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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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Jonathan Kingston/Aurora Select, for The New York Times

10월 1일 미국 스크립스 해양연구소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연구소는 하와이 마우나로아 관측소의 모니터링 자료에 의거하여 올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 해 중에 400ppm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한다. 이런 발표내용은 기후변화와 관련해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두어 곳의 언론 외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400ppm은 사실 산업혁명 이전 온도 대비 2℃ 이내로 기온상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마지노선이었다. 2016년이 연중 내내 400ppm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해가 되면서, 재앙적인 기후변화를 저지할 여지가 심각하게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기에 400ppm이 문제라는 것인가? 이제 400ppm을 둘러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온실효과와 기후변화를 규명하기까지

기후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는 19세기 초반부터 이론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는 하루하루, 혹은 몇 개월의 날씨 변화와는 다른 매우 장기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기후변화 연구가 밝혔듯이 산업혁명 이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ppm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지구가 더워지는 문제는 과학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온이 올라간다면 농업에 유리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온실효과와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은 주되게는 빙하기 연구에서 나왔다. 지질학적 증거를 볼 때 과거 엄청난 규모의 빙하기가 장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빙하기를 유발하고 종결지은 기후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과학적 관심이 우선 갔던 것이다.

19세기 초 프랑스 과학자 조제프 푸리에는 지구복사를 연구했다. 그는 지구 대기가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열에너지를 일부를 가로채 지구에 머물게 하여 지구를 따뜻하게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푸리에의 이론을 입증한 것은 영국의 과학자 존 틴들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였던 틴들은 유물론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1874년 벨파스트에서 행해진 영국과학진흥협회 의장 취임연설에서 에피쿠로스에서 다원에 이르는 유물론의 발전을 해설했다. 당시에는 자신의 과학적 성과를 대중에게 발표하는 대중강의들이 많았다. 틴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던 맑스는 주위 동료들과 함께 자연과학 강의에 적극 참석했는데, 1860년과 1864년 사이에는 런던대학에서 개최된 틴들의 강의에 자주 참석했다(존 벨라미 포스터, 『마르크스의 생태학』, 416쪽). 틴들이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한 것이 1859년이었기 때문에, 틴들이 이 실험을 설명하는 첫 자리에 맑스가 참여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여러 쟁점들 중에는 여전히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가령 당시에는 지구온난화가 문제시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거대한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인간이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기후변화에서 인간의 영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소련의 지화학자 블라디미르 베리나드스키였다. 그는 ‘생물권’ 개념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생화학 활동을 분석하여 지구 대기를 구성하는 산소, 질소, 이산화탄소가 대부분 지구 생물의 활동에 의해 생긴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인류가 지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지질학적 힘’이라는 생각을 착안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기후변화에 대한 중요한 착상은 아마추어 과학자에게서 나왔다. 1938년 가이 스튜어트 캘린더는 영국 왕립기상학회에서 기상 통계 수치로 보아 지구의 여러 지역에서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인류의 산업을 지적했다. 인간의 산업활동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마우나로아로 가는 길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기후변화 과학에 영향을 미친 것은 과학의 군사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종전 후 냉전이 개막하면서, 군대는 군사화할 수 있는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막대한 재정을 투여했다. 그 대표적 경우가 알다시피 핵무기의 개발이다. 군대는 기상과 대기조건이 전쟁에 끼치는 영향에도 관심이 많아, 기상학 부문에 많은 투자를 했다.

길버트 플래스의 연구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군수업체 록히드 항공에서 적외선 흡수 문제를 연구했다. 적외선 흡수는 적외선 미사일 등 다양한 무기개발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무기를 개발하는 와중에 소일거리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어떻게 적외선 복사를 흡수하는지 연구했다. 그 역시 관심사는 지구온난화보다는 빙하기였다. 당시 기후변화와 관련해 과학계에서는 이산화탄소가 온실효과를 낳지만 이산화탄소의 양 변화는 온실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이산화탄소량이 증가해도 지구온난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래스의 연구는 이것을 반박했다. 그러나 플래스의 연구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와 기후변화 사이의 실제 관계에 관한 입증이 필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기 중에 유입된 이산화탄소는 결국 바닷물로 흡수되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반론이 반박되어야 했다. 미국 샌디에고에 소재하는 스크립스 해양학연구소를 이끈 로저 르벨이 이 문제에 매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의 지구 순환을 밝혀야 했다. 이것의 실마리도 군사부문에서 나왔다. 핵무기 개발을 위해 자행된 핵실험은 방사능 낙진 문제를 일으켰고, 방사성 물질의 순환을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장비들이 개발됐다. 일부는 이 장비로 방사성 탄소 측정에 이용했다. 이로 인해 등장한 대표적 기술이 방사성 연대측정이다. 기본적으로 이 기법은 대기 중 일반 탄소원소인 C12와 방사성 동위원소인 C14 사이의 비율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한스 쥐스는 이 기법을 대기 중 탄소 측정에 이용했다. 한스 쥐스에 따르면, 새로 대기에 유입된 이산화탄소는 주로 화석연료의 연소에서 나오며, 이 화석연료는 과거에 묻힌 탄소이기 때문에 현재 대기 중의 C12:C14 비율과는 차이를 보인다. 만약 화석연료를 태워서 나온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증가한다면 C12의 비율이 증가할 터였다. 1955년 쥐스는 과거의 탄소가 현재 대기에 추가되었음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화석연료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추가된 탄소의 양이 미미하기 때문에 그것의 대부분이 해양에 흡수될 것이라고 보았다.

