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팬더당 50주년: 빈민가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태어나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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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더당이 '어린이를 위한 무상 아침식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블랙팬더당 50주년: 빈민가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태어나다 ①’에서 이어집니다.

혹독한 대가

백인 사회의 호들갑에 비해 미국 공권력이 블랙팬더당을 소탕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백인 권력에 장악된 의회, 검찰, 법정을 이용하는 것은 특히 일도 아니었다. 블랙팬더당 활동에 불리하도록 아예 총기법을 바꾸거나(1967년 캘리포니아 ‘멀포드 법’ 통과), 경범죄와 억지 혐의만 갖고 당원들을 감옥에 쓸어 넣으면서도 고위 공직자는 고상하게 “이제 시민들이 거리에 장전된 무기를 갖고 다닐 이유가 없는 시대입니다”라고 연설하면 그만이었다. 그 결과 1969년에만 ‘팬더21’, ‘뉴헤이븐9’, ‘시카고8’라 불리는 대량 기소가 이어졌고 총 749명이 투옥되었다. 주로 불분명한 ‘음모’ 혐의가 적용되었다. 씰은 재판에서 변론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더 혹독한 대가는 FBI(연방수사국)라는 거대 공권력에 의해 아주 지저분하되 확실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1956년 이래 미국의 각종 급진 운동 조직을 노린 FBI의 ‘대파괴자정보활동(COINTELPRO)’은 1969년 공화당 닉슨 대통령의 취임에 맞춰 날개를 단 참이었다. 특히 블랙팬더당을 노린 FBI의 도청, 가짜 익명편지, 정보원 고용, 급습‧살해 시도가 횡행했다. 이로써 블랙팬더당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은 일단 모조리 잡아가둔다는 기존의 방침에서, 내분을 조장해 자멸을 유도하거나 총으로 쏴 사실상 ‘즉결처형’을 한다는 방침으로 확대되었다.

1년 만에 흑인 정보원이 3천 명 넘게 모집되었다. 그리고 1969년 12월, 그 중 한 명이 FBI에 넘긴 집 구조 정보를 바탕으로 시카고 경찰은 당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21살의 블랙팬더당 지도자 프레드 햄튼(Fred Hampton)의 집을 급습했다. 잠을 자고 있던 햄튼은 머리에만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시카고 경찰은 이 작전에서 90여발의 총탄을 쏜 걸로 조사되었으나, 처벌된 경관은 아무도 없었다. 나흘 뒤엔 L.A. 경찰이 특수기동대를 대동해 지역 블랙팬더당 사무실을 급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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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희생된 블랙팬더 당원의 장례식

그 결과 1970년에 벌써 주요 당원이 모두 감옥에 있거나 목숨을 잃은 상태가 되었다. 지도부가 가장 많은 때에도 총 천 명을 넘지 않았는데 그 중 약 300명이 기소되고 약 40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단 기록도 있다. 잇단 소송에 따른 기금과 에너지의 소모도 극심했다. 당내 활력과 의지가 함께 저하되었고, 1970년대 초가 되면 블랙팬더당의 기세는 확실히 기울어 있었다. 결국 1982년에 블랙팬더당은 공식해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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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영패트리어츠’와 ‘블랙팬더당’의 만남

특히 프레드 햄튼의 상실이 뼈아팠다. 햄튼은 블랙팬더당의 반인종주의와 반자본주의의 기치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빈곤 백인 조직(Young Patriots)과 푸에르토리코계 조직(YLO)과의 교류를 성사하고 또 이끌며 기존의 ‘흑백 통합’에 급진적 대안을 제공했다. 단순한 교류를 넘어 푸에르토리코계 지역 갱의 정치적 조직화를 돕기도 했다. 블랙팬더당이 운영한 수십 개의 사회 서비스 프로그램(‘생존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어린이를 위한 무상 아침식사’ 프로그램에서도 햄튼의 공적은 대단히 컸다. 서부에서만 3개의 ‘무상 아침식사’를 이끈 사람이 바로 햄튼이었다. 그는 가정 방문과 캠페인에 열성적으로 임하며 블랙팬더당이 ‘무상 의료 센터’의 기초를 세우는 데도 앞장섰다.

햄튼은 뛰어난 연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블랙팬더당의 기본 원칙에 대해 그는 “우리는 인종주의에 인종주의로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대로 맞설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흑인 자본주의로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로 맞설 것입니다”라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씰이 받은 불공정 재판에 항의하면서는 “혁명가를 감옥에 가둘 순 있어도 혁명은 결코 가둘 수 없습니다”라고 일갈했다. 둘 다 블랙팬더당 최고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SPOCK HAMPTON
연설 중인 프레드 햄튼

그리고 이 탁월한 지도력과 사회주의적 믿음이 FBI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말콤 엑스, 킹 목사와 함께 햄튼의 죽음은 1960년대 미국 급진 운동을 이끌던 흑인 운동의 동력을 눈에 띄게 앗아갔다. 블랙팬더당을 황폐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훗날 FBI의 햄튼 살해 작전이 세상에 알려진 뒤, 백인 사회는 FBI가 흑인 운동에 보인 작은 편집증과 흑인 급진파가 백인들에게 범한 더 큰 과오를 서로 짝지으며 얼른 사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착한 60년대’와 ‘나쁜 60년대’의 이분법도 그 한 산물이었다. 상실로 가슴이 멍든 흑인들과 달리, 백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뿐 무언가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에 사회주의로 맞서다

