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성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환상: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나라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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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 제4호에서 물신성 문제를 다룬 이후(「자본주의와 물신성」) 필자는 일련의 물신성 관련기사를 『사회주의자』에 게재하였다. 필자는 이들 기사를 통해 자본주의 상품생산사회가 만들어내는 물신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들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상에 현혹된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물신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바라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자본주의적인 틀 속에서만 사고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수없이 발생한다. 그 결과 진지한 사람조차도 헛똑똑이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필자는 지속적으로 물신성 문제를 강조해왔다(「자본주의와 물신성」, 「자본주의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식」, 「물신성이 만들어내는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를 극복하자」). 그런데 물신성 관련 기사들을 써가는 와중에 필자는 전형적으로 물신성에 빠진 환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나라다운 나라’라는 구호들이었다. 독자 분들이 알고 있듯이 이 구호들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슬로건이다. 그리고 이 구호들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슬로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촛불집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공감했던 구호이기도 하다. 이 구호들은 사회전체가 침체되고 왜곡되고 퇴행해가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표현으로서 적극적인 의의도 있었지만 그 내용을 파고들면 현실에 대한 진정한 대안 찾기를 어렵게 하고 환상을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필자는 이 구호들이야말로 물신성에 빠진 전형적인 사례라고 판단하고 이를 파헤치는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생각을 곧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물신성 문제의 기본개념을 먼저 소개하지 않은 채 이 주제를 곧바로 다룰 경우, 글의 문제의식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먼저 물신성이 무엇이고, 이 물신성이 본질을 은폐하여 얼마나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지를 충분히 밝힌 후에야 이 주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공유될 수 있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필자는 근 1년 동안 꾸준히 물신성의 기본 개념을 소개하였다. 이제 이 기본 개념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구호인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나라다운 나라’라는 구호가 얼마나 환상으로 가득 찬 구호로서 사람들의 시야를 흐리게 하는 기만적인 구호인지를 밝혀보도록 하겠다.

1.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상품생산사회의 경제 관계를 반영,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아름다운 말이다. 갈수록 사회적 격차가 커지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구호는 매우 매력적인데, 첫 인상은 매우 강한 현실 비판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첫 인상과는 달리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딱 상품생산사회의 경제 관계를 반영하는 이상, 관념일 뿐이다.

상품생산사회에서 상품생산자들은 서로 독립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상호간에 자유의지에 따라 똑같은 가치를 갖는 상품을 (화폐를 매개로) 교환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획득하고 소비하여 자신의 필요를 충족한다. 이때 상품생산자들은 어떤 외부적 강요에 의해 상품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교환하고 자유 의지가 서로 맞을 때 계약을 맺고 교환한다. 그리고 상품교환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 상품들 사이의 부등가교환이 아니라 같은 가치를 갖는 상품들 사이의 등가교환이다.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정확히 이 상품생산 사회의 경제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등가교환을 해서 서로 이득을 보는 것, 이것이 모든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출발점이다. 만약 자신의 의사가 그렇지 않은데 강요에 의해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것이다. 만약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 상품을 교환한다면 한쪽은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법적인 혹은 도덕적인 공정함, 정의로움은 모두 상품생산사회의 공정함, 정의로움에 기초한 것이다.

2. ‘공정하고 정의로운’ 상품생산사회의 틀 속에서 자본주의적 착취가 발생한다.

그런데 자본가의 잉여가치, 이윤은 바로 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상품생산사회의 자유로운 등가교환을 통해 발생한다. 분명히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운 등가교환은 전혀 어겨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일련의 생산과정, 유통과정을 경과한 후에는 잉여가치, 이윤을 얻게 된다. 즉, 상품생산사회의 틀에 전혀 손상을 가하지 않고, 상품생산사회의 법칙을 따라 ‘공정하고 정의롭게’ 행동했음에도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것보다 많은 것을, 잉여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맑스는 『자본론』에서 상세히 밝혔는데 이것이 잉여가치론이다. 잉여가치론의 자세한 내용은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자본가가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입하기 위해서 그 가치대로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노동자가 만들어낸 상품 역시 그 가치대로 판매하더라도, 자본가가 잉여가치, 이윤을 남긴다는 점이다. 이때 잉여가치가 남는 것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 필요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 잉여노동시간까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상품생산사회의 규칙을 훼손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품생산사회의 규칙을 그대로 따르는 과정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착취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상품생산사회의 틀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상품생산사회를 전제와 토대로 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상품생산사회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막는 방해자가 아니라 그 적극적인 조성자인 것이다.

