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바라본 조국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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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필자가 느낀 조국사태에 대한 주변 청년들의 반응은 ‘차가운 분노’였다. 특히, 조국의 딸 입시특혜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서 청년들은 동요하며 자조와 풍자, 분노 섞인 반응을 보였다. 한 대학원생 지인은 조국의 딸이 제1저자라는 의학논문에 대해 ‘조국 딸은 한 달 만에 쓰는 걸 나는 3년이나 걸려 쓴다, 그것도 한 학기에 500만 원씩 내면서’라며 웃픈 농담을 하기도 했다. SNS에서도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청년들은 믿었던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배신감, ‘그럼 그렇지’라는 식의 피로감 섞인 분노, 문재인 정권도 청년 편이 아니라는 식의 냉담한 비판 등의 반응들을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청년들이 쏘아대는 비난의 화살이 조국 개인을 향하기보다는 문재인 정권 자체를 향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취직, 학점, 생활고 등에 시달리며 더 큰 모순들에 짓눌리고 있었던 것이, 조국사태를 계기로 터져버린 셈이다. 또, 청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조국의 딸과 같아질 수 없다’는 식의 비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은 패배감과 회의감을 기반으로 하는 소극적 태도라기보단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어렴풋이 인지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자기인식적 태도처럼 보였다.

조국사태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시선

조국사태가 진행되면서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광장이 나뉘어 수구와 자유주의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자, 청년들은 두 광장 모두에서 등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조국사태가 수구와 자유주의의 진영 다툼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이 청년들 사이에서 공유됐다. 청년들은 수구 세력에는 등을 진 채로, 문재인 정권을 비판했고 조국사태에 서로 다른 태도로 접근했다.

청년들 중 일부는 ‘소수자성’을 청년들에게 투영하고, 조국사태에서 청년의 소외된 삶을 무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청년들은 여성, 퀴어, 장애인 등의 소수자 정체성 사이에 ‘청년’을 넣고, 청년문제를 사회적 소수자 문제와 등치시켰다. 이들은 평소 트위터 등에 ‘여성, 청년, 소수자는 어디에서나 배제된다’, ‘청년이면서 OO, OO(여기에는 보통 다양한 정체성이 병렬적으로 들어간다. 예를 들면 여성, 퀴어 등)인 본인은 언제나 소외되어 왔다’, ‘청년들은 정치적으로도, 노동에서도 소외됐다’는 등 구체적인 자기서사를 담은 글을 풀어쓰는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조국사태를 거치며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청년들이 늘어난 것인지, 보다 공식적인 기사를 통해 위와 같은 논조가 다뤄지기도 했다. 녹색당의 고은영, 신지예가 제안한 ‘나는 나만의 깃발을 들겠다’ SNS 글쓰기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경향신문 특집기사로도 실린 이 프로젝트의 핵심 기조는 서초동과 광화문에 포함될 수 없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사는 서초동에서도 광화문에서도 청년들은 배제되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며 청년의 소외감을 드러냈다.

한편, 조국사태의 본질이 ‘불평등’에 있음에 착안하고, 청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평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9월 11일자 인터뷰 기사 「“전혀 다른 세상”…젊은이들은 왜 ‘조국사태’에 분노했나」에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정유라 입시 부정 등) 과거에는 절차적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은 데 젊은 세대의 불만이 컸다면, (조 장관 딸 논란에서는) 절차적 공정성, 즉 합법적으로 설계된 제도도 얼마든지 불평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청년들은 조국사태에서 똑같이 ‘노오력’해도 누구는 쉽게 성취를 이룰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다는 불평등한 출발선에 주목했다. 같은 기사에서 다른 한 취업준비생은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해명에서 86세대 인식의 한계를 찾을 수 있다.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세계가 공고히 대물림된다는 걸 스스로 증언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에 ‘정치적으로 순수한 청년들이 나서서 ‘불공정’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청년들도 있었다. 9월 말, 서울대와 부산대, 고려대에서 열린 촛불집회는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기 위해 참가자들의 학생증·졸업증명서를 철저히 검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이러한 흐름이 이어져 결성된 ‘전국대학생연합촛불집회’(이하 전대연)가 그 예이다. 전대연은 9월 30일 발표한 시국선언에서 “불의와 불공정에 저항하여 일어난 평범한 대학생들을 정치적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해당 시국선언문에서 전대연은 청년들이 “위선(僞善)이 판치는 사회가 아닌 공명 정대하고 균등한 기회를 보장해 주는 선(善)의 사회를 원한다”며 ”진영과 이념을 떠나 …… 진정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해 총궐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공정한 사회’ 주장은 조국 사퇴 이후에도 계속됐다. 10월 16일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전대연은 조국은 사퇴했지만, 조국이라는 개인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며 오는 26일, 3차 집회를 열어 공정사회 실현을 촉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조국사태에 대해 청년들이 보인 세 가지 태도에는 일부 수긍할만한 반응도 있었으나, 공감하기 어려운 태도도 있었다. 특히, 소수자성을 강조하며 자기 내면으로 빠져드는 태도나, 조국사태의 본질은 불공정한 사회에 있다며 공정 사회를 만들자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조국사태에서 필자가 느꼈던 청년들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게 상황을 진단하고 있으며, 그 진단 결과가 청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는 방향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평등: 청년 문제의 실체를 어렴풋이 표현하다

