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과 식민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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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이 사진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위원회의 토론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레닌 바로 옆자리에 조선인 박진순이 앉아 있다. 박진순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1918년 결성된 한인사회당, 그 후 만들어진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특집 기사] 1917-2017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

올 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입니다. 『사회주의자』는 이를 기념하여 특집 기사를 마련했습니다. 25일부터 5일간 다음과 같이 특집 기사 5편을 연속 게재합니다!

▶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①

▶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②

▶ 사회주의 운동은새롭게 고양하고 있다

▶ 1917년 2월, 노동자 권력기관 소비에트가 등장하다

▶ 러시아혁명과 식민지 조선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던 제국주의 저널리스트들은 19세기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멋스러운 헤드카피로 포장했다. 하지만 조선을 방문한 그들이 서방 세계에 진짜 전하고자 한 바는 자본주의 시장의 미개척지라는 이미지였다. 요새 말로 블루오션.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당시 조선이 마냥 고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수탈에 지친 농민들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이었다. 그랬다. 이미 내구연한(耐久年限)을 다한 조선 사회는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낮은 생산력과 신분제적 생산관계의 모순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폭발했고, 순식간에 번진 봉기의 불길 앞에서 조선의 지배계급은 무기력했다. 이들은 죽창을 들고 달려드는 ‘폭도’들로부터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 군대에 의탁했다. 낡은 체제의 지배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조선의 낡은 지배자들이 바란 대로 일본 군대는 조선 농민군을 무참히 살육했다. 그 피의 대가로 일본 군대는 조선에 당당히 주둔하면서 제국주의 자본가들이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각국에서 자본주의의 전령들이 들이닥쳤다. 1895년 11월, 고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낡은 체제의 상징인 상투를 자른 뒤 전국에 단발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1897년에는 이름만 거창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틈을 노려 일본과 서양의 자본가들은 광산 채굴권, 철도 부설권 같은 각종 이권을 챙겼다. 은행과 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를 육성하는 신식 교육기관도 들어섰다. 조선은 빠르게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식민지 조선에 날아든 ‘평화’와 ‘토지’에 관한 메시지

그처럼 격변 속에서 맞이한 20세기 벽두에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 조선에서 생산된 식량과 자원은 일본에 헐값으로 반출되었다. 일본은 공업화 과정에서 맞닥뜨린 자국의 식량난을 조선 쌀로 해결했다. 여기에 조선인 지주와 미곡 상인들의 매점매석까지 더해졌다. 조선의 쌀값은 폭등했다. 덕분에 굶어죽는 사람들마저 나타났다. 이처럼 혹독한 수탈이 자행되는 가운데 조선인 사이에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로써 ‘민족의식’이 확산되었다. 스스로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러시아에서 다수 노동자와 농민, 즉 볼셰비키가 권력을 쟁취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잦아들 무렵인 1917년 10월 25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겨울궁전을 소비에트 혁명군이 점령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노동자, 농민의 사회주의적 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할 것”이라며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했다. 그리고 레닌의 제안에 따라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했다. 이 가운데서도 전쟁을 인류에 대한 최대의 범죄로 규정하며 모든 교전국들이 ‘무병합’, ‘무보상’ 원칙에 따라 즉시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평화에 관한 포고’는 식민지 조선에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약소민족의 권리 보장에 적극적인 사회주의 정부의 등장은 한인 독립 운동가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활동을 벌이며 김 알렉산드라와 같은 한국계 볼셰비키 당원들과도 직접 교류하던 이동휘와 박애, 박진순 등 한인 독립 운동가들은 러시아 혁명 세력과 연대하기로 했다. 이들은 당장 소비에트 정부와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1918년 6월에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였다.