3.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이상, 관념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비판에 무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에 철저히 순응적인 관념이다.

상품생산사회의 경제관계를 반영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에 철저히 순응적인 관념이다. 상품생산사회의 물신성에 갇혀있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이상, 관념은 물신성의 완성인 경제적 삼위일체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주의와 물신성」에서 언급하였듯이 물신성은 경제적 삼위일체에서 완성된다. 이 삼위일체에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이윤, 이자는 자본의 대가, 지대는 토지의 대가로 나타나고, 노동자들에게조차 문제는 자본주의적 착취 자체가 아니라, 임금이 이윤, 이자, 지대에 비해서 지나치게 낮은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정당한 임금, 정당한 이윤, 이자, 정당한 지대가 확립되어 서로가 정당한 몫을 차지하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것처럼 나타난다. 노동자, 자본가, 지주, 건물주가 다함께 생산에 기여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것이다. 노동자가 너무 적은 몫을 차지하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거꾸로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몫을 요구하는 것도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물신성에 갇혀있는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관념은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본질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단지 현상을 따라가며 지나치게 자본가, 지주에게 유리하게 왜곡된 과도한 현상에만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4.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구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 왜곡하고 노동자 민중이 문제의 실체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사회적 불평등의 급속한 악화, 일자리부족,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산, 저출산 등으로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의 강력한 동력도 단순한 ‘국정농단사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위기를 맞이하여 지배계급은 노동자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고 노동자 민중의 시선을 체제 자체의 문제와는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여러 개혁적인 구호들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공정한 사회’였다. 이것을 가장 먼저 시작한 인물이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임기중반인 2010년 8.15 경축사에서 핵심구호로 ‘공정한 사회’를 내걸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의 함정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분열과 갈등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지켜온 가치와 체제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정한 사회’ 라는 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입니다. 공정한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 근면과 창의를 장려합니다.

……

공정한 사회야말로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 실천적 인프라입니다.

연이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가 털레비전 광고 슬로건으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를 제출하였다. 대통령 당선 이후 문재인은 5월 10일 취임사에서 이것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힘들었던 지난 세월, 국민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 문재인은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 선거 과정에서 약속했듯이 무엇보다 먼저 일자리를 챙기겠습니다. 동시에 재벌 개혁에도 앞장서겠습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정경유착이란 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하고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의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호의 목적은 삶의 위기에 처한 노동자, 민중이 그 원인을 자본주의체제 자체에서 찾지 않고, 무너진 ‘공정한 룰’, 높아진 사회적 장벽에서 찾게 하여 노동자, 민중이 문제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구호는 지나치게 노동자, 민중에게 불리하게 왜곡된 분배구조, 사회적 격차, 사회적 장벽을 일부 개선하여 노동자,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고 현혹시키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부르주아 언론들은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촛불집회의 강력한 동력이 형성된 원인을 ‘공정한 룰’이 붕괴된 데에서 찾고 이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반복하여 수행하였다. 이들로서는 체제의 문제로까지 노동자, 민중의 문제의식이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붕괴된 공정한 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공정과 정의는 이미 이명박이 들고 나올 때부터 전혀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다. 공정과 정의는 전통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위기 시에 들고 나오는 ‘개혁슬로건’이었다. 공정과 정의는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체제 내부수리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서도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를 덧붙이면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의당이 그 당명에 ‘정의’를 넣은 것은 자신들이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전파자라는 것을 그 당명에서부터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5. 또 다른 환상, ‘나라다운 나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한 세트를 이루는 ‘나라다운 나라’ 역시 물신성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보다 정확한 말로 표현하면 ‘국가다운 국가’인데, 여기에는 ‘국가가 국가다워야 한다’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바람직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 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이상적인 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람직한 이상적인 국가란 환상이며, 실제로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는 국가는 계급국가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계급지배기구인 자본가계급국가이다. 그리고 이 국가는 노동자계급에게는 자신을 억압하는 기구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라다운 나라’는 노동자계급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국가물신성(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본주의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 참조)에 빠져 생기는 또 다른 환상일 뿐이다.

