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에서 파업이?: 자동화와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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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AURIZIO GAMBARINI/AFP/Getty Images]

“제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잠시 유행하다가 이제는 주춤해졌다. 그렇지만 자동화와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이로 인해 사람들이 겪게 된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잖이 거론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기술이 우리 삶과 생산현장에 속속들이 도입될 것이 높게 예측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의 기술 진보와 관련해서는 바퀴의 발명이 스마트폰의 등장보다 훨씬 더 혁명적인 충격을 가져왔다고도 하지만, 우리가 직접 겪고 있는 변화이다 보니 지금의 변화가 과거의 기술 진보에 비해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자동화와 관련되어서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자동화는 노동자의 고용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맑스는 “노동수단은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로 된다”고 했는데, 자동화가 바로 이런 경우인 셈이다. 이를테면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결합된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 무인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단순히 기계작동을 감독 관리하는 역할만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한 예로 저임금 노동을 이용하기 위해 수십 년간 해외에 생산 공장을 두었던 독일의 스포츠 용품 기업 아디다스는 최근 독일 내에 새로운 공장을 세우기로 했는데, 이 공장은 대부분의 공정이 자동화되어 160명의 노동자로 운영될 예정이다. 자동화는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고 이로써 노동비용을 감소시켜서 해외로 빠져 나갔던 제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화는 독일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공유경제를 표방하면서 등장한 ‘우버’(Uber)는 자동차 소유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으로 출발했지만, 우버 택시 운전자들의 불만과 노조결성 시도, 기존 택시업계의 반발 등 인적 요인들이 사업에 지장을 주자,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적극 뛰어 들었다. 우버는 자동차업체 볼보와 제휴하고 관련 기업을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고, 미국 피츠버그 시에서 자율주행 택시 시범 운행에도 들어갔다. 우버의 자율주행 택시는 일자리 100만개 이상을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자동화의 충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 연구는 향후 수십 년 내에 엄청난 수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발표된 컨설팅 기업 맥킨지의 연구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세계적으로 최대 8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고, 미국에서만 3천9백만 개에서 7천3백만 개의 일자리가 자동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자동화에 대한 여러 전망들

기술 진보는 인류 역사에서 계속 일어난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가속화됐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경쟁하여 살아남아야 하는데, 기술혁신은 신기술을 먼저 도입하는 자본가에게 다른 자본가들보다는 더 큰 잉여가치, 이른바 ‘특별잉여가치’를 가져다준다. 이것은 그 자본가가 다른 경쟁자에 비해 우위에 서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필자는 올해 초 「4차 산업혁명이 아닌 생산관계의 혁명이 필요하다」라는 글에서 “끝없는 기술혁신은 자본주의 자체의 본성”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계속 발전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발달은 자본의 역사적 사명이며 자본의 정당화의 근거”(『자본론』 3권)라고 말한다. 이런 자본주의의 속성에 비추어볼 때, 자동화와 이로 인해 기계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일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났고, 그래서 맑스 역시도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그 기술이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것이라는 식의 환상과 과대평가가 반복해서 일어난다. 20년 전 ‘IT혁명’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요즘 거론되는 자동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기술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수년 사이 자동화를 두고 디스토피아적 관점과 유토피아적 관점이 모두 등장했다.

자동화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은 주로 실리콘 밸리 자본가들처럼 기술혁신을 주도한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갑자기 인도주의자의 탈을 쓴 채 자신들이 주도한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가 어려움에 처한다는 점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나 고급 전기자동차 제작업체 테슬라의 CEO 엘론 머스크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공히 자동화가 발생시킬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자동화로 인해 자신들은 더욱 부자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실업에 내몰릴 것인데, 이것은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니 저들에게 돈이라도 좀 쥐어줘서 살도록 하자는 식이다.

반면 자동화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점은 자동화가 병폐로 찌든 현재의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노바라 미디어(Novara Media)”를 운영하는 애런 바스타니는 자동화의 급속한 발달을 너무 좋게 본 나머지, “완전히 자동화된 럭셔리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자동화에 의해 기존에 노동자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매우 적은 시간만을 노동해도 돼 탈노동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스타니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자동화로 인해 “주 10-12시간 노동, 사회적 임금 보장, 주택·교육·건강 등의 보편적 보장” 등이 실현되어 모든 사람들이 ‘럭셔리’한 삶을 사는 사회이다. 그의 공산주의는 단순하다. 바로 “모든 것의 완전한 자동화와 자동화된 것의 공동 소유”이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자동화된 로봇이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세상이 오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고 이를 위해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둘 다 기술로 인한 변화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자동화로 노동이 사라진 사회는 환상에 불과하다. 또한 위의 두 관점은 모두 기술 자체를, 다른 모든 요인이 그것에 순응해야만 하는 절대불변의 상수로 놓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요인은 빠져있다.

