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 70주년: 학살이 아닌 저항의 역사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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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제주공항 활주로는 오늘도 뜨겁다. 하루에만 수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이해야 하기에 한시라도 쉴 틈이 없다. 지난해만 서울과 제주를 오갔던 항공편이 하루 평균 178편에 달했다고 하니, 활주로의 열기는 식을 날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상 위 열기 가득한 활주로와는 달리 그 밑은 사정이 전혀 달라 보인다. 수십 년 전, 빨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땅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제주공항 활주로의 전신은 4·3 당시 가장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되었던 정뜨르 비행장. 이곳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가 도민들을 강제동원하여 건설한 군사용 비행장으로, 4·3 당시 학살 희생자 약 800여 명이 여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연 제주공항을 거쳐 가는 수많은 관광객 중 활주로 아래에 서린 비극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성산일출봉이나 정방폭포처럼 섬 안의 관광명소 중에서도 4·3의 핏빛 역사가 물들어있는 곳이 수두룩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 차원에서 4·3에 대한 발설 자체를 철저히 봉쇄했기 때문이다. 학살의 광풍에서 살아남은 유족들에게는 수십 년간 연좌제라는 족쇄가 채워졌으며, 공개적 언급만으로도 국가보안법 혐의가 적용되었다. 수백 명이 학살당했던 북촌마을에서는 장례 도중 소리 내어 통곡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 87년 이후 진상규명운동이 활발해지면서 4·3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가 차원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까지 채택되었다. ‘공산폭동’으로 낙인찍히던 지난 금기의 세월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4·3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국가 폭력이 야기한 양민 학살’ 정도에 그쳐있으며, 관련 법과 제도도 그 수준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저항의 역사를 다루지 않고서는 4·3의 진실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살의 정확한 계기를 추적할 수도 없다. 4·3 항쟁 70주년, 이제는 비극의 이면에 감춰진 저항의 역사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 기사에서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4·3 항쟁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억압과 부조리에 맞서 싸웠던 당시 제주도민들의 저항을 중심으로 4·3 항쟁을 되짚어보려 한다.

[사진: 사회주의자]

혼란으로 점철된 해방직후 제주도

1945년 8월 15일, 제주도민들은 전쟁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이미 갖은 수난을 겪은 뒤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미·일 양국이 전략적 요충지였던 제주도를 가만 놔둘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방패삼아 본토를 사수하려 했다. 도민들을 강제동원하여 섬 전체에 군사시설을 구축했고, 전쟁 물자 보충을 위해 도민들의 재산을 모조리 앗아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민 전체가 노역에 시달렸고, 식량도 모자라 제사 그릇까지 공출해가는 지경에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편 미군도 요새화되어가는 제주도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미군은 1945년 초부터 제주도와 주변 해역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피난민을 태운 제주발 목포행 여객선 고와마루(晃和丸)가 공습으로 침몰하여 257명이 희생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한림항의 무기고가 공습에 의해 폭발하면서 400여 호의 민가가 파손되고 3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해방이 되면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패전 이후에도 일본 군경들은 섬에 남아 도민들을 괴롭혔다. 일제 순사들은 밀수품을 단속한다며 도민들의 재산을 갈취했고, 패잔병들은 폭동 방지를 빌미로 무장한 채 도민들을 위협했다. 심지어 전쟁 물자를 몰래 팔거나 군량미와 같이 도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물자를 일부러 소각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 치하 동안 억눌린 분노와 맞물려 일본인들과 일제 부역자들을 겨냥한 테러행위를 낳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는 한마디로 아비규환. 도민들은 일제 군경에 항거하는 동시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보안대나 자위대를 구성하였고, 각 일터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관리위원회”, “……복구위원회” 등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군소 단위의 치안활동과 자치활동은 도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했지만 규모 상 한계가 있었다. 이내 하나의 유기적인 자치기구에 대한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건준과 인민위의 등장은 이후 전개될 ’3·1 기념대회’, ‘3·10 총파업’, 그리고 4·3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물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주도에서 도 단위 건준이 처음 결성된 시점은 1945년 9월이다. 건준위원장으로 오대진이 선출되었는데, 그는 1932년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다. 건준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음에도, 위원장을 포함하여 건준 지도부의 상당수가 제주도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이거나 좌익 인사였던 점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들이 오랜 시간 꾸준한 활동을 통해 민중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것은 1930년대 적색농조운동과 잠녀항일투쟁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그 섬에서 유일한 당이자, 유일하게 정부다운 조직이었다

