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팬더당 50주년: 빈민가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태어나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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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더당 로고

혁명은 현실의 단단한 뿌리를 공략하며 시작을 알린다. 전체를 뒤흔들 수 있고, 그래서 과격하다. 꼭 물리력이 동원될 필요는 없다. 기득권에 맞서 서로 어깨를 걸고 죽음도 불사하겠단 태도만 보여도 상대는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혹독한 대가가 뒤따른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탄생한 흑인 운동 조직 ‘블랙팬더당(Black Panther Party, 흑표범당)’이 딱 그런 경우였다.

bpp-logo-4창당 50주년을 맞아 올 한 해 미국 여기저기서 블랙팬더당의 이름이 발음되었다. 공영방송사 PBS는 <블랙팬더당: 혁명의 전위>라는 파격적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전국에 방영했고, 인기 흑인 가수 비욘세는 블랙팬더를 연상시키는 복장의 댄스팀을 이끌고 미국 최대 스포츠 축제인 ‘슈퍼볼(프로미식축구 결승전)’ 무대에 올랐다.

이러한 기념만상엔 최근 경찰의 인종주의적 폭력에 맞서 미국 흑인 사회에 번진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이 블랙팬더당에 대한 집단기억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측면이 크다. 다만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은 블랙팬더당을 공공연히 기념하는 것이 미국 사회의 오랜 금기라는 점이다. 미국 교사커리큘럼협회가 펴낸 교과서 <살아 있는 역사!: 미국>이 블랙팬더당을 두고 “전투 전략과 폭력 사용을 신봉”했으며 “백인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분리된 흑인 민족 건설을 논했다”라고 서술한 걸 보면 그 이유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PBS와 비욘세도 결국 역풍을 맞았다.

한국인에겐 블랙팬더당이란 이름부터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도 검은 일색으로 차려입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거리의 무법자, 이단아, 마초라는 오명 정도로 알려졌을 터다. 이러한 이미지는 위의 교과서 서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 활동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는 법이다. 모두 일정한 역사와 사회의 맥락 안에서 평가되어야 하며, 그래야지만 오명에 가려진 해방적 힘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진지한 역사가들은 블랙팬더당이 당대 사회운동의 대의에 훼방을 놓거나 소동만 피우고 스러진 조직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블랙팬더당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국에서 가장 대담하고 파급력 있는 조직이자, 흑인 운동을 넘어 전체 급진 운동을 이끈 전위대였다. 블랙팬더당은 백인 중심의 신좌파 조직들에 당당히 연대를 요구하며 이들의 급진화를 유도했고, 미국 정부를 아찔하게 만든 미국 내 선주민‧푸에르토리코계의 해방 운동 부흥에도 촉매제가 되었다. 전설적인 ‘디트로이트 혁명적 흑인노동자동맹’이 결성되는 데도 영감을 주었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세계 각지의 식민지 투쟁에도 조건 없이 연대했다. 그밖에 이들이 당대 어떠한 조직보다 인종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폭력을 예리하게 통찰했단 증거는 풍부하다. 이번 글에서는 블랙팬더당의 탄생과 그에 대한 미국 공권력의 대응을 중심으로 미국사에서 블랙팬더당의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폭력 민권 운동’에서 ‘블랙파워’로

1960년대 미국 흑인 운동을 이야기하려면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말콤 엑스(Malcolm X)라는 두 이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둘 모두 당대 흑인 운동의 성과는 물론, 내적 긴장과 노선 변화를 대표하는 걸출한 지도자다.

