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물신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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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분량상 두편의 글로 나누어 싣는다. 1월 31일 게재된 첫 번째 글(자본주의와 물신성 (1))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을 다뤘다. 이번 글은 4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을 다룬다.

필자의 주_이 글은 다른 글들에 비해 어렵다. 정치경제학비판에서 사용하는 기본개념에 익숙하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점을 감안해서 독자들이 읽기를 바라며 양해를 구한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나오면 자본론의 색인이나 경제학 사전을 보고 도움을 얻기 바란다.

4. 물신성의 전개

상품물신성은 화폐물신성으로 발전한다. 상품 생산과 교환이 증가하면서 필연적으로 화폐가 발생하게 된다. 보통 최종적으로 금과 은이 화폐로 고정되는데 이때 금과 은이 화폐가 되는 것은 상품생산과 교환이 발전하면서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금, 은)으로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나타나게 된다. 마치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이 특정상품으로 표현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똑같이 상품인 금과 은을 화폐가 되게 만들었는데, 쉽게 말해 화폐 역할을 몰아주었는데, 거꾸로 금과 은이 원래부터 인간노동의 화신인 것처럼 나타나서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주는 것 같은 환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상품들의 사회적 행위로 금, 은이 화폐가 된 것인데, 마치 금, 은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같은 환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폐물신성이다. 이 화폐물신성은 상품물신성이 전개되어 물신성이 더욱더 복잡해진 것이고, 따라서 상품물신성보다 인식되기 어렵게 된다.

상품 물신성, 화폐물신성은 상품생산과 화폐유통이 일어나는 사회형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왜곡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이 왜곡은 점점 더 심화된다. 왜곡은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날 때 더욱 더 전개된다. 화폐소유자, 즉 자본가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재료와 기계 등, 자신이 소유하는 생산수단과 결합시켜 상품을 만들게 해서 이 상품을 팔면 자본가는 재료비용, 기계마모 비용, 임금보다 많은 가치를 화폐로 되돌려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상품 교환의 법칙,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발생한다. 즉, 자본가가 시장에서 제값을 주고 화폐로 재료와 기계를 구입하고,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격대로 임금을 지불했는데도 발생하는 것이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도 계약관계인데도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수중에 갖게 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자본가를 위해 재생산하는 노동시간 이상으로 노동하기 때문이다(이것이 잉여가치론인데 이글의 직접적인 목적이 잉여가치론을 밝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는 언급하지 않겠다.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잉여가치가 등가교환의 법칙, 계약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 발생한다는 본질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농노제 사회와 달리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는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여(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아) 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 경제적 강제에 의해 자본가들에게 얽매여 있다. 이로 인해 임금노동자는 실제로는 자본가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가 독립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를 고용하는 자본가가 끊임없이 바뀐다는 사정과 그가 자본가와 계약을 맺는다는 사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상이다. 이 환상이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 발생한다는 본질을 은폐한다.

화폐의 가치가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증가하는 자본의 신비성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욱 더 증대된다. 맑스는 『자본론Ⅲ』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는데,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인용한다.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발달-이것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발달을 내포한다-에 따라, 직접적 노동과정에서 노동의 생산력과 사회적 상호관련이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사회적 노동의 모든 생산력이 노동 그것에 속하는 힘이 아니라 자본에 속하는 힘으로서, 즉 자본 자신의 태내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자본은 이미 매우 신비스러운 것으로 된다.”(강조는 인용자) 조금 부연하여 설명하면, 실제로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인데 이것이 전도되어(뒤집혀) 자본의 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기계의 도입 등으로 분업이 더욱더 발전하고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발전하는데 이것이 전도되어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서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 강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상품생산과 교환이 발전하여 화폐가 출현하면 그 과정은 잊혀지고 화폐가 전능한 신비로운 힘을 갖는 존재로 되어버리는 화폐물신성과 유사한 현상이다.

