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어난 이란의 민중시위: 원인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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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nadolu Agency/Getty Images]

[편집자 주] 이 글은 독일인으로 이란에 거주한 바 있고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의 경제발전을 연구한 분의 영문 기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란 정세에 대해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이란에서 약 두 주 전부터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1월 7일 이후, 시위는 이제 종결된 것으로 보이고, 시위가 추가 발생했다는 징후나 뉴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잠시 동안의 일일지, 아니면 시위의 종결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위는 어떻게 시작됐나

12월 28일, 마쉬하드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마쉬하드는 이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북동부 아프가니스탄 접경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단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물가에 반대해서 시위를 했다. 따라서 이것은 로하니 정부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기도 했다. 시위는 보조금 삭감으로 인한 달걀 가격 인상과 휘발유 가격 50% 인상 때문에 촉발됐다. “가격 인상 반대” 슬로건으로 시작한 시위는 즉각 체제 전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변하여 “독재자에게 죽음을”, “로하니에게 죽음을”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시위는 마쉬하드뿐 아니라 니샤프루, 비르잔드, 샤흐루드, 야즈드, 카쉬미르로도 확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란 서부 케르만샤, 북부와 남부의 여러 도시들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국가 지도자들을 걱정하게 만든 이번 시위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시위는 지방 주들과 시골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대개 매우 보수적이고 따라서 이란에 가장 충성하는 지역들이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대다수 청년이 실업상태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스마트폰밖에 없어서 이것을 가지고 자신의 가난한 현실 너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곤 한다. 또한 이 시위들에는 아직까지 지도자도 어떤 정치 강령도 없다. 이번 시위는 빈민층이 주도한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단순한 시위였다. 굶주림에 대한 분노, 어려운 생활환경, 국가 자원에 참여할 권리 박탈이 그들로 하여금 거리에 서게 만들었다. 그들은 2016년 1월 유엔 제재가 해제되는 순간 자신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난한 삶을 꾸리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

과거 대규모로 조직된 시위들과 비교해보자. 2009년 테헤란에서 대통령 선거 부정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지도자는 미르 호세인 무사비였고 소수 대도시들의 지식인 중간 계급들이 이 시위를 지지했다. 이번 경우에는 평범한 민중이 거리에 나갔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로, 이란의 모든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번 시위는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 전세계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내의 좌파를 갈라놓는 문제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외국 열강들”을 비난했다. 이번 시위를 준비해왔다는 이유에서였다. 로하니는 마크롱과의 전화 통화에서 “프랑스 소재 반이란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행동을 취해”달라고 주문했다. 이들에게 시위를 일으킨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파리 소재 이란인 망명 집단 “무자헤딘 이 하르크(mujahedin-e khalq)”를 언급했다. “무자헤딘”은 이슬람 혁명 시기 어느 정도 혁명적이었던 한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미국의 첩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시위를 조직하는데, 그 방법은 이렇다. 베를린 자유 대학에 정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1박 숙식을 제공하는 공짜 파리 여행에 참여하라고 권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파리에 데리고 간 후 이란 반대 시위에 참여시킨다. 시위 규모를 더 크게 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다른 한편 평범한 민중은, 지도층이 이란 민중의 투쟁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 문제를 풀기 위해 다른 나라와 협력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양측은 서로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구 “투데당” 전직 당원들이 주도하는 『pyknet.net』과 같은 사회주의 온라인 매체는 어떻게 민중과 국가 지도층이 서로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나를 설명한다(투데당은 샤 왕조와 이슬람 공화국 초기 이란의 공식 공산주의 정당이었으나 탄압을 받았다). 이란 지도층은 계속 민중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세력에 맞서 예멘 민중을 돕고, 혹은 ISIS에 맞서 이라크와 시리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등 세계의 약자들을 돕는 이유를 더 이상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시위대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지도층이 그런 나라들을 더 이상 “돕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자국의 굶주린 민중을 먼저 돕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은 “가자가 아니라, 레바논이 아니라, 나는 오직 이란에 충성한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시위가 처음에 외국 열강들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시위하는 대중들의 문제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심지어 샤 왕조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대중들이 자신의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 시위에 나선 진짜 시위자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최근의 역사적 발전은 시위대의 초기 경제적 요구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보조금 삭감, 가격 인상을 거쳐 시위의 촉발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존재할 권리를 가진다. 문제는 시위대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와 지도층이 외국의 침입 위험을 피하면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이것은 어렵고 민감한 과제이다. 이란의 내부투쟁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전세계적 투쟁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사유화(를 통한 착취) 이야기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은 이란의 숨통을 조이려 했고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미국은 이란을 샤 왕조 때와 같이 미국의 지배하에 되돌리려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수단을 사용했다. (1) 경제제재. 이것은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곧장 이슬람 공화국에 강요되었다. (2) 오랫동안 지속된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은 군사 옵션. 이것은 처음부터 국가 핵심 산업(석유 산업)을 파괴하려는 목적에서 신생 공화국에 강요된 전쟁이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87년과 1988년 직접 폭격기를 출격시켜 신속하게 세 곳의 연안지역 석유생산설비를 파괴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이란 역사의 권위자 니키 케디는 “이란은 주요 항구 호람샤르이 파괴되고 아바단 정유공장과 하르그 선적시설을 포함한 많은 산업이 사실상 파괴되는 등 심각한 전쟁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했다”고 적고 있다. (3) 사유화. 이슬람 공화국이 혁명 직후 석유산업 및 여타 중요 산업을 국유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란 민중이 샤 왕조 시절 영국, 그리고 나중에 미국을 통해 경험했던 착취를 또 다시 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물론 독점 자본주의라는 조건 하에서 사유화는 부와 권력을 축적할 시간을 많이 가진 세력(제국주의 국가들)에게만 이득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사유화는 이란의 정치 주권을 또 다시 약화시키고 이란이 다시금 외국 열강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만든다. 이 세 가지 수단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든 약소국들에 적용하는 수단일 것이다. 약소국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든 사회주의적 요소를 지닌 국가가 되었든 정치경제적 주권을 획득, 유지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최근 이란에 대한 전쟁 징후가 없었고 적어도 유엔 제재(미국의 제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최근 트럼프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가 2016년 1월 해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유일하게 검토해야 할 것은 이슬람 공화국 안에서 사유화가 어떻게 전개되었나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결되자 약화된 신생 공화국은 새로운 최고 지도자를 선택해야만 했다. 혁명기 통합을 상징하던 인물로 유일하게 모든 상이한 계급들과 정치 파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후계자는 이슬람 우파에 속한 아야톨라 알리 호메네이가 되었다.