먼저 영향력을 발휘한 쪽은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이었다. 킹 목사는 남부기독교지도회의(SCLC)의 종교 지도자로 출발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자유 기수(Freedom Riders)’, 투표권 운동 등을 이끌며 전국적 흑인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의 비폭력 노선과 온화한 카리스마는 민주당의 지지를 얻는 데도 성공했고, 이 결탁은 민권법(1964년)과 투표권법(1965년)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흑인의 시민권과 참정권이 마침내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리고 승리 분위기가 높던 1966년 6월, 미시시피의 흑인 대학생 제임스 메리디스(James Meredith)가 흑인의 법적 평등을 넘어 완전한 인종주의의 철폐를 요구하며 ‘공포에 대항한 도보 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행진 이튿날 한 백인에게 저격되었다. ‘공포’가 만연한 현실을 온몸으로 폭로한 셈이다. 이 황망한 소식에 전국에서 달려온 흑인 지도자‧활동가‧자원자들이 다함께 메리디스의 남은 행진 구간을 이어가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백인과 경찰의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연설 중인 스토클리 카마이클
연설 중인 스토클리 카마이클

이 아수라장에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의 의장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ley Carmichael)이 경찰 연행에서 풀려나자마자 저 유명한 ‘블랙파워(흑인 권력)’ 연설을 하게 된다. “저는 지금껏 27번 연행됐으나 앞으론 연행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바로 블랙파워입니다!” 사실상 비폭력 전술에 끝을 알린 이 사자후로 ‘블랙파워’는 전국적 구호가 되었다. 미국 흑인 운동의 시류는 이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게토’의 새로운 흑인 정체성

‘블랙파워’의 부상이 비단 메리디스의 피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권 운동이 승리를 구가하는 동안 미국 흑인이 맞은 진짜 현실은 대통령의 민권법안 서명보다는 다음의 통계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었다. 1961-66년 동안 백인 극단주의자가 흑인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한 사례가 5배 증가했고, 처벌 기록은 없다시피 한 것이다. 투표권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블랙파워’ 구호가 전통적 흑인 거주지인 남부가 아니라 새로운 흑인 거주지가 된 서‧북부 대도시에서 큰 호응을 얻었단 점도 중요하다. 이 상황은 2차 대전 이후 재편된 미국의 경제 구조를 직접 반영한다. 2차 대전 시기에 미국 흑인은 군수공장의 일자리를 좇아 대거 도시로 이주했다. 그 결과 1940년에 흑인 절반이 도시에 살았다면 1970년엔 4분의 3이 도시 거주자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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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흑인 빈민가의 모습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일자리는 증발했다. 내팽개쳐진 흑인 노동자들은 ‘슬럼’이라 불리는 도심 속 빈민가를 이루었고, 백인 중산층은 교외로 빠져나가 전후 호황을 만끽했다. 흑인 빈민가에선 실업과 함께 범죄율이 치솟았다. 여기에 ‘백색 국가’는 더 단단한 봉쇄와 경찰력 증대로 응답했다. 빈민가 흑인들은 자신들의 동네가 백인 거주지와 완벽히 분리된 채 다만 경찰의 침공지이자 사냥터가 되었을 뿐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그곳을 유대인 격리지에 비유해 ‘게토’라고 불렀다. 전국의 이 ‘게토’들에서 완전히 다른 흑인 정체성이 배태되고 있었다.

실제로 1965년 여름, L.A. 와츠에서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현장으로 달려간 킹 목사는 미국 흑인의 새로운 정치 에너지와 당혹스럽게 조우해야 했다. 킹 목사가 비폭력 전술에 대해 연설하는 중간중간 야유가 터져 나왔고, 누군가는 “니그로들은 손을 모아”라는 킹 목사의 말을 받아 “불태워야 한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도시 빈민가에서 비폭력 민권 정치가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블랙팬더의 반격

흑인 폭동은 와츠에서 다른 도시들로 번져나갔다. 미국 경찰이 다음 폭동 예상 지역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동안, 당하고만 있지 않기로 결심한 흑인 청년들 사이에선 새로운 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제2의 와츠’로 경찰의 특별관리를 받던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절도차량을 몰다 도주하던 흑인 소년이 등에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블랙팬더당의 결성을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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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말콤 엑스의 유명한 사진

