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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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성을 다룬 글들(「자본주의와 물신성」, 「자본주의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에서 필자는 자본주의에서 전면화하는 물신성이, 여타의 자본주의적 현상 형태와 결합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착취적 본질과 국가의 자본가계급지배기구로서의 본질을 은폐한다는 사실을 요약해서 밝히고 따라서 물신성을 깨고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물신성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앞의 글들을 읽은 독자들은 물신성이 갖는 의미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이 물신성 개념을 도구로 사용하여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중요한 실천적인 문제들을 해명해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주제는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식이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하는 문제를 물신성 개념을 도구로 하여 보다 분명하게 해명하고 여기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주된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혀 보도록 하겠다.

1. 사회주의의식의 형성과 관련한 논쟁의 검토

물신성 문제의 실천적 의미를 필자는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그러면 이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것은 첫째,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며, 그리고 경험과 투쟁 속에서 직관적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을 인식하더라도 이 인식은 철저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둘째,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과학,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도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실천적 의미가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실천적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상의 내용들을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검토할 때이다”이라고 글을 마무리하였다. 이제 이 주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 형성과 관련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잘못된 주장이 ‘밖으로부터(영어로 from without)’로 지칭되는 외부도입설인데 이 주장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이 카우츠키와 1905년 혁명이전의 레닌이다.
이 주장의 원조는 카우츠키인데 이 주장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주장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원문대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많은 수정주의적 비판가들은, 마르크스가 경제발전과 계급투쟁은 사회주의적 생산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이 사회주의적 생산이 필연적이라는 의식도 직접 만들어낸다고 주장한 것처럼 믿는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 영국이야말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사회주의의식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이들 비판가들은 이의를 제기한다. 강령초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비판을 받게 되는 소위 정통 맑스사상을 오스트리아당 강령초안 작성위원회가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될 것이다. 그 초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본주의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를 증대시키면 시킬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더욱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으며, 싸울 능력을 얻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 문맥 속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이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필연적이고 직접적인 결과인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인 오류다. 물론, 사회주의는 하나의 학설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낳은 대중적 빈곤과 비참함에 대한 투쟁에서 나온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발생해온 것이지 그 중 어느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조건 아래서 발생하였다. 현대의 사회주의적 의식은 심오한 과학적 지식을 기초로 해서만 생성될 수 있다. 참으로, 현대의 경제학은 이른바 현대 기술과 똑같이 사회주의적 생산을 위한 한 조건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리 애를 써도 현대기술이나 현대 경제학 중 어느 하나도 창조할 수 없다. 양자는 모두 현대 사회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현대 사회주의는 부르주아계층에 속한 몇몇 개인의 두뇌 속에서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보다 지적으로 발달한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였고, 이어 이들 노동자들이 사정이 허락되는 곳에서 그것을 다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도입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 속으로 외부로부터 도입된 것이지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전의 「하인펠트 강령」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임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고취하는(문자 그대로 흠뻑 적시는) 것이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전적으로 옳았다. 만약 의식이 계급투쟁 내부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새 강령초안은 옛 강령으로부터 이 명제를 따와 위에 언급했던 명제에 갖다 붙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상의 발걸음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 (『 노이에 짜이트』지, 1901년에서 1902년, 제20집 1권, 3호, 79쪽,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 카우츠키는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이 각각 따로 발생한 것이고,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계층 출신 지식인 들이 창조한 것이며, 이것이 계급투쟁 속으로 외부로부터 도입된 것이지,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카우츠키의 주장에는 중대한 결함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출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발전의 산물로서(과학적 사회주의가 출현하기 전에 이미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하고 있었고 영국의 차티스트운동, 프랑스의 1831년, 1834년 리용의 봉기, 독일의 1844년 실레지안 직조공들의 폭동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지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이 계급투쟁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우츠키는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현상,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가 맑스와 엥겔스라는 부르주아계층 출신이라는 점―이것은 사실이다―을 마치 부르주아지식인에 의해서만 사회주의의식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도입될 수 있다는 근거로 삼는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카우츠키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최고수준의 맑스주의 이론가를 자처했지만 맑스주의의 핵심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계급의식, 사회주의의식에 도달할 수 없고 부르주아지식인들의 외부도입에 의해서만 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맑스주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주장이다. 맑스가 실제로 주장한 것은 이와 정반대로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지위와 임무를 ‘과학’의 도움으로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맑스가 물신성을 강조한 것은 현상 형태에 매몰될 경우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식 사이에 스스로 넘을 수 없는 엄청난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 자체가 ‘과학’이 밝힌 진리와 일치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자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실제 맑스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맑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앞의 카우츠키의 글과 유사한 내용을 레닌은 비슷한 시기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는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고 우리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의식은 외부로부터 노동자들에게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노동조합의 의식만을-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사용자에 대항하여 싸우고 정부로 하여금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는 신념만을-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된 바다. 그러나 사회주의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표자, 즉 지식인들이 만든 철학․역사학․경제학의 제 이론으로부터 성장해 나왔다. 현대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 즉 맑스와 엥겔스는 그 사회적 지위로 보면 부르주아 지식인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학설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성장과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성하였다. 그것은 혁명적․사회주의적 지식인의 사상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시기인 90년대 중반에는, 이 학설은 ‘노동해방그룹’의 강령에서 완전히 정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러시아의 혁명적 청년의 대다수를 전취하기에 이르렀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외부로부터만, 즉 경제투쟁의 외부로부터만, 다시 말하자면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의 외부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레닌의 주장은 러시아의 사정을 반영한 것을 제외하면 카우츠키의 주장과 거의 같다. 레닌 역시 러시아의 운동의 역사적 현상을 외부도입설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카우츠키에 대한 비판은 레닌에게도 해당한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도 역사적으로 보면 러시아 계급투쟁의 산물이며 러시아 계급투쟁의 의식적 표현일 뿐이다. 다만 그 둘이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레닌이 이후에도 이러한 잘못된 사회주의의식 외부도입설을 계속 고집한 것은 아니다. 레닌은 얼마 지나지 않아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1905년 11월 러시아 1차혁명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쓰인 「당의 재조직」에서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글은 혁명의 진행에 맞추어 당을 대중정당화할 것을 주장한 글인데 대중정당화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사회주의의식형성과 관련된 레닌의 사고의 변화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수행된 십여년의 사업으로 이러한 자발성은 상당 부분 의식성으로 변화되었다.

