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낳괴’,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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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모르는 단어가 늘어나 있는 세상이다. 단순한 줄임말부터 자음끼리의 조합이나 첫 글자만 떼어내 이어붙인 단어까지,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해석조차 할 수 없는 신조어들이 유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신조어들 중에 현실을 풍자하는 단어가 심심치 않다는 것이다. 익히 알려진 ‘헬조선’은 물론이거니와 청년실업과 신용불량자를 합친 ‘청년실신’, 만년인턴 신세를 비꼬는 ‘부장인턴’과 지하방과 옥탑방/고시원을 일컫는 ‘지옥고’까지 풍자 대상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신랄하다 못해 처절한 현실 풍자만으로는 무언가 아쉬운 지점이 있다. 단적으로 앞선 신조어들은 현실이 왜 이 모양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소득격차와 무너져가는 사회보장,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 등에 모순을 느끼고는 있지만 정작 그러한 현상의 원인에까지는 물음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아주 노골적으로, 그리고 적나라하게 문제를 지적하는 신조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이름하야 ‘자낳괴’다.

무엇이 문제인가?

‘자낳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몇몇 인터넷 방송인이 시청자의 후원을 받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걸 빗대어 돈에 눈이 먼 사람을 비난하는 의도로 쓰인 게 시초인 것 같다. 언뜻 보기에는 ‘황금만능주의’나 돈에 환장한 ‘수전노’ 등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표현이지만, 이 단어의 특징은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에 눈이 머는 이유 또는 화폐 물신성에 빠지는 이유를 인간의 본성이나 타락한 도덕 등이 아니라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한 데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조차도 대놓고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흔히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현실의 문제로 삼는 것은 대개 자본의 탐욕이나 재벌의 독과점 등이다. 경제민주화니 공정한 경쟁이니 분배의 정의니 같은 대안을 내놓는 데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안 하느니만 못한 환상을 낳고 결과적으로 무의미하다.

우선 자본의 탐욕이란 말에서 자본은 단순히 화폐더미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자본’이란 자신이 투자한 것 이상을 얻고자 하는 의미에서 투하되는 화폐가치, 증식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즉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가 숨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연명하듯 자본은 그 노동력을 사들여 그 이상의 잉여가치를 뽑아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본래 탐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탐욕이 문제라고 한다는 건 불의 뜨거움이 문제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다.

재벌의 독과점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역시 자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자본은 결코 같은 수준의 이윤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같은 수준의 이윤에 안주한다는 건 생산성의 증대나 확대재생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경쟁에 도태하여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본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윤 중 상당부분을 재투자 하여 살아남으려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패배한 자본은 더 큰 자본에 흡수되므로 자본주의 하에서 산업 부문의 생산은 점점 더 거대한 자본에 집중되어 간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자본이 투하한 생산수단의 가치가 실제 이윤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노동력의 잉여가치보다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바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시장의 확대와 기술혁신 등을 감행하지만 이 역시 한계에 부딪히는데, 무엇보다 필요가 아닌 이윤을 위해 만든 상품이 필연적으로 과잉상태에 놓여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공황이라고 한다.

결국 재벌이 골목상권에까지 손을 뻗치고 하청을 쥐어짜는 이유는 그들의 인간성이 더러워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은 자본의 이해에 따라 낮아지는 이윤율을 높이고 나아가 모든 산업 부문의 독점적 생산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을 반복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을 배제한 채 자본의 탐욕이나 재벌 등의 지배구조만을 문제 삼는 다는 건 마치 그 옛날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마냥 현상에 매몰되어 본질을 도외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본의 탐욕과 재벌이란 환상 아래 감춰진 본질은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물론 ‘자낳괴’가 반드시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뜻이나 그렇게 전락한 스스로에 대한 자조로 쓰이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낳괴’가 가리키는 대상은 화폐물신성에 빠져서 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괴물’이지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파편화되고 자본주의화된 우리의 사고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상품교환으로 대체된다. 그렇다 보니 마치 세상 만물은 화폐로 표현되고 그것을 사들이는 화폐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화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는 화폐를 축적하는 행위에 한계를 없앤다. 고로 자본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 신화의 시지포스 마냥 화폐를 획득하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게끔 한다. 당장 살면서 자신이 구매하는 상품에 대해 그것의 생산자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을 고민한 경험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건 계산대에 올리는 상품의 가격이자 교환가치이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이 아니다.

그렇기에 자본은 필요가 아닌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에 거리낌이 없다. 생산의 결과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는 자본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투하한 것 이상의 이윤, 화폐일 뿐이다. 또한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국가 역시 자본의 이윤추구를 지상과제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경제성장률에 핏대를 올려도 자살률을 줄이거나 산업재해를 줄이는데 목을 매진 않는다. 어떻게든 노동자에게 한 푼이라도 덜 주려고 하면서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주문처럼 외우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낳괴’가 단순히 개인이나 자본 그 이상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모든 사람들은 상품과 화폐가 태초부터 있었고 그것들이 없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는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고는 상품생산과 자본주의로 제한된 합리성 안에만 갇히기 쉽다. 자본과 금리생활자들, 투기자들이 실제로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거나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윤을 착취하고 있음에도 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문제라고 사고하는 태도가 그렇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면서 헬조선을 탈출할 방법을 고민하는 더욱 파편화되고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의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그렇다 하여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는 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오직 자본이 살아있는 노동에 대해 독립적이고 우세한 특수한 사회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과정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들은 그것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형태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그것이 일정한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일정한 역사적 형태는 벗겨지며 더 높은 형태에 자리를 양보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사회관계를 변화, 발전시켜왔고 사회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모순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 새로운 사회로 전진해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150년 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런 말을 남겼다.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중략)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개별 자본가의 선의나 악의 때문은 아니다. 자유경쟁 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이 개별 자본가에 대해 외부적인 강제법칙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시궁창이어서 점점 감내해야 할 고통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자조로 일관하거나 개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헐뜯을 게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자본주의를 보다 세밀히 관찰하길 주문했다. 굳이 유행하는 단어나 노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각자가 겪는 고통과 현실의 비극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억압을 해소하는 건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이자 실천이어야 한다. 마치 물이 끓기 전처럼 부글대는 현실의 답답함을 뚫고 나가자. 문제는 자본주의다.

2 댓글

  1.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 면 뭘 해야하는거죠?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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