미군정 요원 E. 그랜트 미드

우익이 강세였던 지역에서는 건준이 자체적으로 해산되는 경향이 강했지만, 제주도에서는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계승되는 형태로 나아갔다. 인민위는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표방하며 도내에서 다양한 자치 활동을 이어갔다. 치안유지, 적산관리뿐만 아니라 생필품 공급, 학교 개설 등 민중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여러 활동을 실시했으며, 청소와 도로정비, 체육대회 및 연예대회 등 대중적 활동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해나가기도 했다. 인민위가 수행한 일련의 사업들은 당시 도민들이 당면한 처지와 맞닿아 있었기에 도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인민위와 도민의 관계를 더욱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인민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더욱 두텁게 했다.

남한에 친미반공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미군정은 인민위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하지만 군정 초기에는 워낙 도내에서 인민위의 입지가 강력했으므로 협조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인민위를 제주도의 공식적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일제가 남긴 식민통치기구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일제경찰들을 군정경찰로 등용하여 군정을 이어나갔다. 이 같은 조치는 도민들의 반감을 샀으나 이 시기에 미군정과 인민위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국제적으로는 아직 한반도 문제에 관해 어떠한 결론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제주도 내 친일 및 우익 세력의 영향력도 미미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 민심에 불을 지피다

미군정의 본색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결렬되면서 수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발생한 조선공산당 정판사 위폐 사건과 대구 10월 항쟁은 미군정에 좌익 탄압에 대한 강력한 명분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제주도에서는 도(道)제 실시를 기점으로 미군정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도제 실시는 군인과 경찰의 물리력 강화에 법적인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는 미군정의 통치력 강화뿐만 아니라 인민위원회에 대한 견제와 우익의 입지 강화를 의미했다. 정치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과중한 세금 부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도제를 반대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미군정은 인민위와 도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제를 감행하였다.

경색된 정세는 점점 심각해지는 사회경제적 모순과 함께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일제보다도 못하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특히 제주도의 경제 상황은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의 농업 생산력은 거의 자급자족에 가까울 정도로 낮았다. 임업, 축산업, 수산업 등 다른 일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1920년대부터는 일본으로 노동이주를 가는 경우도 흔했다. 특히 일본에 진출한 도민들이 보내는 송금액과 대일 교역을 통해 조달된 물자는 도내 경제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대일 교역이 불법화되었고 뱃길도 끊겨버리는 바람에 제주도 경제는 하루아침에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귀환 인구의 휴대물품과 금전 반입을 제한하는 조치로 인해 귀환하던 도민들은 거의 빈털터리로 돌아와야 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 인구는 단숨에 6만씩이나 증가했는데, 이는 경제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인구증가율이 갑작스레 25%를 웃도는 상황에 식량과 생필품은 한없이 부족했으며, 실업률과 물가도 함께 치솟았다. 연이은 흉년, 콜레라 성행에 뒤이어 광견병까지 급증하면서 제주 사회는 악재 중에 악재를 맞았다. 이 가운데 미군정의 과도한 미곡 수집으로 민심은 더욱 악화되어 갔고, 밀무역을 일삼던 모리배들과 미군정 관리 및 경찰들의 결탁이 제주 사회에 폭로되면서 도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도민들이 겪고 있었던 극심한 경제적 궁핍은 미군정을 향한 불만의 화살로 변해갔다. 태평양 전쟁 때부터 피어올랐던 도민들의 반미 의식이 행동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1947년 2월 10일, 제주 시내 중고등학생들 천여 명이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라는 슬로건과 함께 반미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나선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학생들은 시위에서 양과자와 양담배에 대한 배척뿐만 아니라, 모리 간상배들에 대한 일소, 학원자치 간섭 반대 등 자신들의 처지에서 제기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요구들을 내걸었다. 이 투쟁은 당시 제주도 안에 만연해 있던 반미 의식이 본격적인 집단행동으로 드러난 첫 사례였으며, 미군정까지 충격에 빠트릴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남로당은 당원배가운동을 실시하면서 민전, 민청, 부녀동맹 등 대중조직 확산을 도모하는 등 대중투쟁을 준비해 갔다. 당시 남로당은 인민위를 주도하며 이미 많은 도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년동맹에서 계승된 민청, 1947년 결성된 부녀동맹 등 대중단체들이 면·리 단위까지 광범위하게 조직되면서 대중투쟁을 위한 조직적 기반이 확대되어 갔다. 이 같은 양상은 제주도민들이 당당한 정치적·사회적 주체로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투철한 사회주의적 신념에서 발화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군정의 탄압과 삶의 부조리에 맞선 대중의 주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탄탄해진 대중적 기반 아래서 남로당은 더 큰 대중 투쟁을 도모하기 위해 3·1 기념대회를 준비해나갔다.

