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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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들 「자본주의와 물신성」, 「자본주의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에서 자본주의에서 전면화하는 물신성 문제를 다루었다. 다른 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글들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필자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글들을 굳이 『사회주의자』에 게재한 것은 앞으로 필자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글들에서도 ‘물신성’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할 것인데, 이번 기회에 물신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이 용어에 독자들이 최대한 친숙하게 하는 것이 나중의 어려움을 덜어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명하는 데에서 물신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피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빨리 이 용어를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의 두 글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전면화하는 물신성이, 여타의 자본주의적 현상형태와 결합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착취적 본질과 국가의 자본가계급 지배기구로서의 본질을 은폐한다는 사실을 요약해서 밝혔다. 이 점을 다시 강조하고, 물신성이 야기하는 환상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드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1. 자본주의에서 전면화하는 물신성은, 여타의 현상형태와 결합하여 본질을 은폐, 왜곡한다.

상품 물신성에서 출발하는 물신성은 화폐에서 더욱 발전한다. 그래서 다른 모든 상품들의 사회적 행위로 금, 은이 화폐가 된 것인데, 마치 금, 은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 같은 환상이 발생한다. 화폐는 신비로운 힘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면 생산과정에서 가치가 늘어나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 이때 잉여가치가 등가교환의 법칙, 계약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 발생한다는 본질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화폐의 가치가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증가하는 자본의 신비성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욱 더 증대된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기계의 도입 등으로 분업이 더욱더 발전하고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발전하는데 이것이 전도되어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서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 강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삼성노동자들의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발전하는데 이것이 모두 삼성자본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의 예이다.

자본의 신비성은 유통과정에서 더 증대되고 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인 이윤에서는 자본의 모든 성분, 계기가 똑같이 초과가치의 원천으로 나타나는 것에 의하여, 자본관계는 더욱더 신비화된다. 이에 더하여 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하고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하면서 각각의 생산분야에서 이윤과 잉여가치 사이에 현실적인 양적 차이까지 발생하는데, 이것은 이윤의 진정한 성격과 원천을 자본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은폐한다. 결국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자 낳는 자본에 이르러서는 이윤이 기업가이득과 이자로 분할되면서 마치 기업가이득은, 이자와는 달리, 자본소유와는 관계없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즉, 기업가이득=감독임금이라는 허상이 나타난다. 기업가 이득은 이윤의 일부임에도 아예 임금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자 낳는 자본에서 자본관계는 가장 물신화된 형태에 도달한다. 지대에서도 물신성이 발생한다. 마침내 물신성은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경제적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완성된다. 결국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물신화가 완성되면서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착취로부터 발생하고 잉여가치가 이윤, 이자, 지대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은 완전히 은폐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착취적 본질은 완전히 은폐되고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노동에 대한 대가, 이윤은 생산에 기여한 자본에 대한 대가, 이자는 대부자본에 대한 대가, 지대는 토지에 대한 대가인 것으로 나타난다.

삼위일체의 공식에 있는 임금, 이윤, 이자, 지대는 경제학자들이 전문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상형태들이다. “노동자가 얼마의 임금을 받는다.”, “자본가가 얼마의 이윤을 냈다.”, “연 몇%의 이자를 지불한다.”, “땅을 빌리고 지대 얼마를 냈다.”와 같은 표현들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일상적인 현상 형태들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 왜곡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범주로 일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때문에 이 익숙한 현상형태에 매몰되면 사람들은,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조차도 임금, 이윤, 이자, 지대를 생산에 기여한 노동, 자본, 대부자본, 토지에 대한 대가로 보게 되고,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임금 이외의 이윤, 이자, 지대가 모두 착취의 결과물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문제는 임금이 이윤, 이자, 지대에 비해 너무 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즉 노동자들조차도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데, 자본가, 대부자본가, 토지소유자가 너무나 많은 몫을 차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의 공식에 의하면 상품의 가격은 재료비+기계 등의 마모비+임금+이윤+이자+지대로 결정되는 것이 되어, 임금이 오르면 상품의 가격이 오르는 것으로 된다. 실제로는 임금이 오르면 단지 자본가와 지주에게 돌아가는 몫이 그만큼 줄어들어 가격은 변화가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임금이 오르면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현재도 쉽게 접하는 자본가와 정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잘못된 주장의 출발점은 ‘물신성이 완성된 삼위일체의 공식’이다.

이어서 국가물신성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결코 중립적인 조정자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계급지배기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성격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사회구성원의 이해가 갈등 대립하는 사회와 분리되어 이를 중립적으로 조정하는 존재의 모습으로 철저히 위장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노동자들조차도 현상에 매몰되면 국가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고 국가가 ‘국가답게’ 자본편이 아닌 ‘공정한’ 조정자, 심판자가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때문에 독점자본과의 정경유착이 자본주의국가의 본질임에도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는 ‘국가다운 국가’의 출현을 기대하게 된다. 우리는 이번 촛불집회 과정에서도 국가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민중 사이에 퍼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에서는 물신성이 전면화한다. 이 때문에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질의 은폐, 왜곡도 전면화하고 환상도 전면화한다. 그런데 이 환상은 자본가들이 담합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상품생산과 유통의 발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위력적이다. 또한 가장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상형태들이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 현상형태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환상에 빠져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 일치한다면, 자본주의에서 현상형태가 본질을 은폐,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물신성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굳이 그것을 밝혀내려고 노력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맑스의 말처럼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기”(『자본론 Ⅲ』)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현상형태가 무수히 존재하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물신성인데, 이 때문에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본질을 밝혀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본질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맑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현상형태들에 의해 은폐, 왜곡되어 있는 본질들을 밝혀낸 대표적인 과학적 저작이다. 이 『자본론』에는 현상형태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밝혀내는 과학적 진실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역할에 대해 압축적으로 표현한 구절들이 있다. 이 구절들은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어 이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에서는 가치의 개념이 완전히 소멸될 뿐 아니라 거꾸로 되어 그 반대물로 된다. 이것은 토지의 가치라는 것과 같은 환상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 표현은 생산관계 자체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본질적 관계의 현상형태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현상에서 사물이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강조는 인용자, 『자본론 Ⅰ』)

임금노동에서는 잉여노동[즉 불불노동]까지도 지불노동으로 나타난다. 노예노동에서는 소유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는데, 임금노동에서는 화폐관계가 임금노동자의 무상노동을 은폐한다.
이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의 형태로[또는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 현상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일체의 정의관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체의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 등의 토대가 되고 있다. (『자본론 Ⅰ』)

현상형태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직접 자연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숨어있는 본질적 관계는 과학에 의해 우선 발견되어야 한다(강조는 인용자, 『자본론 Ⅰ』)

이 구절들을 이 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면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본질을 은폐하고, 이를 뒤집어 왜곡하는 자본주의적 현상형태를 그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과학에 의해 그 배후에 있는 본질적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현상형태들은 그대로 본질을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물신성을 깨고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것은 첫째,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며, 그리고 경험과 투쟁 속에서 직관적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을 인식하더라도 이 인식은 철저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둘째,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과학,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도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실천적 의미가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실천적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상의 내용들을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검토할 때이다. 이 주제는 다음 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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