1966년 블랙팬더당은 오클랜드 빈민가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태어났다. “이제 거리로 나갈 준비가 됐다”라고 선언하며 대학가 흑인 운동 조직과 결별한 휴이 뉴턴(Huey Newton)과 바비 씰(Bobby Seale)이 그 주역이었다. 처음부터 블랙팬더당은 바로 그 1년 전 암살된 말콤 엑스의 후예를 자처했다. 생전에 말콤 엑스는 자신이 몸담은 미국 흑인 무슬림 조직의 급진적 태도를 더욱 혁명화하면서, 비폭력 민권 운동에 실망한 도시의 젊은 흑인들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다음의 연설이 그의 혁명적 노선을 잘 요약한다. “코란에는 고통을 평온히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 종교는 총명해지라고 가르칩니다. 평온해라. 공손해라. 법을 지켜라. 모든 사람을 존중해라. 그러나 누가 너에게 손을 대거든 그를 무덤으로 보내버려라.” 어떻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말콤의 정신을 이어받은 블랙팬더당은 더 이상 민권 운동과 민주당의 손에 흑인 해방의 과업을 맡기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거리의 형제들”을 조직해 손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한 정치였다. 블랙팬더당이 채택한 블랙팬더(흑표범)의 상징이 그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준다. 당시 젊은 흑인들 사이에서 블랙팬더는 절대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으며 막다른 곳에 몰리고 나서야 사활을 건 반격을 시작하는 힘과 인내의 동물로 통했다.

블랙팬더당이 가장 먼저 조직한 ‘반격’은 경찰 순찰 활동이었다. 당원들이 거리를 순찰하다 경찰이 흑인을 잡아 세우는 장면을 목격하는 즉시 현장에 밀착해 경찰의 행동거지를 감시하는 방식이었다. 그냥 지켜보는 걸로는 부족했다. 경찰이 함부로 총을 못 놀리게 효과적인 압박을 하려면 당원들의 손에도 총이 들려있어야 했다. 그들은 기꺼이 총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블랙팬더당의 모든 안 좋은 꼬리표가 만들어졌다.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몰려다니는 젊은 흑인들, 주먹을 치켜드는 의례로 국민의례를 대신하는 반국가 세력, 백인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 같은 검은 가죽 자켓과 베레모… 이 모든 모양새도 꼴 사운데 총까지 들다니. 더 말 할 필요가 없었다.

‘통합 대 분리’ 이분법을 넘어

총을 든 블랙팬더당의 이미지는 흔히 민권 운동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미지와 대조되며 지탄을 받는다. 미국 흑인 운동에 관한 많은 서술이 ‘좋은 60년대’와 ‘나쁜 60년대’를 구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자가 킹 목사의 시대라면 후자는 ‘블랙파워’와 블랙팬더당의 시대라는 식이다. 또 전자는 ‘아메리칸 드림’에 걸맞은 ‘흑백 통합’의 정치이자 성공한 운동이고, 후자는 ‘흑인 분리주의’의 정치이자 결국 패퇴한 운동이라는 인식도 팽배하다. 일종의 타락 서사다.

그러나 저술가이자 활동가인 마이크 마커시(Mike Marqusee)가 말하듯 ‘블랙파워’ 운동은 민권 운동이 도달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자 “막 시작된 백인 반동의 원천인 동시에 그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미국 흑인 사회는 좌절감이 깊어지고 여러 입장이 뒤엉키는 와중에도 돌파구를 찾길 포기하지 않았단 평가부터 받아야 마땅하다. 예컨대 유명 흑인 음악가 니나 시몬(Nina Simone)이 킹 목사에게 다가가 “나는 비폭력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때 킹 목사는 “괜찮습니다, 자매님. 당신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대화가 당대를 살던 미국 흑인들에게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통합 대 분리’, ‘비폭력 대 폭력’ 같은 이분법은 킹 목사가 암살되고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선출된 1968년을 뚜렷한 기점으로 미국 사회가 민권 운동의 대의를 빠르게 배신한 책임을 반동 세력이 아닌 흑인 사회로 돌리는 격이다. “민권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일부 백인들이 도시 폭동과 블랙팬더당에 기겁하면서 결국 쇠퇴했다”라는 미국 교과서 <미국인(The Americans)>의 서술이 딱 그 전형을 보여 준다.