본격적인 저항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치러졌다. 이 날 이 한 장소에 모여든 군중만 대략 3만에 달했다. 도 내 다른 지역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각각 결집된 인파는 우도를 제외하면 모두 천 단위가 넘었다. 가히 “제주도 개벽 이래 최대 인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규모였다. 숫자만으로 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개최되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미군정은 제주도에 응원경찰 100여 명을 파견하고, 그날 시위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기념대회에 주로 등장한 구호 중에는 “통일독립 전취”, “미·소 공위 재개” 같은 정치적 구호와 함께 “부패경찰·모리배 척결”, “강제 공출 반대”, “양과자 반대” 등 민중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다양한 구호들이 울려 퍼졌다.

기념대회를 마치고 난 뒤에는 약 1만 명의 행진 대오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때, 대오가 관덕정 광장을 지나고 난 뒤 제주도를 역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한다. 응원경찰의 갑작스런 발포로 시위를 구경하던 민간인 6명이 사망한 것이다. 도민들은 격노했다. 그런데 미군정과 경찰은 민심 수습도 모자랄 판국에 3·1 기념대회를 빌미로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하면서 격앙된 도민들의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이를 기점으로 미군정을 위시로 한 지배세력과 인민위가 주도하던 도민사회의 갈등이 깊어져갔다. 반미 감정, 파탄 난 경제 상황과 궁핍, 해방이 되어도 달라진 것 없는 삶에 대한 실망감 등 그간 쌓여온 도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이날을 계기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올 차례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총파업이 벌어진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관공서 23개 기관, 학교 105개교를 포함하여 금융, 교통, 통신기관, 회사, 공장 등 166개 기관 및 단체가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참가자는 공식적인 집계로만 41,211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영세 상점의 휴점 행위, 학생들의 동맹휴업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미군정청 통역과 현직 경찰관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경이로운 일까지 벌어졌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발포사건에 대한 분명한 수습에 있었다. 이는 파업 당시 투쟁위에서 제출한 요구조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경찰 무장 즉시 해제, ② 발포 책임자 및 발포경관 즉시 처벌, ③ 경찰수뇌부 즉시 해임, ④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 생활 보장, ⑤ 3·1사건 관련 인사 즉시 석방, ⑥ 친일 경찰 축출. 6번째 항을 제외하고는 요구조건은 대부분 발포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항이었다. 물론 이는 파업의 기본적인 방침이었으며, 여기에 각 단체별로 다양한 요구들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중등교생 생도합동대책위원회가 내건 요구조건에는 ‘경찰의 학원간섭 절대 반대’, ‘교원과 생도의 최저 생활 보장’ 같은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확실한 점은 당시 파업은 남로당에 의해 도민들이 수동적으로 이끌린 것이 아닌, 도민들의 능동적인 참여 아래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불의를 느낀 우익들까지 참여할 정도였다. 게다가 총파업은 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절대 성사시킬 수 없는 행위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당시 제주도민들의 투쟁의지가 매우 강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히다

