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물신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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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분량상 두편의 글로 나누어 싣는다. 이번 글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을, 2월 2일 공개예정인 다음 글(자본주의와 물신성(2))은 4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을 다룬다.

필자의 주_이 글은 다른 글들에 비해 어렵다. 정치경제학비판에서 사용하는 기본개념에 익숙하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점을 감안해서 독자들이 읽기를 바라며 양해를 구한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나오면 자본론의 색인이나 경제학 사전을 보고 도움을 얻기 바란다.

 

1. 이 글을 쓰는 이유

물신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평소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때문에 생소하게 들린다. 사회주의, 맑스주의가 폭넓게 전파되지 못해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이런 생소한 말을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매체 사회주의자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왜 한국의 진보세력은 무기력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에서 필자는 활동가들이 물신성에 빠져 있고 이로 인해 활동가들이 체제 내에서만 사고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글을 쓸 당시 필자는 이 용어를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였다. 독자들이 어렵다고 느끼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쉬운 말이 없을까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찾아보았는데 결국은 찾지 못하고, 물신성이라는 말을 설명하는 부분을 괄호 안에 넣어 덧붙이는 것으로 해서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필자가 굳이 생소한 물신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명하는 데에서 이 물신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으면서도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의식에 쉽게 이르지 못하는 현상의 이유를 정확히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자본주의사회는 노예제사회, 봉건제 사회와 똑같이 계급적 착취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임에도, 마치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하고 있는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일상적인 현상형태들 임금, 이윤, 이자, 지대 등은 착취가 이루어지는 본질을 은폐한다. 그 결과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조차도 현상에 매몰될 경우,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옥죄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물신성이다. 이 물신성은 노동자로 하여금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공격대상으로 싸워야 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즉,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이 물신성을 깨야 노동자들이 현실의 질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타파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왜 물신성이 전면화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의식의 해방이 갖는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직접적인 이유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물신성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의식의 해방에서 과학이 갖는 역할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물신성이 전면화되기 때문에 과학의 도움 없이는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없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정당이 해야 할 임무가 생긴다. 이 문제를 정확히 설정하기 위해서도 물신성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자세히 다루지 못하고 별도의 글에서 다룰 생각이지만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물신성에 대한 해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이면 물신성에서 나타나는 전도 현상(화폐물신성, 사회적 노동의 모든 생산력이 자본에 속하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당물신성, 수령물신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이를 비판하는 데에서 물신성 문제가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 역시 이번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못하지만 나중에 이를 자세히 다루기 위해서도 역시 물신성에 대한 해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 현상에 매몰되고 물신성에 빠진 사례들

앞에서 현상에 매몰되고 물신성에 빠질 경우 노동자들이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헷갈리게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렇게만 말하면 독자들 중 다수가 필자가 물신성문제를 왜 이처럼 강조하는지 아직 실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려 한다.

만약 상품의 가치는 재료비+기계 등 마모비+임금+이윤+이자+지대로 결정되고, 임금은 노동의 대가, 이윤은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제공한 대가, 이자는 돈을 빌려준 대부자본가의 대가, 지대는 토지나 건물을 빌려준 대가라고 누가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보다 ‘그렇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실제로 이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가치는 각각의 합산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품에 투하된 노동에 의해 먼저 결정되고, 여기서 재료비+기계 등 마모비를 제하고 남은 것 중 다시 임금을 제하고 남는 것이 이윤, 이자, 지대로 나뉘어서 자본가들과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노동자계급을 착취하여 자본가가 차지한 잉여가치가 나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본질은 일상적인 겉모습에 의해 은폐되고 전자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착취라는 본질은 철저히 은폐된다.

조금 더 나가보자. 일상적인 겉모습에 익숙해진 많은 사람들은 임금, 이윤, 이자, 지대를 생산에 기여한 노동, 자본, 대부자본, 토지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로 보고, 문제를 임금에 비해 이윤, 이자, 지대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에서 찾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즉, 정당한 이윤, 이자, 지대가 있는데, 이를 과도하게 벗어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노동자들조차도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데, 자본가, 대부자본가, 토지소유자가 너무나 많은 몫을 차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본론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미리 요점을 말하면 이런 생각은 물신성에 빠진 것이다. 이런 물신성에 빠진 생각은 정당한 임금, 정당한 이윤, 정당한 이자, 정당한 지대가 확립되는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라는 환상적 요구로 연장될 수 있다.

이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임금형태이다. 임금형태의 문제는 물신성문제 자체는 아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현상이 본질을 왜곡 은폐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임금형태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표현한다. 그런데 실제로 임금은 노동력의 대가이고, 이때 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이다. 그리고 이 생활수단의 가치는 노동자가 창출하는 추가가치보다 작다. 여기서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현상은 이를 은폐, 왜곡한다. 임금의 대가라는 임금형태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한 노동의 모든 대가를 받는 것처럼 나타난다. 불불노동이 사라지고 지불노동만이 남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형태에 매몰될 경우, 노동자들조차도 문제는 임금노동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낮은 임금에 있다고 생각하고, 착취는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고 자본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게 된다.

일상의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열심히 노동할수록 노동자들의 처지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력이 더욱더 커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발전하는 사회적 노동의 모든 생산력은 노동 그것에 속하는 힘이 아니라 자본에 속하는 힘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자본물신성이다. 노동자의 처지는 노동자가 더 노력하고, 생산에 더 기여한다고 해서 개선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처지는 임노동-자본관계 자체를 철폐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아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가 우선 노동의 모든 힘이 자본의 힘으로 표출되는 자본물신성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자각해야 한다.

3. 물신성의 출발, 상품 물신성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물신성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전개 발전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물신성의 출발점은 상품 물신성이다. 상품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되는 노동생산물을 말한다. 상품 생산자는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위하여 상품을 생산한다. 그리고 교환을 통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상품의 교환을 통해 생산자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생산자들이 교환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정 때문에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인 것으로 전도되어(뒤집혀) 나타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상품물신성이다. 즉, 상품생산자들이 교환을 통해서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이 과정에서 실제로는 상품생산자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임에도 이것은 뒷전으로 몰리고 마치 물건들이 자립하여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상품물신성은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사회에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상품물신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나 노예제, 농노제 사회, 미래의 자유인들의 연합체에서는 상품물신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에서는 가족구성원들이 자가소비를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것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투명하게 나타난다. 농노제 사회에서 농노와 영주 사이의 예속적 관계가 사회적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노동과 생산물은 부역과 공납의 모습을 취하고 그것들의 진정한 모습과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농노제에서 사람들이 노동의 수행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 않는다. 미래의 자유인들의 연합체에서도 상품물신성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본론Ⅰ』의 해당부분 전체를 인용해보겠다.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노동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이나 분배에서 투명하고 단순하다.”(강조는 인용자)

상품 물신성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것이 다음의 화폐물신성, 자본물신성 등 모든 물신성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물신성 전개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전면화되지만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도 부차적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부터 존재했고 이 때문에 상품물신성은 비교적 쉽게 인식된다. 즉, 물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듯한 겉모습을 취하지만 그 배후에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있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인식된다. 그러나 상품물신성에서 출발해서 물신성이 전개되면서 환상은 더욱더 전개되고, 그 결과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는 점점 더 은폐되고 본질은 점점 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자본주의와 물신성(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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