물론 이에 앞서 1917년 8월에 상하이에서 신규식, 조소앙, 박은식, 조성환 등이 사회주의를 표방한 ‘조선사회당’을 결성한 바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회당은 그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릴 예정인 만국사회당대회에 독립요구서를 전달할 목적으로 급조된 정당이었다. 또한 그 주체들이 보편적 이념으로써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에 비하여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연방정부와 정식으로 교류하며 실제로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 한인들을 대상으로 조직 활동을 벌이는, 명실공이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한편 한인사회당의 뒤를 이어,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러시아 이주 1세대 한인들도 김철훈의 지도 아래 ‘전러한족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한인 사회주의 운동의 계보가 시작되었다. 연해주 일대 한인들은 러시아혁명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러시아혁명은, 쌀값 폭등으로 생계 위기를 겪던 조선 노동자들에게 투쟁 의욕을 고취해 주었다. 그리하여 러시아혁명 이듬해인 1918년 한 해 동안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노동자 파업이 이어졌다. 예컨대 3월에는 겸이포 미쯔비시제철소 노동자 50여 명이 30%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을 벌였고, 5월에는 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용산공장 노동자 1천여 명이 파업을 감행했다. 또 6월 말에는 동아연초회사 노동자 2천여 명이 임금인상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8월에는 부산 부두노동자 400여 명이 동맹파업을 선언하고 부산역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이어 8월 13일에는 경성전기회사 노동자 250명이 파업투쟁을 벌여 2~4원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이처럼 1918년에는 모두 50건의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1916년과 1917년에 각각 8건에 불과하던 노동자 파업이 1918년에 이르러 급격히 늘어난 것은 쌀값 폭등이라는 내적 요인과 러시아혁명의 성공이라는 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러시아혁명의 메시지, 3.1운동의 원천이 되다

 러시아혁명은 노동자, 농민의 힘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심판한 것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전쟁과 지배를 전면 부정하고, 예전에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주변 민족의 독립을 흔쾌히 승인했다. 그것은 나중에 미국의 윌슨이 립서비스 차원에서 선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자결주의였다. 게다가 러시아혁명은 영원할 것 같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질서 자체가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했다. 또한 토지나 자본을 매개로 한 착취적 인간관계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보편적 혁명사상이 일제 착취에 시달리던 조선인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컨대 상하이 망명지에서 러시아혁명 소식을 접한 박은식은 그의 저서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러시아혁명에 대해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자결을 선포하였다.”고 술회했다. 또 “천지의 대변화가 일어난 이상 우리도 역시 활약하고 맹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러시아혁명의 메시지를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 끌어들였다. 또한 도쿄 한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에 선언한 「2.8 독립선언서」에서 혁명 후 러시아에 대하여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선언서 말미에서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러시아혁명을 조선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의 모델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한편 그 무렵 조선 인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를 계기로 조선 독립의 희망이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는 새로 수립될 정부의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물밑경쟁도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은 조선 독립 요구를 관철하려면 그에 대한 인민의 의지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마침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기획되었고 종교계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민족대표도 구성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이라는 근사한 요릿집에 모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런 뒤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곧바로 일제 경찰에 투항하고 말았다. 정작 만세운동에 본격적인 불길을 당긴 이들은 탑골 공원에 모여든 학생, 노동자, 영세상인 들이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식을 연 뒤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였다. 순식간에 만세운동은 전국적 봉기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등교 거부와 동맹휴업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각 지역의 농민들은 장터에 운집하여 자발적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도 이어졌다. 그에 따라 봉기도 점점 거칠어졌다. 농민들은 호미, 낫 등으로 무장하고 관공서와 주재소 등 일제 착취기관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3.1운동에는 조선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중에 수천 명이 투옥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전국에 걸쳐 4월 하순까지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조선 인민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혁명이 전해준 보편적 혁명이 메시지가 있었다. 그 메시지를 가슴에 새긴 초보적 사회주의자들이 3.1운동의 현장을 주도했던 것이다.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와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

3.1운동은 조선 사회의 외적 모순과 내적 모순이 통일적으로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3.1 운동을 통해 러시아혁명과 같은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했다. 또한 그 동력이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과 결부되어 있는 사회 내부의 계급투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동시에 달성될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동시에 3.1운동은 기존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를 넘어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사회주의자를 양산해냈다. 이와 관련, 스무 살 나이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한 박헌영은 “1919년의 사건은 나를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그들의 이념이 독립과 정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이는 해방 직후 소련영사관 직원 샤부시나 여사와의 대담에서 한 말이다).