이슬람 우파만 아니라 이슬람 좌파는 이제 중요 쟁점에 대한 제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파괴된 경제와 사회를 재건할 것인가였다. 가능한 한 자립과 국가운영부문의 확장을 통해서 하자는 제안과 가능한 한 이란의 사적 부문 참여와 해외투자를 통해서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첫 번째 안은 이슬람 좌파의 제안이었고, 이들은 당시 이른바 “급진파”로 불렸다. 반면 두 번째 안은 이슬람 우파의 제안으로, 이들은 당시 “보수파”로 불렸다.

전통적 사적 부문인 시장 상인 “바자리(bazaari)”와 연계된 보수파는 이란 민중이 충분한 희생을 치렀고 생활수준의 개선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경제는 신속하게 재건되어야 하고 그것은 오직 해외투자와 국제 신용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것은 주로 IMF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IMF는 사유화를 가속하는 조건 하에서 신용을 제공한다. 경우에 따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IMF와 세계은행이 미국의 또 다른 수족이기 때문에 미국은 일단 전쟁과 제재라는 수단으로 이란 경제를 파괴한 후, 그 다음에 이란으로 하여금 미국에 경제 재건을 위한 신용을 간청하게 강요하고 이로써 공화국 전체를 금융 채무자 신세로 만들어 다시금 미국에 종속시키려고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달리 급진파의 선택지가 있었다. 이에 따르면 이란은 신속한 성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샤 왕조 때와 같이 다른 나라의 채무자 신세로 또 다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립과 자국 자원의 활용을 추구하면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게 가능했다. 이들 급진파는 보조금, 가격 통제, 기본 재화의 배급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이 미르 호세인 무사비였다. 그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가 된 하메네이는 대통령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총리직을 없앴고 이를 통해 무사비가 이슬람 좌파의 프로그램으로 의회에 제출된 초안을 자신의 경제회복 프로그램으로 가져오는 것을 방해했다. 총리직이 없어지면서 당시 의회 다수파였던 이슬람 좌파는 활동능력을 상대적으로 상실하게 됐다. 무사비의 계획은 상세하게 토론되었지만 1989년 알리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곧 이어 총리직을 없애면서 이 계획이 실현될 기회가 사라졌다.