6. 급기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환상을 넘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의 논리로까지 악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구호가 얼마나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고 기만적인 구호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구호는 급기야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논리로까지 악용되고 있다.

“결과의 평등 NO 기회의 평등 YES, 무임승차 웬 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

정규직으로 구성된 인천국제공항공사 노조가 공청회장에서 들고 있던 피켓이다.
공청회 발언대에서 공사 공채 신입사원 A 씨는 “고시촌에서 공부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면서 “원칙을 배제하고 대규모 직접고용을 하는 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YTN PLUS 2017. 11. 24. 기사, 「대통령 1호 공약 ‘인천공항 비정규직 0명’합의」)

[사진: 공공운수노동조합 인천공항 지역지부]

지난달 23일 열린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비정규직 9000여명 중 최소 3221명을 공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자 공사 정규직 300여명의 야유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본사 정규직 1200여명 가운데 4분의 1이 공청회장을 메운 것이다. 이들에게 입사시험을 치지 않은 비정규직의 ‘본사 정규직화’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다. 표면상으로는 ‘본사·자회사’가 전선이지만 실제로는 시험을 보지 않은 비정규직이 공채 정규직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이런 갈등은 인천공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중등교사 임용시험 준비생 3700여명이 가입된 온라인 카페 ‘전국 중등 예비교사들의 외침’ 회원들은 지난 8월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선 안된다며 집회를 했다. 서울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청년 정규직들도 스크린도어와 철도 정비, 역무, 구내식당 업무를 맡고 있는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집단 반발했다.

논리는 단순하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는 비정규직들을 향해 “경쟁을 거부하는 무임승차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중등 예비

교사 모임은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는 기간제 교사들을 “교직계의 정유라”라고까지 표현했다.

……

정규직 취업문이 극한경쟁 구도에 놓이면 놓일수록, 정규직이 된 이들은 비정규직 차별을 당연시할 가능성이 높다. 시험점수로 인간의 ‘급’을 나누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과 외환위기 이후 켜켜이 쌓여온 삶의 불안이 ‘공정이라는 이름의 차별’을 만들어낸 셈이다.

(경향신문 2017. 12. 4. 기사, 「[일자리 공정성 갈등]“취업전쟁 이겼는데”…‘정규직 전환’ 불편한 시험만능사회」)

인용된 글과 자료들을 보면 ‘공정과 정의’가 얼마나 환상적이고 기만적인 것이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로까지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신성으로 가득 찬 ‘공정과 정의’가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로막고 급기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노동자계급내 차별과 분리를 정당화하려는 ‘노예’의 언어로까지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맺으며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면화하여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공정과 정의’라는 말이 지배계급에 의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지배계급은 ‘공정과 정의’를 노동자, 민중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자본주의가 문제다’라는 의식에 이르지 못하도록 갈수록 빈번하게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공정과 정의’를 국정운영의 핵심구호로까지 격상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불평등과 격차의 확대는 상품생산사회의 ‘공정한 룰’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이 ‘공정한 룰’ 아래 자본주의적 착취가 강화되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공정과 정의’는 급기야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노예’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악용되고 있다. 시험이라는 ‘공정한 룰’을 통과한 소수의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다수의 노동자들과 다른 알량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은 ‘노예’의 욕망일 뿐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구호를 수없이 반복해도 ‘헬조선’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현실은 전혀 달리지지 않는다. 문제는 자본주의인 것이고 ‘헬조선’에서 벗어나는 길은 허구적인 환상을 떨쳐내고 문제의 실체인 자본주의 현실 자체를 바꾸어내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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