로저 르벨은 한스 쥐스를 연구소에 채용하여 함께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해양 흡수를 연구했다. 그들은 해수와 대기 중 방사성 탄소를 측정하는 연구를 통해 해양표층수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견 반론이 맞는 듯 했다. 그러나 르벨은 그 후 10년간의 연구를 통해 해수가 흡수한 탄소를 모두 보유하지 못하고 재방출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게다가 르벨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957년 수준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6배나 늘었다.

이제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자연과학의 모든 전진 이면에는 이런 가장 기본적이고 지루한 실험과 연구과정이 존재한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를 장기간 진행한다는 것은 커다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급변하는 대기 흐름의 변화로 인해 정확하고 안정적인 자료 확보가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운 일을 책임지게 된 것이 찰스 데이비드 킬링(Charles David Keeling)이었다.

1951년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가 설립되고, 1957년과 1958년 ‘국제지구물리관측의 해’를 계기로 지구물리학 분야의 국제적 협력과 지원이 가능해졌다. 이를 기회로 르벨과 쥐스는 미국에 할당된 지원금 중 일부를 해양 및 대기 측정 프로그램에 끌어왔다. 르벨은 킬링을 채용해 세계 각지의 이산화탄소 농도의 기준을 마련하는 프로그램을 맡겼다. 킬링은 대단한 피아니스트였고, 자연에 있는 것을 좋아해 많은 험준한 산을 등반한 아웃도어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를 적임자로 만든 것은 그의 꼼꼼함이었다.

킬링은 1958년 정부를 압박해 자금을 얻어 이산화탄소를 측정하는 정교한 장비 1대를 해발 3394m 높이인 하와이의 마우나로아 화산에 설치했고, 다른 하나는 남극에 설치했다. 이곳은 지구에서 교란되지 않는 대기를 측정할 수 있는 최적 장소였다. 그는 세부적인 것에 꼼꼼한 관심을 기울이며 이산화탄소 농도에 대한 극히 정확하고 일관된 기준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킬링의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 프로그램이 좌초될 위기도 있었다. 1958년에는 ‘국제지구물리관측의 해’가 끝나면서 재정지원이 중단되었다. 쥐스와 르벨은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연구비 일부를 전용해서 이 프로그램을 이어갔다. 1963년에 다시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도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현재 마우나로아 관측소는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와 미국 해양대기청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도 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는 두 대의 장비(그 중 하나는 킬링이 1958년 설치한 것이다)가 매시간 마다 관측한 측정치를 토해내고 있다. (지금까지 서술한 기후변화 과학의 역사는 스펜서 위어트의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동녘사이언스)를 상당부분 참고했다. 이 책은 기후변화 과학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킬링 곡선

이렇게 측정한 결과, 첫 12개월의 자료를 통해서도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가 증가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킬링은 2년 후인 1960년 남극의 자료를 근거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실제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킬링은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가지 47년 동안 한결같이 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을 책임졌다. 그리고 그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균 연 2ppm 씩 꾸준히 증가했다. 이렇게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를 기록한 그래프는 기후변화의 상징이 되었고, “킬링 곡선(Keeling Curv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킬링은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을 시작한 이후 농도가 하루하루 변동하고, 계절마다 변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계절마다 변동하는 이유는 봄, 여름에는 식물이 자라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가을, 겨울에는 식물이 생장을 멈추고 낙엽이 져서 이산화탄소 배출하여 농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킬링 곡선”은 이 부분은 10월 1일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발표와 연관이 있다. 해양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이산화탄소 측정프로그램을 책임진 랄프 킬링은 이미 2010년에 2014년 5월이 되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를 넘어설 것 같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예측보다 일 년 앞선 2013년에 이산화탄소 일 평균치가 400ppm을 넘었다. 그리고 2014년 3월에는 처음으로 한 달 내내 이산화탄소 수치가 400ppm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일 년 내내 400ppm 밑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봄, 여름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낮아진다. 그런데 9월까지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 밑으로 내겨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관측소 역사 상 10월 측정치가 9월보다 밑돌았던 것은 2002년 이후 4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스크립스 해양연구소는 연말에도 농도가 400ppm 밑으로 낮아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출처 = https://scripps.ucsd.edu/programs/keelingcurve/wp-content/plugins/sio-bluemoon/graphs/mlo_full_record.png
[킬링 곡선] 출처 = https://scripps.ucsd.edu/programs/keelingcurve/wp-content/plugins/sio-bluemoon/graphs/mlo_full_record.png
지구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해왔다. 킬링이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하기 이전의 측정치는 빙하지역에서 채취한 얼음코어, 큰 호수나 바다 밑바닥에서 채취한 진흙 코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코어들은 시간에 따라 누적적으로 형성되었고 그 안에는 다양한 지질학적 기록을 갖고 있다. 이 코어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오랜 과거의 식생, 대기 조성 등을 밝혀냈다. 이런 연구에 의거했을 때 80만년 동안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200〜300ppm 사이를 오고갔다. 기후변화 연구의 또 다른 시간적 기준이 되는 산업혁명 직전의 경우,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ppm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이산화탄소 농도는 꾸준히 증가하여 킬링이 농도 측정을 시작한 1958년에는 약 310 ppm이었다.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산업혁명 이후 인간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인간활동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기후변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속 글에서 최근 활발한 인류세 논의과 연관시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그런데 중단없는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이제 농도는 그 당시보다 90ppm이 더 증가한 수치가 되었다.