결국 당시 실용주의자라 불리던 라프산자니는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으며 보수파의 회복 프로그램 중 가장 완화된 안을 제출하게 된다. 이는 의회 내 다수파인 급진파를 만족시켜 타협에 이르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이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1991-1995)로 실행될 때, 원래 내용은 무시되었다. 라프산자니는 그 대신 IMF를 만족시켜 바라던 신용을 제공받으려는 목적에서 급격한 사유화를 추진할 수 있길 바랐다. 이를 위해 그는 보수파와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아, 이슬람 좌파를 1992년 이후 향후 의회에서 완전히 추방하고 식량 및 휘발유 보조금 삭감을 밀어붙이는 캠페인을 성공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90년대 중반까지 설탕, 쌀, 버터 가격이 3배로 상승했고 빵은 심지어 6배 상승했다. 이것은 주민의 대규모 저항을 야기했다. 부채규모는 1991년 90억 달러에서 1993년 340억 달러로 다시 증가했다. 인플레이션률은 해마다 30% 이상 상승했고 한 해는 49%에 달하기도 했다. 유가 하락 하에서 수입(輸入)이 증가했고, 이는 경기후퇴로 이어져 일부 공장의 폐쇄와 노동자 해고를 낳았다.

민중의 저항과 대규모 부채 때문에 하메네이는 이런 급격한 사유화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자립과 보조금 유지 하에서의 완만한 사유화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라프산자니는 처음에는 새로운 지시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긴 했지만 그것을 따를 수 없었다. 미국의 압력 하에서 세계은행은 만약 이란이 사유화 속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향후 이란에 어떠한 신용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보조금이 삭감되고 가격이 상승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1992년, 1994년의 반란으로, 다시 1995년 4월 노동자계급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몇몇 도시에서 발생한 이런 유혈 반란은(최악의 반란은 아크바라바드와 에슬람샤르에서 일어났고, 특히 에슬람샤르에서는 1백만 명이 시위를 했다) 결국 국가 지도층에게 혁명 15년 만에 더 나은 삶을 위해 혁명에 참여했고 혁명기간과 8년간 강요된 이라크와의 전쟁 동안 가족을 잃은 대중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이란은 IMF와 합의했던 급속한 사유화에서 물러나 민간에 팔린 기업들을 재국유화하고 기본 재화와 여타 재화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다시 실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IMF와 세계은행은 이란에 대해 사유화 속도를 더욱 높이라고 촉구했고 이란 지도층은 이를 거부했다. 대규모 시위에 직면해 자리를 보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인 답변은 이란에 대한 제재였다. 이란-리비아 제재법이 1996년 발효되었다(2006년 이란 제재법으로 이름이 바꿨다). 미국은 이란에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테러(다른 이들은 다른 맥락에서 이를 헤즈볼라로 설명한다) 지원, “불법적” 핵 야망 등 혐의가 있기 때문에 이란-리비아 제재법을 부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에서 진술한 전개과정을 볼 때, 미국이 이란에 제재를 부과한 것은 이란이 미국 주도의 사유화 목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경제 국유화로의 회귀는 1997년 5월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에 선출되는 것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그는 온건파로 이른바 ‘자유주의적’ 이슬람 지식인이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이란은 2004년 농업 자립에 도달했고, 따라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진전시켰다. 당시 최대 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보조금과 문화적 자유가 늘어난 것 역시 이 시기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로 만들었다. 이 시기 이란의 청년들이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상당 부분 당시 고유가로 정부 수입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타미 역시 사유화를 추구했고 분명 이를 원했다. 따라서 2001년 하타미 행정부는 “사유화청”을 설립했다. 그 후 2003년 IMF의 지원 하에 대규모 납세자 단체뿐 아니라 ‘전국조세청’ 설립이 뒤따랐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2008년 아흐마디네자드 집권기 부가가치세가 법률상 도입됐다. 그러나 이것이 대규모 시위, 특히 시장 상인의 시위를 야기하자 세금은 낮춰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징수되지 않았다.