이 주장은 한 눈에 보아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의 주장과 완전히 다른데, 노동자계급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즉, 레닌은 이 시점에 이르러 노동자계급이 ‘외부로부터의 도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된 생각에 의하면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사회주의의식을 노동자계급 밖으로부터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된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의의를 갖는 차이점이다.

2. 사회주의의식의 형성에 대한 레닌의 견해 변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의식의 형성과 관련된 레닌의 견해는 사회주의자 나아가 당의 역할에 대한 견해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02년도의 견해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의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주의의 도입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 만큼 당의 역할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1905년도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되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보다 분명한 의식성을 갖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로 제한된다. 그리고 이에 연동되어 당의 역할 역시 그러하다.

그러면 1905년도의 견해와 1902년도의 견해중 어느 것이 실제와 부합되는 것인가?

이미 앞의 부분적 평가에서 언급하였듯이 1905년도의 견해가 실제와 부합되는 것이다. 이는 레닌이 실천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간 과정에서 비추어보아도 그러하고 1905년도의 견해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맑스주의의 기본명제와도 부합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자들의 도입에 의해서만 사회주의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는 온전한 의미에서 노동자계급을 혁명과 해방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서 맑스주의의 기본명제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더 이상 주체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사회주의자, 당이 되게 된다. 주체 외부의 노력에 의해서만 주체가 주체로서의 의식에 이르게 된다면 그 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닌 것이다. (스탈린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로 진행된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 자주적인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수령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수령의 지도에 의해서만 자주적인 주체가 되는’ 인민대중은 이미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 레닌의 견해가 몇 년 사이에 크게 변화하였지만 레닌은 이 견해를 뚜렷하게 정식화하지 않았다. 또한 과거의 견해의 오류를 분명하게 지적하지도 않았고, 카우츠키의 오류를 분명하게 지적하지도 않았다. 결국 레닌의 새 견해는 과거의 견해와 똑같이 현상을, 그것도 일부를 요약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역사상 발생한 현상을, 그것도 일부를 요약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상 사회주의이론이 주로 부르주아지식인출신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전형적인 예가 맑스와 엥겔스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의해 사회주의노동운동이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이, 레닌이 동의하는 카우츠키의 주장처럼 계급투쟁과 무관하게 계급투쟁과 독립하여 발전한 것은 아니며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초기를 제외하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에서 부르주아지식인출신의 사회주의지식인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레닌의, 부르주아출신의 사회주의지식인에 의한 ‘밖으로부터의’ 사회주의의식도입주장은 이렇듯 역사상 발생한 현상의, 그것도 일부를 요약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나타난 현상의 일부를 요약하고 이를 과도하게 이론화하여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자들의 외부도입에 의해서만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다.