미군정과 경찰은 도민들의 평화적인 저항에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으로 맞섰다. 파업의 원인을 ‘북조선과 내통한 남로당의 선동’이라고 멋대로 규정한 채 파업을 분쇄해갔다. 그런데 북조선과 연계되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으며 실제로도 아니었다. 남로당의 전반적인 주도하에 파업이 성사된 것은 맞지만, 이미 살펴본 것처럼 도민들의 의지로 해낸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적”이라고 파악하며 제주도 정세를 이념 대립으로 몰고 갔다. 파업의 진짜 원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좌익분자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차별적 검거와 탄압으로 파업 사태를 일단락 지은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본격적인 좌익 거세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제주도 수뇌부들을 강경 우익인사들로 배치하는가 하면, 총파업에 가담했던 관공리들을 파면하고 우익성향의 본토출신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경찰병력은 500명 규모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우익과 밀접한 본토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혐의 여부와 상관없이 막무가내 검거와 고문취조로 도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도민들을 괴롭힌 건 경찰뿐만이 아니었다.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등 극우 단체가 제주도 전역에 기승을 부리며 백색테러를 자행했다. 특히 서청의 만행은 미군정조차 우려할 정도였다. 단순구타를 넘어 강간, 금품 갈취까지 무법자가 따로 없었다. 당시 미군 방첩대의 보고내용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만일 제주도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할 경우 모든 조직들이 제주감찰청을 공격하리라.’

남로당 역시 대대적인 탄압을 면치 못했다. 제2차 미·소 공위 결렬 이후 경찰의 대규모 검거선풍으로 조직 역량은 날이 갈수록 후퇴하였고, 조직의 대중적 노출이 위험해지면서 활동은 점점 지하화되었다. 당시 남로당은 합법정당이었지만, 좌익 분쇄라는 목적 앞에서 그런 사항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도 외로 도피하거나 입산하는 당원들이 늘어났고, 탈당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심지어 성산면에서는 수십 명이 남로당을 탈퇴하고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는 일도 있었다. 치명적인 붕괴 위기 국면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당과 조국의 미래 대한 고뇌에 휩싸였다. 3·1 집회를 거치면서 당 내에서 입지를 확보한 젊은 세대들은 무장봉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남로당은 3월경에 무장봉기를 결정하게 된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고민조차 사치였다.

한편 1948년이 되면서 남한 단독 정부수립이 점점 유력해졌다. 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러워져갔다. 그만큼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탄압행위도 점점 무자비해져갔다. 3월에만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달 말에는 좌익성향 청년이 구속과 재판도 없이 경찰과 서청에 의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민심의 분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도민들은 이 같은 “막다른 골목”에서 “앉아서 죽느냐? 그렇지 않으면 싸워서 사느냐?”하는 “엄중한 기로” 앞에 서게 되었다. 우익의 득세로 점점 커져가는 단선·단정의 가능성, 경찰과 극우단체의 살인적인 폭력, 날로 첨예해지는 미군정과의 대립, 악화일로의 사회경제적 상황, 남로당의 붕괴위기까지 무장봉기의 명분은 계속 쌓여만 갔고, 이는 결국 4월 3일 새벽 2시의 봉화와 함께 피어올랐다.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4·3 항쟁의 전개, 그리고 피의 학살극

1,500여 명에 달하는 인민유격대가 11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주둔소 등을 습격하며 봉기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함께, 경찰관, 공무원, 대청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과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두 가지 내용을 담은 전단이 도 전역에 살포되었다. 아래 호소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항쟁은 미군정을 등에 업은 경찰과 극우단체의 폭력에 맞선 저항이면서, 통일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고자 일으킨 항쟁인 동시에 반미구국투쟁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자위적 궐기였지만, 그와 함께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 투쟁이 무장봉기라는 강력한 방법으로도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주의자들과 도민들이 극한으로 치닫는 사회적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함께 실천해온 저항의 경험들이 제주도 민중의 역사에 누적되어왔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상을 지니지 않았더라도, 계급의식이 강하지 않았더라도, 저항의 경험 속에서 획득한 주체성과 연대 의식, 그리고 더욱 강렬해지는 해방에 대한 열망이 이들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4·3’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주체성과 연대의식은 5·10단선반대투쟁에서도 빛을 발한다. 무장봉기의 주요목적이 단선단정에 대한 반대였던 만큼, 유격대는 선거 무효를 성사시키기 위해 상당한 역량을 쏟아 부었고 많은 도민들이 이를 지지했다. 선거준비과정에서 당시 많은 도민들이 유권자 등록 자체를 거부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 지역 주민들은 선거 거부를 위해 잠시 산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여기에 유격대의 공공기관 습격과 선거명부 탈취, 투표소 파괴 등 선거 방해가 이뤄지면서 제주도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투표율로 선거 무효가 성사될 수 있었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재선거가 계획되지만 도민들의 극렬한 반대로 결국 무마되기까지 했다. 5·10단선에서 선거 무효라는 결과를 낳은 것은 제주도뿐이었고, 이는 무장투쟁 중에도 강력한 연대를 유지했던 유격대와 주민들의 관계 덕분이었다.

