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성이 만들어내는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를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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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자본주의는 마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대등한 주체 사이의 계약관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는 착취관계일 뿐이다.]

지난 호에서는 물신성 개념을 도구로 사용하여 첫 번째 주제로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식의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이 주제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주의자들의 주된 임무는 정확히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물신성 개념을 사용하여, 두 번째 주제로 ‘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실제로는 통일되어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서는 서로가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를 해명한 후에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사활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올바른 결합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1. 물신성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치와 경제가 실제로는 통일되어있음에도 겉으로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이미 앞선 글들에서 강조하였듯이 자본주의에서 전면화 되는 물신성은 본질을 은폐, 왜곡한다. 이러한 물신성이 임금 등과 같은 현상형태들과 서로 결합하여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 왜곡하고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는 통일되어 있는(본질) 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된 것(현상)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발전하고 결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직접적 생산자의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론Ⅰ』에서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출현할 때 노동력이 상품이 된다고 하였는데 자유로운 노동자가 출현하는 첫 번째 역사적 조건은 직접적 생산자가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두 번째 조건은 직접적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워, 쉽게 말해 생산수단을 박탈당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역사적으로 임노동 자본의 관계가 형성되고 발전하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본질에서는 착취관계이지만 현상에서는 여타 상품거래자들 사이의 관계와 똑같은 대등한 주체의 계약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이전의 봉건적 생산관계에서의 농노와 봉건영주의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이미 앞선 글(「자본주의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에서 봉건적 생산관계의 고유한 특성을 언급한 『자본론Ⅲ』의 부분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를 재강조하고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다시 인용해보겠다.

또한 명백한 것은, 현실의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과 노동조건의 ‘점유자’이기도 한 모든 형태에서는 소유관계는 동시에 직접적인 지배․예속관계로 나타나며, 따라서 직접적 생산자는 부자유인〔이 부자유는 부역노동의 농노제로부터 단순한 공납의무에 이르기까지 점점 약화될 수 있다〕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직접적 생산자는 〔우리의 전제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점유하고 있으며 자기의 노동의 실현과 자기의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객체적인 노동조건을 점유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농업과 〔이것에 결부된〕농촌가내공업을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명목적인 토지 소유자를 위한 잉여노동은 경제외적 강제〔그 형태가 어떻든〕에 의해서만 강탈될 수 있다. 〔이것은 노예경제나 식민지 농장과 구별되는데, 후자에서는 노예는 자기의 것이 아닌 생산조건을 가지고 노동하며 독립적으로 노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인격적인 종속관계〔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격적인 부자유〕와 토지의 부속물로서 토지에 결박되는 것〔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속〕이 필요하다.

이를 부연하여 설명하면, 생산수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와 달리 봉건적 생산관계에서 농노는 생산수단의 점유자이다. 봉건영주는 명목적인 토지소유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농노는 자기의 농업과 농촌가내공업을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봉건영주가 경제외적 강제를 사용하지 않고, 농노를 자신에게 신분적으로 예속시키고 농노의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으면, 농노로부터 잉여노동을 착취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봉건적 생산관계에서는 신분적 예속관계는 생산의 필요전제조건으로 이와 분리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생산과 정치, 경제와 정치는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농노 봉건영주의 관계와 임노동 자본 관계를 대비하면 임노동 자본관계의 특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본질적으로 임노동 자본관계도 농노 봉건영주의 관계처럼 착취관계이지만, 전자는 경제외적 강제가 작용하는 신분적 예속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겉모습으로는 노동력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거래자관계이기 때문에, 또 임금형태자체가 불불노동을 은폐하기 때문에, 마치 대등한 인격을 갖는 주체의 계약관계인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 또한 임노동과 자본관계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영역이므로 국가는 이 관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게 되고, 결국 생산과 정치, 경제와 정치는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적 소유의 보호, 자본과의 융합에서 사회와 통일되어 있어, 실제로는 경제와 정치가 밀접히 통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둘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본질을 은폐, 왜곡한다는 점에서는 허구적인 것이지만 단순한 허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물신성 일반처럼 똑같이 자본가들이 공모하여 가공적으로 만들어내어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사회,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하는 객관적 현상이다. 때문에 매우 위력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물신성을 깨고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와 경제는 분리된 것으로 보이고 이의 연장선으로 정치투쟁, 경제투쟁 역시 분리된 것으로 보이게 된다.

2. 자본가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된 두 영역으로 표상하려고 한다.