이슬람 우파의 이해와 혁명수비대: 이란 혁명의 성과를 무효화하다

전세계적으로 독점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란과 같은 나라들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편 어떤 나라가 사유화를 바라던 바라지 않던,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 나라는 자국의 전체 인프라 개선 기회를 얻기 위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유화를 추진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 이란은 주민의 막대한 부분을 빈민화하지 않고서는 사유화를 추진할 수 없다. 독점 자본주의에서의 시장 가격과 생활조건은 이란 기준으로 볼 때 너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란 지도층 중 탐욕스런 집단과 손쉬운 삶을 살기 바라는 집단이 가능한 한 신속한 사유화를 바라는 이유가 부분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란에게는 높은 세계 시장 가격, 여기서 비롯되는 선진국에 비해 작은 소득은 이란의 낮은 기술수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축적수준에 기인하지만, 이 작은 소득조차 나라의 전체 미래에, 자국민에게 투자되기보다 적어도 소수 탐욕스런 집단의 호주머니를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메네이와 라프산자니가 처음에 급격한 사유화를 추진하려고 했을 때의 상황이고, 하메네이가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2005년 5월 하타미의 임기 마지막 해이자 차기 대선 직전 이슬람 공화국 헌법 44조를 수정하는 중대 결정을 했을 때의 상황이다. 이 대선에서 아흐마디네자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 이러한 사유화 진척은 정당한 일도 아니었을 뿐더러 1979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 하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일이었다.

44조는 국가경제가 국가 부문, 사적 부문, 협동적 부문으로 나누어지며, 샤 왕조 시기 그랬던 것과 같이 다른 나라에 의한 착취를 또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주로 국가 수중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정했다. 수정된 조항은 이제 국가부문 경제단위의 80-90%를 사유화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제1보로 인해 혁명의 성과는 내용상 완전히 변했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무효화되고 취소되었다((이론적으로는 이란 자본만이 국가부문을 살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알고 하메네이도 알듯이 이란의 사적 부문은 국가 경제의 80-90%를 접수할만큼 충분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구매자는 오직 다른 나라들에만 존재할 터이다. 그러나 수정된 조항에 따르면 외국 출신 사적 구매자는 국가부문을 최대 10%까지만 구매할 수 있다.

따라서 아흐마디네자드와 긴밀하게 연관된 이슬람 혁명수비대(세파 이 파스다란) 내 군사 단위에 국가경제를 이전시키기 위해 하메네이와 그의 동맹세력이 이 한도를 일부러 마련해둔 것이란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 문제는 당시 이란 경제집단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혁명수비대 역시 국가경제의 거의 전부를 구매할만한 돈은 없었기 때문에 하메네이가 자기 돈을 혁명수비대에 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 『pyknet.net』에서 추정했던 내용이다.)

2005년 44조가 수정된 이후 혁명수비대 소유 기업이 수백 개 설립되었고 그 중 최대 기업인 “하탐 알 안비야”에 종속되었다. 하탐 알 안비야는 이란 최대의 “민간” 기업이 되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흐마디네자드의 첫 번째 임기 동안 이란의 농업 자립과 밀생산은 값싼 외국 밀 수입으로 파괴되었고 사유화 활동이 전반적으로 강행됐다. 현재로 오면, 로하니가 선출되었지만 이런 사유화 경향은 중단시킬 수 없었다. 2016년 유엔 제재가 해제되면서, 그는 해외 기업들의 대이란 투자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다양한 경제 관련 기사들이 보여주듯 이것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로하니는 2011년 이후 가택 연금 신세에 놓인 무사비를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9년 현대 이란의 중간계급들로부터 폭넓게 지지를 받았던 무사비는 현재의 지도층에게 분명 너무 위험한 존재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고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급속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란 경제에 이득이 돌아가고 이란 민중을 위한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보조금을 대거 유지하는 점진적 사유화에 여전히 호의적인 유일한 인물이 그일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여전히 가택 연금 상태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이란의 시위대는 중간계급이 되었든 최근 시위에 나선 노동자계급이 되었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서 이란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은 다음의 한계 속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 그 한계는 전세계 독점 자본주의라는 틀과 그것이 낳은 사회정치적·문화적 자유의 제약 안에서 경제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이란에서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이 해외의 착취자와 억압자에 맞서서뿐 아니라 이란 내 착취자와 억압자에 맞서서 서로 어깨를 걸고 함께 싸워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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