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정치개혁에 대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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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참여연대]

국회 내 군소정당들 사이에서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인 정당은 정의당이다. 일찍이 노회찬 전 의원은 생전에 “선거제도만 바꿀 수 있다면 나는 평생 국회의원을 안 해도 된다”고 할 만큼 선거제도 개혁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 유지를 이어받은 정의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당력을 쏟아 붓고 있다. 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담당할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위원장에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내정된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다. 민주평화당과 바른미래당도 선거제도 개혁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요컨대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지난 8월 말 당 워크숍에서 “당운을 걸고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며 “평화당이 선도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꼭 쟁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또한 취임 일성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원외에서도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미 지난 2016년 총선 무렵부터 진보를 자처하는 노동당, 녹색당, 민중당이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를 결성하여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에서 무려 570여개 시민단체가 ‘정치개혁공동행동’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선거제도 개혁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비례민주주의연대’가 있다. 녹색당 창당의 주역이자 ‘선거제도개혁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하승수 변호사가 공동대표로 활약하는 비례민주주의연대는 국회와 연관된 각종 토론회와 교육, 거리 캠페인 등을 주도하며 선거제도 개혁의 실질적인 전략 단위 노릇을 하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의 초점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원내외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공통된 요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지금처럼 지역구를 기반으로 선거를 치르되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비례하여 최종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제도를 이른다. 유권자 1인이 2표를 행사하여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는 현행 국회의원 선거가 민의를 비례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서 비롯된 요구이다. 즉 현행 선거에서는 정당득표율 30%인 정당이 지역구 선거에서는 의석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반면 지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처럼 정당득표율 13%를 얻고도 의석수는 3%(총10석)에 그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 때문에 무더기로 사표(死票)가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한 사표(死票)가 평균 52%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득표율과 의석수가 비례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몇몇 나라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이 주목하는 것은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인데 절차가 꽤나 복잡하다. 먼저 유권자는 1인 2표를 행사한다. 1표는 정당에, 또 다른 1표는 지역구 후보자에 투표한다. 여기까지는 한국의 선거제도와 비슷하다. 하지만 당선자를 결정하는 방식에서는 지역구 당선자와 비례대표 당선자를 따로 뽑는 한국과 달리 독일은 먼저 주 단위로 정당투표 결과를 집계하고 그 득표율에 비례하여 전체 의석수를 각 정당에 배정한다. 그런 뒤 각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수와 비례대표 당선자 수를 연동하여 그 합이 정당별 배정 의석수와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가령 어느 주의 소선거구가 50석이라면 비례대표 의석수도 50석이 되어 총의석수는 100석이 된다. 이때 만약 A 정당이 ‘정당 투표’로 30%를 득표했다면 일단 총의석 100석의 30%인 30석을 우선 배정받는다. 그런데 지역구에서 20석을 확보했다면, 30석에서 20석을 뺀 10석이 비례대표 의석수가 된다. 같은 원리로 지역구 당선자가 10명이라면 비례대표 당선자는 20명이 된다.

정당득표율로 배정된 의석수 안에서 지역구 의석수와 비례대표 의석수가 서로 연동되는 독일식 선거제도는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이상적인 선거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원내 5석의 미니정당으로 의석점유율(1.67%)보다 정당지지율(10%안팎)이 훨씬 높은 정의당 입장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다음 총선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상적인 선거제도로 여겨질 만하다. 박근혜 탄핵 후 대중적 기반이 무너진 자유한국당의 텃밭을 잠식하려는 바른미래당이나 호남 토호세력의 권토중래를 꿈꾸는 민주평화당의 처지에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나쁘지 않은 선거제도이다. 수십 년 간 지속된 거대양당 구조를 비판하며 다당제를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 이들의 선거공학적 속내가 연동형비례대표제로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들은 2020년 총선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이 개헌보다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제로 도입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먼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장점인 비례성을 제대로 살리려면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1대 1 정도로 맞추어야 한다. 전체 의석이 300석이라면 150석 대 150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역 지역구 의원 100명이 자신의 선거구를 폐지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지역구 의석은 그대로 두고 비례대표 의석수만 250명으로 대폭 늘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총 의석수가 500석이 된다. 국회의원 세비 몇 푼에도 민감한 한국의 대중적 정서는 이를 용납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의 전제인 비례의석 증원부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의당은 국회운영비 총액은 묶어둔 채 비례대표 의석만 50석 늘리는 타협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의석 확대로 비례성의 문제가 해결될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2020년 총선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내년 3월 이전에 국회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합의안은 올해 12월 이전에 나와야 한다. 일정이 촉박하다. 하지만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양당 모두 겉으로는 선거제도 개혁에 동의한다면서도 민주당은 논의 자체에 소극적이고, 자유한국당은 정의당의 교섭단체 지위 상실을 이유로 심상정 의원의 정개특위 위원장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은 개헌 논의를 선거제도 논의에 패키지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선거법 개정안 상정 자체를 막으려는 자유한국당의 전략일 수 있다.