물신성이, 이를 깨지 못할 경우,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현실을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으로 바라보게 하여 이를 극복하려는 의식과 실천을 가로막아 자본주의질서의 유지에 도움이 되듯이,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도 똑 같이 그러하다.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는 노동자계급의 의식에 혼란을 초래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분리시키고, 투쟁대상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게 한다. 즉, 당면한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과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에 대한 투쟁을 분리시키거나, 혹은 국가가 투쟁의 대상으로 부각되어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이 모아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를 증폭시키는 이데올로기를 개발, 증폭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들을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많이 접하는 것으로, ‘순수하지 못한 정치투쟁’이라는 말이 있다. 경제투쟁은 자본가들도 인정하지만 정치투쟁은 순수하지 못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사한 예는 노사간 자율이 원칙이므로 노사문제를 국가를 끌어들여 대정부요구투쟁으로 끌고 가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정부는 노사문제에서 중립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위치에 있다는 것 등 수없이 많다. 이 모두는 정치투쟁과 정치투쟁이 결합하여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이 강화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 국가가 투쟁의 초점이 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 국가가 실제로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지만 마치 중립자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이 자본가계급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치, 경제 분리의 허구성을 폭로, 공격해야 한다.

이상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가 발생하고, 자본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이해를 위해 이를 증폭시키고 있음을 밝혔다. 1, 2의 내용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뒤집어 주체적으로 재정리하면,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가 야기하고 자본가이데올로기가 증폭, 심화시키는 정치, 경제 분리의 허구성을 끊임없이 폭로, 공격하여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적 사상과 관점 속에서 자본가계급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끊임없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련을 상승시키고, 양자 사이의 상호전화를 심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올바른 결합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올바른 결합은 역사상 노동운동 내에서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편향이 발생한 주제이다. 사회주의자로서 이 주제를 대하는 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역사상 검증된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과 함께 과도한 도식적인 일반화를 경계하는 것이다.

1) 노동자계급은 정치투쟁을 중심으로 경제투쟁을 결합시켜야 한다.

계급투쟁의 세 가지 기본적 형태, 경제투쟁, 정치투쟁, 이데올로기투쟁에서 중심적인 투쟁형태는 정치투쟁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 경제투쟁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 해소되는 관계가 아니고 상대적인 독자성이 존재하지만 정치투쟁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경제투쟁은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2) 정치투쟁을 주로 경제투쟁의 발전 결과물로 바라보며 정치선동 등 정치투쟁발전의 계기들을 협소화하는 경제주의, 단계론은 배격하여야 한다.

역사적 경험에서 확인되듯이 정치투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발전 가능하다. 주로 경제투쟁에서 출발해서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성과도 일치하지 않고, 역사상 그 오류가 분명히 드러난 경제주의, 단계론적 관점으로 자본가계급에 대한 전면적 계급투쟁의 발전을 방해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난 글에서 비판한 외부도입설을 주장한 오류도 있지만, 경제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3) 역사상 검증된 사실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정치투쟁, 경제투쟁 혹은 정치파업, 경제파업은 상호 밀접히 결합, 서로를 상승시키며 발전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양 투쟁 사이에 관념적으로 장벽을 형성하는 관점은 배격하여야 한다.

물론 시기상의 선후에서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갖지만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고양시기에 서로 상승시키며 발전한다. 퇴조기에는 역의 방향에서 서로를 제약한다. 레닌은 1910년에 작성한 「러시아의 파업통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었는데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 통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첫 번째 결론은, 경제파업과 정치파업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에 고조되고 동시에 쇠퇴한다. 정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공세기(1905)운동의 힘은 1895년에서 1904년까지 10년간의 전체 수치를 초과하는 매우 강력한 경제적 파업의 광범한 기초 위에 정치파업이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운동의 하강기에, 경제파업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정치파업에 참가한 사람의 수보다 훨씬 빨리 감소하였다. 1906년, 특히 1907년에 운동의 약세는 의심할 나위 없이 경제투쟁이라는 광범하고 확고한 토대가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한다. 한편 일반적으로 정치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수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감소한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즉, 선진적인 부분이 퇴각을 저지, 공세로 전환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한다. (레닌, 「러시아의 파업통계」, 『레닌저작선』, 거름, 360쪽)

정치투쟁, 경제투쟁의 상호상승 작용과 전화에 대해서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1906년에 작성한 『대중파업론』에서 잘 요약하고 있어 참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자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바로 이 저수지에서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며 동시에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 줄 모르는 경제적 공병들을 각각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끌어간다. 그로부터 대규모 정치투쟁들이 뜻하지 않게 폭발한다.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이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지는 동안에 이 두 가지 투쟁,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 두 요소의 통일이 바로 대중파업인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57, 58쪽)

이처럼 정치투쟁, 경제투쟁은 상호 작용하고 상호 전화한다. 따라서 둘 사이에 관념적으로 장벽을 설정하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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