본가와 맞선다는 명목으로 토지소유계급과의 협력을 추구했다.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비판한 ‘봉건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이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도 이런 내용이 거론된다. 맑스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토지소유자(토지 소유의 독점은 더구나 자본 독점의 토대이다)와 자본가의 독점이다.” 그런데 라살레는 “자본가계급만을 공격하고 토지소유자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맑스는 지적했다.

라살레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임금철칙설이었다. 이것은 영국에서 주로 나온 ‘임금기금설’과 대동소이한 주장으로,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사회적 몫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라살레는 이것을 ‘철칙’이라 부르며 불변의 법칙인 것처럼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임금인상 투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라살레파는 노동조합의 존재도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이 실제 결정되는 원리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이었고, 성장하고 있는 노동조합 운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맑스는 노동자의 임금이 자본가와의 투쟁 속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설명했고 노동조합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의 임금, 노동조건을 지켜내기 위해 필수적인 조직으로 보았다(자세한 내용은 「『임금·가격·이윤』, 임금인상투쟁의 의의와 한계를 과학적으로 밝히다」를 읽어볼 것).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살펴보면, 맑스는 “라살레가 죽은 이래로 우리 당 내에는, 임금이란 외견상 그런 것, 즉 노동의 가치나 가격이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나 가격의 가장된 형태일 뿐이라는 과학적 통찰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고타강령 초안’은 “라살레의 교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라살레는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적 활동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가 중시한 정치적 활동이라는 것은 노동자를 주체로 보고, 노동자의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위해 정치권력의 획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설명한 국가에 대한 우호적 태도, 토지소유계급과 대결하지 않으려 하는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라살레는 국가가 보조하는 생산협동조합의 조직이 노동자들을 위한 대안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국가를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켜 주는 시혜의 주체로 보고, 노동자를 그 시혜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노동자를 위해 행동할 국가로 라살레가 상정한 존재는 바로 반동적인 프로이센 국가였다. 이를 위해 라살레는 실제로 여러 차례 비스마르크와 회견을 갖고 편지를 주고 받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해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맑스는 라살레주의의 이런 주장이 사회주의를 사회의 혁명적 전환 과정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협동조합에 주는 국가 보조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이것이 “새 철도처럼 새 사회도 국채로 건설할 수 있다”는 발상이라고 냉소적 태도를 보냈다. 또한 협동조합 자체도 “정부로부터도 부르주아로부터도 비호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노동자들의 창조물인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고 보았다.

맑스, 고타강령 초안을 비판하다

라살레주의는 독일 노동운동이 미발전된 상태에서는 일정기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해감에 따라 라살레주의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라살레파는 점차 이울어지는 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제나하파는 통합이라는 대의에 매몰되어 라살레파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 특히 통합당대회에서 결정될 당 강령의 초안은 라살레주의에 대해 너무 많은 이론적 양보를 한 것이었다. 맑스는 정치활동의 일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이제나하파에 큰 이론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를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양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맑스는 강령 초안을 비판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은 비판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주로 라살레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비판 형식 속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비판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글이 등장하게 된 구체적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타강령 초안 비판」이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 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다보니 본문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하게 다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전으로 읽는 사회주의” 연재의 취지에 맞춰보면, 필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기 보다 독자들이 본문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다행인 점은 「고타강령 초안 비판」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4권에 실린 「고타강령 초안 비판」은 총 24쪽에 불과하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읽을 분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드리면, 이 선집 4권에 실린 “엥겔스가 후베르투스부르크의 아우구스트 베벨에게”와 “엥겔스가 쯔비까우의 아우구스트 베벨에게”라는 두 편의 편지도 읽어보길 바란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제 이 글은 맑스가 공산주의의 더 높은 단계를 설명하는 「고타강령 초안 비판」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 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