이에 대해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민중당, 녹색당, 우리미래 등 원내외 정당들과 57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정치개혁공동행동은 지난 10월 2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서 “거대양당이 책임 있는 태도로 선거제도 개혁 논의에 임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이날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모여서 합의안을 만들 수 있다”며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압박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대로 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활발히 이뤄질 지는 미지수다. 선거법 개정의 동력은 ‘의지’가 아니라 ‘이해득실’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2020년 총선에 새로운 선거제도가 적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치권에서 “선거제도 개혁이 개헌보다 어렵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상적인 선거제도인가?

그럼에도 정의당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은 “문제는 선거제도”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목을 매고 있다. 명분은 그럴 듯하다. 비례민주주의연대 측 설명에 따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을 포함한 다종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바람과 요구가 정치권에 제대로 반영”되는 선거제도라 한다. 말하자면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정당,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정당, 청년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출현하여 각계각층의 요구를 정치권에 제대로 반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가히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이상적인 선거제도인 셈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한국당이나 민주당 같은 기득권 거대정당이 과반 의석을 쓸어 담는 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정당이 군소정당으로 쪼개진다고 해서 의회정치의 수준이 높아지거나 계급적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평화당이나 바른미래당 같은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는 다당제 하에서 각 정치세력은 연립정권 구성을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비례민주주의연대의 설명처럼 다종다양한 요구를 대변하는 군소 정당들이 원내에 진입하게 되더라도 기대할 건 없다. 그럴 경우에도 다양한 민의가 반영되기보다는 정규직노동자당과 비정규직노동자당이 노동정책을 놓고 대립하고, 청년당과 중년당이 일자리를 놓고 다투며, 알바당과 자영업자당이 최저임금을 놓고 갈등하는 분열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만만찮다. 요컨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는 지역구 당선자 수가 정당득표 의석수를 초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가령 정당득표율로 총 10석을 배정받은 정당이 지역구에서 15석을 차지했다면 이 중 5석은 초과의석이 된다. 또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석도 곧바로 초과의석이다. 따라서 비례대표 의석수가 수시로 늘어난다. 결국 초과의석을 제한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장치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 더구나 이런 장치가 녹색당이나 노동당처럼 정당득표율이 낮은 원외정당의 원내 진입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한편 늘어난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자질 문제도 거론된다. 부패한 거대정당 내에서 비례대표 공천이 돈으로 거래되는 일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는 더 자주 일어날 수 있음을 자유주의 논객들도 문제로 지적한다.

[사진: 연합뉴스]

문제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선거제도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모두 극복하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정치 상황에서는 몇몇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될 뿐, 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삶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 총선에서 정의당이 연동형비례대표제 덕분에 30석 가량을 얻어 원내교섭단체가 된다 한들 지금보다 더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뚜렷한 이념도 없고 강령도 모호하며 정책도 부실한 정의당으로서는 오히려 증대된 권력욕으로 기존 보수 양당의 행태를 한층 노골적으로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녹색당이 의석 몇 개를 얻는다 하더라도 빈약한 정책 능력이나 생태 의제 발굴 능력이 갑자기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정당들이 “문제는 선거제도”라는 슬로건에 몰두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함을 선거제도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사실 “문제는 선거제도”라는 슬로건은 자유주의자들의 선전에 불과하다.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좋은 선거제도가 도입되어도 대중의 ‘다양한’ 요구가 관철되는 국회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선거제도만 바뀌면 ‘좋은’ 정치가 탄생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자유주의적 환상이 진보적인 의제로 위장되어 자영업 몰락이나 고용불안정, 온갖 불평등과 차별 등 심각한 사회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적 착취질서를 외면하는 정치개혁은 허울일 뿐이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해줄 이상적인 선거제도 따위는 없다.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세력의 선거제도 개혁 캠페인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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