1905년도에 레닌이 노동자계급이 자연발생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로 전환한 것 역시, 당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요약하는 수준을 벗어난 것이 아니며 경험을 보다 엄밀하게 일반화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즉, 현실에서 눈앞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요약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며 사회주의자들과 당이 사회주의의식 형성에서 해야 할 역할을 엄밀하게 규정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1905년 혁명을 경과하면서 레닌의 견해가 변화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분명한 형태로, 엄밀한 이론화를 통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레닌이 사회주의의식의 형성과 관련한 문제를 충분히 해명했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의식의 형성과 이 과정에서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수행하는 역할, 사회주의자의 역할에 대한 보다 엄밀한 해명이 요구된다.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느냐 아니냐는 것이 아니라(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없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을 대상화하고 사회주의자, 당의 역할을 특권화하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철저한 사회주의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요소를 밝히고 보다 분명한 형태로의 사회주의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해야 할 역할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이때 물신성 개념은 강력한 수단이 된다.

3. 사회주의의식의 형성문제는 물신성 개념을 사용하여 보다 과학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의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과 적대적 관계에 있으며 사적 소유가 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국가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수단이라는 의식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착취와 억압을 폐지하고 계급자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하고 다시 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의식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의식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정에서 ‘본능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다. 노동자계급은 투쟁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사회정의’를 담보하는 중재자로 인식되어온 국가가 철저히 자본가계급의 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의식에 이른다. 이것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주의의식이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의식은 불완전하고 철저하지 못하며 자본가계급의 공세 앞에서 허약하게 무너질 수도 있는 의식이다.

또한 자본주의사회는 자신의 본질을 숨길 수 있는 무수한 현상을 만들어내며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철저한 적대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앞의 글들에서 밝혔듯이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점을 매우 상세히 서술하였는데 물신성 비판이 그것이다. 물신성은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이로 인해 본질적인 사회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의해 은폐되게 만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착취, 억압관계이지만 겉으로는 대등한 계약관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또한 자본이 이윤을 얻는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착취에 의한 것이고 그 착취결과인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노동자에게 노동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몫을 가져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자와 지대는 본질적으로 화폐자본가와 지주가 착취결과인 잉여가치를 나누어차지하는 것임에도 겉으로는 빌려준 돈과 땅의 대가로 당연히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계급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는 겉으로는 모든 국민의 국가로서 중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끊임없이 폭로한,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의 물신성, 현상형태들이다.

이러한 물신성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철저한 인식, 본질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적대적 인식,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방해한다.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은 불완전하고 불철저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의식이 보다 분명하고 철저한 의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필요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과학,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도움으로 노동자계급은 보다 명확한 형태의 사회주의의식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과학으로서 사회주의가 해야 할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극히 약화된다. 레닌조차도 그러하다. 물신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재강조되어야 한다. 『자본론』은 전권에 걸쳐서 일관되게 물신성을 비판하고 있다. 『자본론』을 읽을 때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한다.)

4. 노동자계급의 자연발생적인 사회주의의식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도움으로 보다 명확한 형태로 발전시켜야 하며 사회주의자들의 주된 임무는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의식의 형성과 관련하여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역할은 이른바 ‘밖으로부터’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의식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주의의식을 보다 분명한 형태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없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의식을 철저한 의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그 하나는 마치 사회주의의식이 사회주의자, 당의 실천에 의해서만 노동자계급외부로부터 도입될 수 있다는 대리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 관념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맑스주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고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형성된 잘못된 사회주의자의 역할, 당의 역할론이다. 레닌의 1905년 이후의 견해는 경험주의적인 현상 수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1905년 이전의 견해와 철저히 단절하지 못하였다. 당과 수령을 우상화하는 스탈린주의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생 악화된 것이다. 실천적 의의의 또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자, 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올바로 인식하고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역방향의 편향과 대중추수주의를 경계하며 자신들의 의식적 실천을 올바로 수행하는 것이다. 맑스는 물신성과 자본주의적 현상형태의 분석을 통해 이것들이 노동자계급의 의식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사회주의자들과 당은 이러한 방해물을 제거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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