유격대와 주민들의 유기적 관계는 주민들의 무장투쟁 지원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와 중산간지역 초토화작전 이전까지 중산간지역 마을은 유격대와 깊은 유대를 유지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유격대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해주었고, 필요할 때는 은신처도 제공해주었다. 더 적극적인 주민들은 삐라 살포에 직접 나서거나 봉화를 직접 올리기도 했다. 경찰과 극우세력의 폭력을 피해 입산을 해야 했던 주민들도 직접 무기를 들진 않더라도 주변을 감시하거나 물자 보급에 나서는 등 조직적으로 유격대에 가담했다. 아마 이들이 바랐던 것은 하루빨리 미군정의 폭정, 경찰과 극우세력의 폭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유격대에 헌신적으로 가담했던 도민들과 기층 당원들의 바람과 달리, 항쟁은 8·15 단독정부 수립과 11월 무법에 가까운 계엄령 이후 점점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항쟁을 이끌던 총책 김달삼과 당책임자 강규찬이 8·25인민대표자대회로 월북하면서 유격대의 사기는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연이은 토벌과 학살로 유격대와 주민의 관계는 급격하게 파괴되어갔다. 게릴라 토벌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중산간 지역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사라지고 많은 이들이 학살당하면서, 항쟁은 결국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생존투쟁으로 축소되어버렸다. 이듬해 1949년,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봄이 지나고 난 뒤 유격대의 항쟁도 거의 소멸되고, 유격대 자체도 궤멸에 이른다.

유격대의 항쟁이 막이 내릴 즈음 학살은 더욱 광기에 찬 형태로 전개된다.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 정권에게는 국가의 본때를 보여줄 무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항쟁의 1막이 억압과 부조리 속에서 봉기한 사회주의자들과 도민들의 용감한 투쟁이었다면, 항쟁의 2막은 신생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반공국민들을 위한 본보기 교육이었다. 학살의 현장에는 법도, 인권도, 윤리도, 도덕도, 상식도, 일말의 연민조차도 없었다. 오직 불순한 ‘빨갱이’와 정의로운 ‘빨갱이 사냥꾼’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빨갱이의 섬’ 제주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국가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분명 정치적 학살이었다. 이 같은 만행은 한국전쟁 동안에도 끊이지 않았으며,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이 되어야 종식될 수 있었다.

맺으며

어쩌면 봉기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장봉기를 직접 주도했던 김봉현의 회고를 살펴보아도, 악화되는 상황에 몰려 “준비도 없이 어두운 밤에 주먹 내밀 듯이 모험적으로” 봉기를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항쟁 도중에 북한으로 건너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김달삼과 강규찬의 행위 또한 비판받아야 마땅할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섬 안에 남아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사회상이 다소 거칠고 막연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세상과 자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 상당수가 미군정 치하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 기층의 농민·해녀·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항쟁에 나선 것은 ‘좌익분자’의 ‘세뇌’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느낀 생존에 대한 절박함, 진정한 민족해방과 통일독립에 대한 염원,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한 열망을 항쟁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4·3은 학살의 비극이 아닌 저항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민중이 왜 저항에 나서게 되었는지, 저항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그것을 무참히 분쇄한 세력은 누구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4·3항쟁의 진실을 온전히 밝힐 수 있으며, 그 저항의 역사를 오롯이 계승할 수 있다.

독신으로 살며 생활비와 학자금 부채에 허덕이며 생계를 가까스로 유지하는 청년이다. 수도권에서 종종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읽기 모임을 진행하며 사회주의 인간해방을 꿈꾸는 중이다. 『사회주의자』에서는 잡지 편집 및 표지 디자인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한개의 댓글

  1. 항쟁 도중에 북한으로 건너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김달삼과 강규찬의 행위 또한 비판받아야 마땅할 지점이다.=>이 대목은 잘못된 내용이네요. 새로 발굴되거나 재평가되는 역사일수록 관점이 잘못되지 않도록 정확하고 신중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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