반면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 운동 진영에서는 독립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들이 보기에 3.1만세운동은 실패한 사건이었다. 1차 대전 종결과 함께 기대했던 파리 강화회의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외면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마저 미국으로부터 거절당한 터였다. 국내 민족주의 운동은 사실상 한계에 봉착했다. 과거 운동가들의 입에서 ‘독립’ 대신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력양성’에 주력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광수 같은 사람은 사회진화론에 기대어 ‘민족개조론’을 외쳤다. 3.1운동 이후 국내 민족주의 진영에는 개량과 친일의 그림자가 서성거렸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볼 때 3.1 운동은 패배한 민족운동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 계급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한계로 여기는 지점이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의 회의론을 누르고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1922년 1월에는 윤덕변, 김한, 신백우 등이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했다. 2월에는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김약수 등 12명의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 지향의 노동운동을 추구하며 사회주의 사상 전파에 주력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22년 가을에는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 단체였던 ‘서울청년회’가 이영, 김사국, 한신교 등에 의해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1923년 3월에는 서울청년회 주도로 94개 청년단체가 결집하여 ‘전조선청년당’을 결성하고 사유재산제 철폐, 물산장려운동 반대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구호를 내걸었다. 또 서울청년회는 1924년의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어 북풍회, 화요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들이 나타났고 1925년에는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사회주의, 식민지 조선의 유행이 되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 등과 함께 자본주의적 억압에 맞서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그 결과 1920년에 2만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동공제회’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5년 뒤에 5만여 회원과 200여 개의 하부조직을 거느린 전국 규모의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대규모 노농조직에 힘입어 192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급증했다. 당시 일제 관헌 자료는 “노동쟁의 소작쟁의에 붉은 색이 돈다”고 보고함으로써 각종 쟁의가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의 흐름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결 구도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 인식의 깊이와 수준에 따른 차이, 또는 계급적 입장의 차이를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당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의의를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열렬한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만 그 이해가 미치지 못하거나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에 발목이 잡힌 이들은 민족주의라는 그늘에 숨곤 했다. 반면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을 열성적으로 주도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보편적 상식이자 유행이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맑스 레닌주의 관련 책이 필독서가 되었다. 신문에는 사회주의 관련 책 광고가 단골로 등장했다. 개중에는 “사회주의는 처세상식”이라며 얄팍한 상술을 부린 광고 문안도 눈에 띈다. ‘맑스보이 엥겔스걸’이라는 유행어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심지어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민족운동 단체의 강령에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버젓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주의가 걷잡을 수 없는 유행이 되자 일제는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사상 탄압을 강화했다. 그로부터 매년 수 천 명의 사회주의자가 검거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씨를 말리려 했다. 그러한 통치 관행은 이후 이승만, 박정희 등 독재 정권을 거쳐 오늘날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미래를 지배하려는 사람은 과거를 지배한다

옹근 100년 전. 러시아혁명은 식민지 조선에 사회주의의 홀씨를 날렸다. 그 홀씨는 3.1운동을 거치며 급속도로 번식했다. 예를 들면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를 국내에서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독립대동단’은 ‘조선 영원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한다’,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는 3대 강령을 내세웠다. 참고로 수만 명의 단원과 전국 조직망을 갖춘 이 단체의 주도자는 중추원 의장을 지낸 김가진과 일진회 간부 출신인 전협, 최익환 등이었다. 이처럼 일제에 부역한 전력을 가진 이들마저 버젓이 사회주의적 강령을 내세우고 활동했다는 사실은 러시아혁명이 식민지 조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러시아혁명 이후 식민지 조선의 인민 다수는 식민지 해방과 더불어 사적소유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한 희망은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하며 해방 국면까지 이어졌다. 그 때문에 1945년 8.15 해방을 맞은 인민들은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을 ‘우리 것’으로 여기며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기대감에 부풀었다. 당시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도 조선 인민의 70%가 사회주의 체제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체제를 원한다는 답변은 14%에 불과했다.

그러나 절대 다수 인민의 이러한 바람은 새로운 정부 설립에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 제국주의를 대변하며 분단국가 건설을 자행한 이승만 정권은 철저한 반공 정책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탄압했다. 반면 친일파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친일부역자 대신 사회주의자를 청산한 것이다. 또한 일제가 사회주의자 탄압을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은 오늘날에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꽃피웠던 사회주의 운동의 기억은 희미하게 지워져왔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미래를 지배하려는 사람은 과거를 지배한다고. 러시아혁명 100년을 맞은 지금, 사회주의자들은 그간 지배당한 과거를 다시 되돌리기 위한 사상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여야 한다.

 

한개의 댓글

  1.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이라는 근사한 요릿집에 모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런 뒤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곧바로 일제 경찰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영헀으면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6915.html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08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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