청년들이 조국사태를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특히 앞서 언급한 한겨레 기사를 보면, 청년들은 절차적으로는 공정하지만 그 안에서도 불평등이 자리할 수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는 청년들이 사회 구조 자체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청년들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도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는 점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청년들에게, 문재인 정권이 자본가계급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긴 것이라든가,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청년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는 식의 구체적인 시각이 명확히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평등이라는 접근을 통해 청년 문제의 원인을 더 이상 개인적 차원에서 찾지 않고, 구조적 차원에서 찾기 시작했다는 점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청년 문제는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어서 발생하는 것인데, 불평등은 그 실체를 어렴풋이 표현한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을 넘기 힘든 ‘소수자성’ 접근

한편, ‘소수자’ 청년들의 자기발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왜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보기보다는, 그저 서초동에서도 광화문에서도 청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현상만 과장되게 인식하여 ‘청년이 배제되었다’는 식으로 피해자적인 위치에 머무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구세력에도, 자유주의 세력에도 지지를 보내지 않은 것은 분명 청년들의 선택이었고, 이 두 세력에 대한 거부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론 청년들이 자본주의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착취에 노출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년들이 일방적으로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약 분노가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라면, 청년들은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한 명의 노동자이자 주체로서, 사회를 바꿀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수자성’ 접근은 각 청년들 간에 존재하는 상황적 차이를 당사자가 아니면 발화할 수 없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는, 청년들 사이에 공통된 문제의식이 성립되는 것을 방해하고, 문제를 살펴볼 수도 해결 방안을 세울 수도 없게 만든다. 스스로를 피해자적 위치에 가두고 여기에 안주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청년들은 ‘자기 연민에 빠진 허무주의자’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

다른 한편으로, ‘불공정’함이 조국사태를 불러일으켰다며, 사회를 공정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에 공감하는 청년들도 꽤 많을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구호는 오래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자주 쓰였던 슬로건이라 거부감이 적을뿐더러, ‘이상향’을 요구하며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왠지 멋있어 보이는 착각까지 얹어주기 때문이다.

조국사태의 본질은 ‘불공정’에 있지 않았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규와 도덕규칙을 잘 따르는 것을 공정이라고 본다면, 조국은 그 법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국은 청문회에서 ‘잘못한 게 없다’고 뻔뻔스럽게 변명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자들 역시 국회에서, 서초동에서 이 점을 조국 수호의 변명으로 삼았다.

한편, ‘불공정’ 논리대로 조국사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청년 문제는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공정한 사회’ 만들기로 청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함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구조에 기대어 나온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상품생산사회에서 ‘공정성’은 상품생산자들끼리 자유롭게 교환이 이루어지는 경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거래를 할 때 판매자가 구매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상품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고 제 값 대로 거래한 것을 두고 우리는 ‘공정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정한 상품교환 구조에서도 불평등은 발생하고, 착취는 발생한다. 이를테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서 서로 화폐와 노동력 상품을 맞바꾸는 고용관계에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취는 발생하게 된다. 착취란 상품교환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느냐와는 별개로,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청년 취업준비생이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치자. 대기업이 아무리 ‘공정하게’ 거쳐서 임금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청년 노동자가 회사에 쉴 틈 없이 부려 먹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이 자본이 대단히 이상적인 공정한 절차를 통해 청년들을 대거 채용했다고 치자. 그렇게 고용된 노동자들이 창조한 잉여가치가 고스란히 자본가의 손에 이윤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착취는 여전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불공정’에 분노하는 식으로 청년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의 틀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 엉뚱한 곳에 문제 제기하는 방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착취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깨닫고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자의 의식을 도로 붙잡아 체제 안으로 가두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자. 자본주의를 넘어선 청년들의 운동이 필요하다.

조국사태에서 청년들은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사태를 인지하고 있었다. 어떤 태도는 이해할만했고, 어떤 태도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청년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간 청년들이 힘들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렇다는 변명도 벌써 십 수 년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당신들이 망쳐놓은 경제 사정 때문에 내가 힘들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항상 경제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작 경제를 망쳐놓은 장본인들, 망가진 경제를 회복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들은 특혜를 마음껏 누리면서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치켜드는데, 왜 청년들은 청년의 잘못이 아닌 일 때문에 그저 씩씩거리고만 있어야 하냐는 말이다.

청년들은 살아지는 대로 열심히 살았고, 기다리라는 대로 얌전히 기다렸다. 그렇게 참아왔던 청년들의 분노가 조국사태를 계기로 차갑게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조국도, 문재인 정권도, ‘공정’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조차도 사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체제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자본주의 밖에서 대안을 찾아보자. 내 안에 갇힌 채 세상과 마주하기를 거부하면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제의 우물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상태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본주의 밖을 상상하는 청년들에게 있다. 필자가 참여하는 11월 10일에 열릴 (가칭)청년 사회주의자 모임 발기인대회는 이런 움직임의 하나다. 현실에 분노하는 청년들이 자본주의를 넘어, 더 나은 사회를 함께 고민하고 같이 운동을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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