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파괴에 맞선 8년간의 투쟁, 유성기업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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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마이 뉴스]

유성 노동자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5.18, ‘노조파괴’

2011년 5월 18일, 유성기업 노조는 2009년 사측과 맺은 야간노동 폐지, 주간연속 2교대제 합의에 따른 시행을 요구하며 부분파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사측은 저녁 8시 신속하게 직장폐쇄로 대응하고 용역깡패를 투입해 현장을 통제한다. 이에 노동조합은 야간조 출근시간에 집결한 조합원들이 몸싸움 끝에 용역깡패와 관리자들을 공장에서 쫒아냈다. 19일 새벽 0시 30분 경, 공장 밖으로 쫓겨난 용역 중 한 명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포차로 인도에 있던 조합원들을 향해 돌진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고의적인 살인미수 행위로 13명의 조합원들이 심각하게 다쳤다. 경추가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고, 눈구덩이 위쪽 뼈가 부서지는 등의 중경상을 입었다.

다음 날, 공장 안에 주차되어 있던 현대차 구매본부장의 차량에서 42쪽 분량의 문서를 발견한다. 현대차자본이 유성기업의 투쟁에 깊숙이 개입됐다는 증거였다. 노동조합은 23일 현대차 개입설과 파업유도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상황이 급격히 현대차자본의 노조파괴 공작으로 발전한다. 그러자 이명박 정권은 5월 24일 오후 4시 공권력을 투입, 500여명의 노동자들을 연행하고, 이중 김성태 아산지회장 등 2명을 구속, 100명을 불구속 기소한다.

노사간의 문제라며 가급적 정권의 개입을 회피하고 한두 달 이상의 관망 상태를 지나서야 대응하던 당시 여느 사업장과 달리, 파업 6일 만에 전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현대차자본과 자본의 대리인인 이명박 정권이 유성기업 노조의 투쟁에 얼마나 긴장하고 예의 주시했는지, 자본의 이익을 위협하는 야간노동 폐지에 나선 노동조합의 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유성기업노동자들의 8년간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됐다.

2급 발암물질인 야간노동을 폐지하자

유성기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장시간 야간노동으로 매년 과로사가 발생하던 죽음의 현장을 바꾸겠다는 의지였다. 지금이야 상당수 제조업들이 주간연속 2교대제로 전환되고 있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이 10시간 이상의 주·야간 교대노동으로 몸이 병들고 있었다. 야간노동의 폐해가 과학적으로 드러나면서 노동자들은 ‘다치지 않고, 골병들지 않고, 죽기 않고 일할 권리’를 요구했고, 노동시간 단축으로 야간노동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200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야간노동의 위험을 알리는 구호가 바로 ‘야간노동은 발암물질’이었다.

유성기업 노조는 과로로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매년 발생하자 이 문제의 원인을 분석했고, 그 결과 야간노동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관련 단체들과 3년간의 토론과 연구를 거쳐 노동시간 단축, 야간노동 폐지를 주요한 과제로 결정하였다. 노동조합은 2009년 사측과 교섭을 통해 주간연속 2교대제(8+8)를 2011년 1월부터 시행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낸다. 2년의 유예기간을 둔 것은 필요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라인을 증설해야 하고 그에 따른 부지와 기계의 구입, 인력 충원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성자본은 야간노동 폐지를 위해 필요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현대차자본과 함께 노조파괴를 준비했다.

자본과 정권의 노조파괴 공작

공격적인 직장폐쇄와 용역깡패 투입 다음날 현대차 구매담당총괄이사의 차에서 발견된 42쪽의 문서에는 파업 찬반투표가 실행되기 전인 5월 11일부터 구체적인 사측의 준비와 대응사항이 정리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공격적인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용역깡패를 투입해서 현장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사측은 직장폐쇄 이후 노동조합의 투쟁에 대응하기 위해 공장주변은 물론 사장의 집 앞에도 집회신고를 해 두었다. 파업이 진행되면 생산라인에 대체투입하려고 관리자들에게 숙식뿐 아니라 침구와 의류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대응을 불법과 폭력으로 몰고 가기 위해 CCTV와 카메라를 구입하고 채증조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차자본이 뒤를 봐주고, 노조파괴 컨설팅으로 유명한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실행계획을 짰다. 이명박은 5월 30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연봉 7,000만원을 받는 귀족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사실왜곡과 비난을 공개적으로 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노조파괴 공작을 거든 것이다. 검찰과 노동부, 창조컨설팅, 현대차자본, 대통령까지 모두 나선 노조파괴 공작이었다. 그들은 모두 현대차를 중심으로 뭉친 노조파괴의 공범자들이었다.