총을 든 새로운 흑인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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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더 당원들

기존의 이분법을 거부한다고 해도 ‘총’을 제쳐 놓고 블랙팬더당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왜 총을 들었고 실제 어떻게 사용했는지부터가 엄격히 따져져야 한다. 이 경우 블랙팬더당은 ‘자기방어’와 ‘생존’의 수단으로 총을 택했고, 총기 사용 가능성을 공표했을 뿐 그것을 주요하거나 무분별하게 사용하진 않았으며, 총이 동원된 활동이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실제로 블랙팬더당은 “순수한 전투 목적”의 총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 더욱이 총기 소지의 자유는 미국 헌법에 명시된 권리고, 당시 캘리포니아에선 장전된 총을 겉으로 보이게 들고 다니는 것 역시 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확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는데, 바로 흑인에게 총을 드는 행위 자체가 강렬한 해방과 정치 참여의 기회로 경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흑인이 총을 든 채 경찰의 행동을 감시한단 발상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본래 미국 사회의 통념은 흑인이 불법을 일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집단이기에 경찰의 단속과 선도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그러나 블랙팬더당은 거꾸로 경찰을 그렇게 불렀다. 게다가 똑같이 총도 들었다. 그동안 폭력과 정의구현은 오직 백인만의 정치였는데 거기에 균열을 낸 것이다.

그렇다면 백인 사회가 블랙팬더당에게 느낀 공포는 그들의 총이 아니라 백인과 맞먹으려는 그들의 태도를 향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블랙팬더당이 눈에 띄는 아무 백인이나 경찰을 쏘고 다녀서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협박되지도 않았다. 씰이 자서전에서 회고했듯 문제는 딱 이것이었다. “감히 총을 뽑을 순 없을 걸?”

이 상태에서 총을 든 흑인 자화상의 등장은 흑인 공동체에 새로운 정치 해방구를 열어 젖혔다. 가령 블랙팬더당 순찰대는 언제나 총과 법전을 함께 소지했는데, 이 점은 이들의 무장이 경찰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게 아니라 법을 준수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임을 특히 잘 말해 준다. 블랙팬더당의 총은 흑인 어린이들을 위해 건널목에 신호등을 설치해 달라는 자신들의 요청을 교통 당국이 무시하자, 앞으로 직접 차량을 통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뒤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적처럼 신호등이 설치되는 광경을 모든 흑인 주민들은 생생하고도 신선하게 목도했다. 그밖에 총을 든 블랙팬더당의 모습은 흑인 학부모 시위대나 경찰 희생자 유가족을 경호하기 위한 이런저런 현장들에서 목격되었다. 블랙팬더당의 총이 미국 흑인 공동체의 정치 참여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블랙팬더 당원들

특히 젊은 흑인들은 블랙팬더당이 총으로 무얼 하려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당원들이 캘리포니아 주 의사당 로비에 난입해 총기법 개정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낭독한 사건으로 블랙팬더당의 존재가 전국에 알려진 1967년 당시, 미국의 법 집행자와 언론이 뜨거운 비방전을 펼치는 동안 당 사무실에는 젊은 흑인들의 가입 신청서가 쏟아졌다. 절정기에 블랙팬더당은 전국에 5천 명의 당원과 45개의 지부를 두었고, 자체 발행 주간 신문 <블랙팬더>는 일주일에 25만 부가 판매되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여론조사를 실시한 언론사들도 블랙팬더당의 수수께끼 같은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 <ABC TV>가 전국 흑인 여론을 조사한 결과, 가장 명성 높은 흑인 조직을 묻는 질문에 블랙팬더당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세 번째로 많았다. 이미 흑인 사회의 거목으로 자리 잡은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와 킹 목사의 남부기독교지도회의(SCLC)를 바로 뒤이은 순위였다. 이 셋 중 앞으로 영향력 확대가 기대되는 조직으로는 블랙팬더당이 유일하게 꼽히기도 했다.

 

‘블랙팬더당 50주년: 빈민가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태어나다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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