[사진: Bloomberg]

아마존: 노동이 사라진 공장이 아니라 노동 착취 공장

자동화로 인해 노동의 큰 변화가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생산에서 근본적 변화가 있기는 어렵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비용을 절감한다 해도 결국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동화로 인해 특정 일자리는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 있겠지만, 생산 규모가 축소되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한 다른 부문이 그 일자리를 대체한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맥킨지 보고서는 1980년대 PC의 등장으로 사라진 일자리도 있었지만 185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동화된 공장이 되면 노동자의 노동강도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노동의 형태도 감독노동 정도로 변화한다는 것도 큰 환상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기계의 도입이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시간 증가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맑스의 『자본론』에서조차 이미 강조되었던 내용이다. 인공지능 스피커와 자동화된 물류시스템 등 혁신으로 유명한 ‘아마존’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마존은 실제 기존의 다른 공장과 다를 바 없이 노동자를 착취해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 더욱이 자동화,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새로운 기술은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는 유럽에 진출한 아마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이 일어났다.

독일 6곳, 이탈리아 1곳, 총 7곳의 아마존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한창 성수기인 11월 24일 “블랙 프라이데이”에 맞춰 파업에 들어갔다. 엄청난 노동강도와 저임금, 부당한 비정규 노동자 처우 등에 저항하는 내용이었다. 영국 언론 『미러』는 기자 한 사람을 런던 근교에 있는 아마존의 물류창고에 2주간 몰래 취업시켜 열악한 노동실태를 생생하게 폭로했다. 30초마다 박스 하나씩 포장하고 시간 당 85개에서 120개의 박스를 트럭에 실어야 하는 이곳에서는 자동화된 설비가 노동자가 할당량을 채우는지 안 채우는지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또한 엄청난 노동강도에 노동자들은 작업대에서 서서 졸고, 졸도하는 노동자가 빈번하게 발생해서 앰블런스가 상시대기 중이었다. 잠입 취재한 기자는 올 여름 마라톤 풀 코스 두 번, 하프 코스 한 번을 소화한 사람이었지만, 체력이 다 고갈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기자는 “매번 인간인 직원이 가축으로 전락하여 오직 기계에 부림당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아마존은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취급하여 더 많은 돈을 번다”고, 마치 『자본론』을 읽어본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19세기 중반 자본주의의 기계도입을 설명하면서 “공장에서는 기계가 노동자를 사용”하며, 노동자가 생명 없는 기계의 “살아있는 부속물”이 된다고 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이 문제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과 생산력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힘으로 여겨진다. 기술이 이렇게 여겨지는 것은 자본가계급에게도 유익하다. 발전하는 기술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들이밀면서 사실상 자신의 지배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의 박애주의적 자본가들 이면에 놓인 사고가 이런 것이다.

그런데 기술은 그것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의 집단적 능력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필요에 맞는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이 노동인데, 자연의 속성에 대한 이해 정도가 향상되고 이를 통해 자연을 더 잘 이용하게 되면 될수록 인간의 생존능력은 더욱 증대한다. 기술, 생산력은 바로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이런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개인들 자체의 능력들의 발전”이라고 파악했다. 요컨대 기술, 생산력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향상시키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집단적으로 발전시켜 온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이 그것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이를 정도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이 생산력의 발전은 재차 말하면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인간의 집단적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안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이뤄낸 결과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생산을 지배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자본에 편입되어 버리며, “노동자가 협업에서 발휘한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처럼 된다(『자본론』 1권). 결국 “사회적 노동의 모든 생산력은 노동 그것에 속하는 힘이 아니라 자본에 속하는 힘으로서, 즉 자본 자신의 태내에서 생겨나는 힘으로서 나타난다.”(『자본론』 3권) 이로서 노동자 자신이 발전시킨 생산력은 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부터 독립되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자본의 힘으로 뒤바뀌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력 역시 물신성을 띠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신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성두현의 「자본주의와 물신성」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러한 생산력 물신성 때문에,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이 아닌 다른 식의 기술 이용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이 기술 그 자체인 것처럼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을 비판하는 사람은 기술의 발전을 반대하는 “사회적 진보의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기술 발전이 자신의 삶을 더욱 옥죄는 수단이 아니라 진정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의 자본주의적 이용 자체를 변혁하고 기술을 자신을 지배하는 낯선 존재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집단적 힘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에 대한 통제와 운영을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맑스는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악당 빌 사이크스의 대사를 인용하여 자본주의적 기술 이용을 설명한다. 사람 목을 자르기로 유명한 악당인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 행상인의 목은 잘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칼의 죄입니다. 이러한 일시적으로 불쾌한 일 때문에 과연 우리가 칼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 칼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우리를 야만상태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이 악당의 말처럼 사람을 죽인 것은 칼인가? 아니면 칼을 쓴 사람인가? 처벌받아야 할 대상은 칼인가? 아니면 칼을 쓴 사람인가? 이에 대한 답은 그 누구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농민의 자식이라는 성장배경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을 싹 트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회원. 번역서로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2012), 『마르크스의 생태학』(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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