자본의 신비성은 유통과정에서 더 증대되고 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인 이윤에서는 자본의 모든 성분, 계기가 똑같이 초과가치의 원천으로 나타나는 것에 의하여, 자본관계는 더욱더 신비화된다. 이에 더하여 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하고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하면서 각각의 생산분야에서 이윤과 잉여가치 사이에 현실적인 양적 차이까지 발생하는데 이것은 이윤의 진정한 성격과 원천을 자본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은폐한다. 결국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이미 물신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는데, 이자 낳는 자본에 이르러서는 이윤이 기업가이득과 이자로 분할되면서 마치 기업가이득은, 이자와는 달리, 자본소유와는 관계없는 것으로서, 그리고 비소유자로서의-‘노동자’로서의-자기의 기능으로서 나타난다. 즉, 기업가이득=감독임금이라는 허상이 나타난다. 기업가 이득은 이윤의 일부임에도 아예 임금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자 낳는 자본에서 자본관계는 가장 물신화된 형태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자본-이자’라는 형태는 〔‘토지-지대’와 ‘노동-임금’에 대한 제3의 것으로서는〕‘자본-이윤’보다 훨씬 더 일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윤은 아직도 그것의 기원에 대한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지만, 이자에서는 그 기억조차 소멸될 뿐만 아니라 그 기원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재생된다.(『자본론Ⅲ』)

지대에서도 물신성이 발생한다.

끝으로, 잉여가치의 독립적인 원천으로서 자본과 나란히 토지소유도 나타나는데, 이 토지 소유는 평균이윤에 대한 하나의 제한이며 잉여가치의 일부를 〔스스로 노동하지도 않고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착취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이자낳는 자본의 경우처럼 자본의 대부에 따른 위험이나 희생과 같은 도덕적인 합리화도 제시할 수 없는〕 계급에게로 이전시킨다. 여기에서는 잉여가치가 사회적 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요소인 토지와 직접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잉여가치의 각종 부분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와 고정화는 완성되고 내적 관련은 결정적으로 파괴되며, 그리하여 잉여가치의 원천은 생산과정의 다른 소재적 요소들과 결부되어 있는각종 생산관계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에 의해 완전히 은폐되어 버린다.(『자본론Ⅲ』) (강조는 인용자)

마침내 물신성은 경제적 삼위일체에서 완성된다.