블랙팬더당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미국 흑인이 백인 권력에 착취되거나 경찰의 지배를 받는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자기 자신들의 조직을 갖는 것이었다. ‘분리주의’라는 흔한 매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블랙팬더당의 이 소망과 목표를 꿰뚫어 봐야 한다.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원칙으로서 블랙팬더당은 ‘10개 포인트’라 불리는 강령을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는 흑인의 “자유”와 함께 “완전 고용”, “적절 주거”, “자본가에 의한 강탈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알알이 담겨 있다.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강령은 흑인 공동체에 대한 착취와 지배의 구조를 통찰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다. 블랙팬더당이 보기에 흑인 ‘게토’는 미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부족한 일자리, 열악한 주거 시설, 불안한 월세, 비좁은 학교, 기약 없는 사회 서비스가 모두 동시대 세계지도 속 식민지들의 운명을 떠올리게 했다. 이 ‘식민지’에선 검은 피부색이 그대로 계급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블랙팬더당은 정확히 간파했다. 이들은 “거리의 형제들”을 마르크스주의 용어 그대로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휴이 뉴턴은 신문 <블랙팬더>에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나라가 노예제에 기초에 큰 부를 쌓았으며 노예제는 자본주의의 극단이란 사실을 안다. 우리가 맞서야 할 악은 두 가지, 바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다. 둘 다를 분쇄해야 한다.”

그렇다면 블랙팬더당이 흑인 공동체의 자원을 긁어모아 운영한 각종 사회 서비스 프로그램은 단순한 생존과 자조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 프로그램들은 사회주의의 실험실이자 교육과 선전의 장이었다. “모든 권력을 인민에게”라는 블랙팬더당의 대표 구호는 당원들이 아침마다 조리대 앞에 서고 만 명의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눈 ‘무상 아침식사’의 현장에서, 그리고 무료로 검진과 예방치료를 실시하고 이제는 보편화된 ‘건강권’ 개념을 설파한 ‘무료 의료 센터’ 현장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비록 조직 노동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약해 자본주의 체제에 직접 타격을 주는 파업이라는 위력에 가닿지 못한 한계가 있으나(이 부분에서 미국 공산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블랙팬더당에 연대를 표하지 않았고 FBI의 ‘대파괴자정보활동’에 먼저 희생된 상태였던 점이 아쉽다.), 블랙팬더당이 반자본주의, 계급투쟁, 사회주의의 노선을 취했단 사실은 지금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져야 한다.

블랙팬더당의 유산은?

주먹을 치켜들어 '블랙파워'를 표현하는 흑인들
주먹을 치켜들어 ‘블랙파워’를 표현하는 흑인들

블랙팬더당은 ‘매카시즘’의 반공주의 광풍이 휩쓸고 간 1960년대의 미국 사회에도 아직 좌파적 사고와 행동이 살아 있었고 또 새롭게 탄생하고 있었다는 빛나는 증거다. 특히 당시 세계사를 뒤흔든 식민지 해방 투쟁들에 즉각 공감과 연대를 표한 이들의 태도는 지금은 많이 약해진 좌파의 국제주의적 시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블랙팬더당은 여성과 동성애자가 또 다른 피억압 집단이라는 문제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실천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여성 당원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미국 성소수자 운동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스톤월 항쟁’의 1주기를 기리면서는 동성애자를 자신들의 연대 대상이자 “가장 혁명적인 집단”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블랙팬더당의 젠더 문제는 활발한 연구와 논쟁의 소재인 만큼 별도의 지면을 들여 논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블랙팬더당은 도시 빈민가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미국 흑인들만의 싸움을 벌이면서도, 그 싸움이 더 깊은 뿌리와 더 큰 질서를 겨냥할 때 진짜 승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들의 시야는 모든 미국인에게 미국과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블랙팬더당을 “국내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지목한 FBI 국장 에드거 후버의 발언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블랙팬더당을 박멸하기 위해 FBI가 벌인 각종 범죄 행각은 닉슨 대통령의 ‘워터 게이트’에 휘말리며 결국 백일하에 드러났다. 미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본색도 함께 드러난 순간이었다. 블랙팬더당이란 이름은 바로 이 점에서 미국의 치부로 남아 있다.

2016년 현재, 오바마 정부의 FBI는 여전히 미국 무슬림 집단과 흑인 활동가들을 무단으로 감시하고 ‘테러’ 사건을 조작하는 ‘대폭력극단주의(CV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대부분이 일흔 살을 넘긴 블랙팬더당 전 당원들은 여전히 열성적인 활동가로 남거나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경우가 많지만, 안타깝게도 또 많은 경우가 수십 년간의 모범적인 수감 태도와 일관된 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석방이 거절되고 독방감금에 시달리는 특급 장기수이자 사실상의 정치 수감자로 남아 있다.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이 가장 유명한 경우다.

결국 블랙팬더당의 유산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블랙팬더당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선 50년 전 블랙팬더당이 분노한 현실과 그들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이 5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고통과 억압으로 되풀이되고 있는지가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익히 알려진 그들의 한계와 결함에 대해서도 더욱 균형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앞으로 블랙팬더당의 유산은 미국의 후대 활동가들이 자신의 공동체, 미국, 세계를 어떻게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50년 전 블랙팬더당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행동만이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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