노조파괴 공작은 끔찍하고 끈질겼다. 징계해고와 손해배상청구, 투쟁 과정에서의 연행과 형사처벌이 뒤따랐다. 한 조합원은 노조파괴에 맞선 투쟁으로 전과 40범이 되기도 했다. 2013년 12월 검찰은 노동부 아산지청 근로감독관이 낸 노조파괴에 대한 기소처분 의견을 묵살했다. 2011년 투쟁으로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10억여 원의 손해배상이 확정됐다. 그것도 모자라 유성자본은 파업 복귀 이후 현장에서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011년 파업으로 27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지만 부당해고 판정을 받아 복직했다. 그러나 그 중 11명이 다시 해고되었다.

금속노조에 남아 투쟁을 계속했던 조합원들은 사측의 온갖 부당노동행위와 감시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런 살인적인 현장통제와 감시로 다수의 조합원들이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16년 3월 17일 결국 한광호 조합원이 징계위원회 출석을 앞두고 자살했다. 노조파괴가 결국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토론과 교육, 투명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활동이 투쟁의 원동력

유성기업 노조는 8년째 노조파괴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한광호 조합원을 빼앗겼지만 조합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더 큰 완성차 노동조합도 나서지 못했던 야간노동 폐지를 위한 투쟁에 나섰던 이유도, 8년간의 고통스런 노조파괴에도 물러서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영동지회장 이정훈 동지는 ‘노동조합을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활동의 결과로 조합원들과 집행부 사이의 신뢰가 높아졌고, 조직력이 단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끔찍한 노조파괴에도 아직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 노조는 다수노조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사측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에도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에 남아있는 것이다. 오히려 어용 기업노조로 조합원을 전환시킨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유성기업 전직 임원의 증언이 있었을 정도로 유성기업 노조는 단단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유성기업 노조는 58년의 역사를 가진 노동조합이다. 전노협 시절부터 노동조합은 투쟁으로 돌파해왔던 경험이 있다. 96~7년 총파업 때 유성기업 노조는 24시간 전면파업을 25일간 유지하며 투쟁에 앞장섰다. 98년 IMF가 터지면서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임금과 고용 등에서 양보교섭에 내몰렸지만, 유성기업 노조는 오히려 총파업으로 임금인상을 쟁취하기도 했다. 2004년 주 40시간 노동이 법제화되기 전인 2000년에 주 40시간을 단협으로 쟁취하기도 했다.

이런 투쟁과 승리의 경험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합원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교육, 많은 조합원들이 현장소모임활동을 통해서 단련되고 성장한 결과인 것이다. 노동조합 집행부 14명에게 떨어진 10억여 원의 손해배상을 직장폐쇄가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받은 체불임금을 조합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 해결한 것이 유성기업 노조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투쟁은 결코 패할 수 없고, 반드시 승리할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투쟁을 하자

현재 유성기업 노조는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농성장을 차리기 위해서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며 상경투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매일 조합원 30~40명이 연행됐다. 현대차자본이 결코 사옥 앞에서의 농성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연행되고 48시간 이후에 석방되면 또 다시 농성장을 사수하기 위해 돌아 왔고 경찰과의 몸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투쟁하고 연행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차사옥 앞 농성장이 꾸려진 것이다.

사측의 노조파괴 행위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하자 노동조합은 2014년 6월 대전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냈고, 법원 앞 농성과 투쟁으로 결국 2017년 2월 노조파괴 행위를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다. 그 결과 유시영은 1년 2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그리고 체불임금에 대한 재정신청이 또 받아들여져 9월 4일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유성기업 노조가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유성영동지회장 이정훈 동지는 이제 진짜 투쟁을 하자고 한다. 사법거래가 폭로되고 노동부개혁위원회에서 유성사건을 재조사하라는 권고가 나왔지만, 이것은 권고에 불과할 뿐이다. 권고안 중의 하나였던 전교조 법외노조 직권취소와 관련해 노동부장관이 직접 나서서 불가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도, 2월 1차 사전조사에서는 유성기업의 노조파괴 사건을 재조사할 것을 결정했지만, 진상조사단의 자료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성기업 등 5건에 대한 본조사 결정을 유보했다. 그러나 노조는 그 이유를, 진행 중인 현대차자본의 유성기업 노조파괴 개입 고발사건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자본과 권력의 공조는 조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성기업 노조의 투쟁은 단순히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다. 투쟁의 이유였던 야간노동 폐지는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담은 사회적 요구였으며, 그 과정에서 겪은 노조파괴 공작도 현대차자본이라는 독점자본이 앞장서서 벌인 노동조합에 대한 총자본의 공격에 맞선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민주노조라면 당연히 함께 싸워야 하고, 전 사회적인 힘을 모아야 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파업투쟁 당시 노동조합은 홀로 고립되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조의 연대는 강하지 못했다. 야당이라서 힘이 없다던 민주당은 정권이 바뀌어 정부여당이 되었지만, 잘못 수습하면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다며 노골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이제 믿어야 할 것은 조합원들이고 민주노조의 진짜 투쟁이다.

한개의 댓글

  1. 노조파괴의 범인은 노동자가 죽든지 말든지? 악덕기업 유성기업은 법을 안지켰으니, 처벌을 받아야 하고, 촛불정부라 자칭하는 문재인정부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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