자본-이윤(또는 더 적절하게는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경제적 삼위일체〔이것은 가치와 부 일반의 구성부분들과 그들의 원천 사이의 관련을 나타낸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신비화, 사회적 관계의 사물화, 생산의 소재적 관련과 그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과의 직접적 융합을 완성한다. 이것은 요술에 걸려 왜곡되고 전도된 세계이며, 그 속에서 자본 도령과 토지 아가씨가 사회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단순한 사물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외관과 기만, 부의 다른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간의 자립화와 고정화, 사물의 인격화와 생산관계의 사물화, 그리고 이러한 일상생활의 신앙을, 고전파 경제학이 다음과 같은 방식에 의해 해체시킨 것은 큰 공적이다. 즉 고전파경제학은 이자를 이윤의 일부로 돌리고 지대를 〔평균이윤을 넘는〕 초과분으로 돌림으로써 이 둘이 잉여가치라는 점에서 일치하게 하였으며, 유통과정을 단순히 형태의 변환으로서 서술하였고, 끝으로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상품의 가치와 잉여가치를 노동에 돌린 것이다.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의 최고의 대표자들조차〔그들의 비판에 의해 해체된〕환상의 세계에 다소간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부르주아적 입장에서는 불가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다소간 앞뒤사이의 불일치, 풀리지 않는 모순, 반쪽자리 진실에 빠졌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생산담당자들이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피상적이고 불합리한 형태에 매우 만족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러한 외관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외관과 매일 부딪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류경제학-이것은 현실의 생산담당자의 일상적인 관념을 선생인 체하면서 다소 교조주의적으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이 바로 이 삼위일체의 공식 〔모든 내적 관련이 소멸되어 있다〕에서 자기의 공허한 자만심의〔자연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토대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이 공식은 또한 지배계급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그들의 수입원천의 자연적 필연성과 영원한 정당성을 설교하며 하나의 교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일정한 생산양식인 자본과 나란히, 모든 생산양식에 공통한 토지와 노동이 아무런 추가적인 고려 없이 병렬되고 있다. 자본, 토지, 노동이 이자, 지대, 임금의 원천으로서 형상한다. 사용가치인 토지가 생산물의 가치부분인 지대를 창조한다고 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물신화가 완성되면서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착취로부터 발생하고 잉여가치가 이윤, 이자, 지대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은폐된다. 그리하여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새로이 창출, 추가한 가치가 임금, 이윤, 이자, 지대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반대로 상품의 가치가 임금, 이윤, 이자, 지대의 합계로부터 초래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완전한 전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물신성에 매몰되면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조차도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임금, 이윤, 이자, 지대를 생산에 기여한 노동, 자본, 대부자본, 토지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로 보고, 문제를 임금에 비해 이윤, 이자, 지대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에서 찾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즉, 정당한 이윤, 이자, 지대가 있는데, 이를 과도하게 벗어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앞의 인용문에서 “이 공식은 그들의 수입 원천의 자연적 필연성과 영원한 정당성을 설교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구절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상품물신성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에 이르는 물신성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전면적인 물신성은 국가물신성, 법물신성으로도 발전한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글의 분량이 길어져서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자본론 』Ⅰ~Ⅲ 권을 읽은 독자라면 곧바로 알 수 있겠지만, 이글의 서술은 『자본론 』Ⅰ~Ⅲ 권의 서술 순서를 따라 이루어졌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맑스가 상품, 화폐, 자본, 이윤, 이자, 지대 등을 규명할 때, 본질을 왜곡하는 물신성, 현상형태에 대한 폭로를 항상 병행했다는 점이다. 그 만큼 맑스는 자본주의적 범주들이 본질을 은폐, 왜곡하는 점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것을 철저히 폭로하려고 한 것이다.

때문에 맑스의 물신성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으면서도 왜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의식에 쉽게 이르지 못하는지를 밝히는 데에서 결정적인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면,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데에서 노동자들이 물신성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하는 의식의 해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5. 노동자계급의 해방에서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의식의 해방이다.

맑스의 『자본론』은, 맑스 자신의 말처럼 누구보다도 노동자들이 읽기를 바란 책이다. 『자본론』이 쉽지 않기 때문에 과연 노동자들이 읽기를 바라고 쓴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앞에서의 언급처럼 그러하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자본론』을 읽으면, 맑스는 노동자들이 물신성, 현상형태에 현혹되지 않도록,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함께 물신성, 현상형태에 대한 폭로를 끊임없이 수행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맑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자본가들이 평생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쉽게 이해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맑스는 자신이 밝힌 과학적 진실을 노동자들이 접하면 노동자들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맑스는 임금이 본질을 왜곡하는 것을 폭로하는 부분에서 “현상형태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숨어있는 본질적 관계는 과학에 의해 우선 발견되어야만 한다.”(『자본론Ⅰ』, 733쪽)고 말했는데, 이 부분은 현상형태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인식하는 데서 과학,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하는 역할을 잘 규정해주고 있다.

노동자들이 과학의 도움으로 현상형태의 배후에 숨어있는 본질을 알아채고,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고, 자신들이 숙명적으로 자본주의 아래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음을 자각하고, 자신들이 더 이상 임금노동자로 자본가에 예속되어 살지 않고,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나설 것을 결의하고 투쟁할 때 자본주의는 지금까지와 달리 더 이상 막강한 체제도 아니며, 결국 노동자의 투쟁에 의해 대체될 체제라는 것을 맑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의 해방, 과학의 도움으로 물신성과 현상형태에 매몰된 의식을 깨고 본질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에서 가장 우선적인 과제라는 것, 이점이 우리가 맑스의 『자본론』에서 끌어내야 할 실천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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