400ppm의 의미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이전과 달리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기후변화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는 기후변화의 결과가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급격한 변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후학자인 제임스 핸슨은 2008년 “티핑 포인트: 한 기후학자의 전망”에서 티핑 포인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인간활동이 만든 온실가스가 주요 기후변화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관성으로 진행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위험한 티핑 포인트 가까이에 있다. 온난화는 물의 순환(hydrologic cycle)을 격렬하게 하여 기후대를 이동시킬 것이며, 이는 이용할 수 있는 신선한 물과 인간의 건강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폭풍 및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해수면과 연관되어 있는 해안지역의 비극을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그 함의들은 심대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이 10년 안에 근본적으로 다른 에너지 이용경로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의 동식물 종들의 1/3과 우리 인간 종의 가장 취약한 부문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대처하기엔 너무 늦어 버리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비가역적 기후재난이 시작되는 시점이 티핑 포인트인 것이다. 이미 187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총 누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약 1900기가 톤에 달하기 때문에 기온 상승 자체를 완전히 중단 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적응’과 ‘완화’를 모두 추진할 수밖에 없다. 다만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이제 바라는 것은 이 티핑 포인트에 도달하기 전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키고 대기 중 농도를 안정화하여 최악의 상태를 막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티핑 포인트의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 친자본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산업화 이후 기온 변화를 3℃ 상승 이내로 막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이것으로는 기후변화의 결과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본다. 인간문명이 유지되고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면 산업화 이후 기온 변화를 2℃ 상승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400ppm은 이 티핑 포인트와 관련된 상징적 마지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2007년 발표한 제4차 기후변화 종합보고서의 배출시나리오특별보고서(SRES) 예측에 따르면 기온 변화를 산업화 이전 2℃ 상승 이내로 막기 위해서는 350-400ppm에서 안정화되어야 하고 2015년까지는 배출량이 정점에 도달한 후 안정화되어야 한다. 2014년에 발표한 제5차 기후변화 종합보고서는 예측방식이 대표농도경로(RCP)로 변경되었다. 이 방식은 대기 오염물질 및 토지 이용 변화 등과 같은 요인들을 바탕으로 향후 온실가스 배출량과 대기 중 농도가 2100년까지 어떻게 되는지를 예측한다. 이에 따르면 2100년까지 66% 확률로 1861-1880년 평균 기온 대비 2℃ 상승 이내로 안정화하려면 이산화탄소 농도를 430-530ppm 유지해야 한다. 이 둘을 비교할 때, 제5차 보고서가 제4차 보고서보다 후퇴한 전망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IPCC의 전망은 정부간 협의체라는 조직의 특성상 보수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넘어서버릴 정도로 기후변화가 악화되고 있기에, 우리는 IPCC가 제시하는 전망조차 이행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만들어내는 재난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과학자들은 2015년이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더운 해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발표가 무색하게도 올해는 그 기록을 다시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의 여파는 우리가 생생하게 체감할 수준이 되었다. 유난히 더운 기간이 늘어났고 한반도를 뒤덮은 폭염은 전기요금 폭탄 걱정으로 이어졌다. 기후변화가 사회정치적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경제적, 계급적 문제가 더해진다. 가령 에어컨도 쓸 수 없는 사람들은 폭염에 노출되어 온열질환에 취약해진다. 10월달에 들어 닥친 사상 최대 태풍 치바 역시 기후변화의 산물이다. 노동자들이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글의 첫 출발로서 이번 글은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이산화탄소 측정치 발표를 소재로 기후변화의 과학적 배경과 심각성을 살펴보았다. 독자들 중에는 이런 기후변화의 내용이 사회주의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기후변화의 영향과 원인, 해법, 그것을 둘러싼 자본가들의 대응, 노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면서 그 궁금증을 해결해갈 것이다.

2 댓글

  1. “킬링은 1958년 정부를 압박해 자금을 얻어 ….그는 세부적인 것에 꼼꼼한 관심을 기울이며 이산화탄소 노동에 대한 극히 정확하고 일관된 기준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산화탄소 ‘노동’ 대신 ‘농도’인 듯요^^

    글읽고 공부 많이 합니다 고맙습니다^^

  2. 자본의 끝없는 이윤 창출에 의한 산업화로 지구온난화의 가속화를 인식하는데 꼼꼼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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