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주의노동운동 고양기에 바라본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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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겨울 궁전 앞에 모인 노동자 민중]

[특집 기사] 1917-2017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

올 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입니다. 『사회주의자』는 이를 기념하여 특집 기사를 마련했습니다. 25일부터 5일간 다음과 같이 특집 기사 5편을 연속 게재합니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①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②

사회주의 운동은 새롭게 고양하고 있다

1917년 2월, 노동자 권력기관 소비에트가 등장하다

러시아혁명과 식민지 조선

올해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세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을 뽑는다면, 그것은 아마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될 것이다. 중국의 혁명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다. 우리의 1919년 3.1운동도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 예와는 정반대방향의 것이지만 파시즘의 등장과 히틀러의 등장조차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을 떠나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은 현대사를 연 역사적 대사건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은 여전히 사회주의운동에 자극과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노동운동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뒤로 하고 새롭게 고양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100주년을 계기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을 실천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투쟁의 무기를 벼리는 의미가 있다. 여러 각도에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을 재조명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이 당시에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했고 이것이 어떠한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에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공세기에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1.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어떠한 주체적, 객관적 조건에서 발발하고 성공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초반에 전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강화되고, 사회주의노동운동이 과거와 비교하여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것을 살펴보고, 이에 대해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세력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제1차 세계대전이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노동자계급의 역량 강화-새로운 시대의 도래

레닌은 1913년에 쓴 『칼 맑스 교리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글에서 세계사를 세 개의 주된 시기로 나누었다. 레닌에 의하면 첫 번째 시기는 1848년 혁명에서 파리 콤뮨(1871)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파리콤뮨에서 러시아혁명(1904)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러시아 혁명 이후이다(이하의 내용은 레닌 자신의 주장이다). ‘두 번째 시기는 “평화로운” 특성, 혁명의 부재로 첫 번째 시기와 구별되었다. 이 시기에 서양은 부르주아혁명을 마쳤고 동양은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서양은 다가올 변화를 위한 “평화로운” 준비국면에 들어섰고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사회주의정당들이 모든 곳에서 형성되어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활용하는 것, 자신들의 일간신문, 교육기관, 노동조합, 협동조합을 창립하는 것을 배웠다. 맑스의 교리는 완전한 승리를 획득하고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 역량의 선별과 소집, 다가오는 전투를 위한 준비는 느리지만 꾸준한 전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맑스주의의 이론적 승리가 확실하자 맑스주의의 적들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적 기회주의(수정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필자주)로 되살아나려고 하였고 그들은 대전투를 위한 힘의 준비 시기를 이들 전투의 포기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비겁하게 “사회적 평화”, 계급투쟁의 포기 등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이 “사회적 평화”와 “민주주의” 아래에서 폭풍의 불필요성을 자축하자마자 엄청난 세계적 폭풍의 새로운 원천이 아시아에서 열렸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연이어 터키,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였다. 아시아에 이어 유럽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872-1904년의 “평화로운” 시기는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시기 구분을 같은 해에 쓴 『아우구스트 베벨』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했다. 여기에서 레닌은 세 번째의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근년에 제3의 시기가 출현해왔는데, 이 시기에는, 준비되어 온 역량들이 일련의 위기에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것이다.” 요컨대 레닌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역량이 발전하여 실제로 제3의 시기, 혁명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강화되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징조는 제1차 러시아혁명외에 여러 통계 자료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제2인터내셔널은 22개국의 27개 사회당․노동당을 포함하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약 1,200만의 선거민을 포괄하고 있었다. 로윈은 그 힘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108만 5,000명의 당원을 가졌고, 1912년의 선거에서 425만 표를 획득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14만 5,000명의 당원을 가졌고, 1907년의 선거에서 104만 1,000표를 획득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당의 당원은 14만 4,000명, 헝가리에서는 6만 1,000명이었다. 통일된 프랑스사회당은 8만 300명의 당원을 가졌고, 1914년의 선거에서 140만 표를 획득했다. 이탈리아사회당은 5만 명의 당원을 가졌고, 1913년의 선거에서 96만 표를 획득했다. 미국사회당은 12만 5,500명의 당원을 가졌고, 1912년의 선거에서 90만 1,000표를 얻었다.” …… 1914년에 주요한 여러 사회민주주의 당이 의회에 파견했던 대표는 다음과 같다. 독일 110, 프랑스 103, 핀란드 90, 오스트리아헝가리 82, 이탈리아 80, 스웨덴 73, 영국 42, 벨기에 39, 덴마크 32, 노르웨이 23, 러시아 13, 네덜란드16. 그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노동당은 연방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 또한 제2인터내셔널은 많은 노동조합원을 그 일반적인 영향과 지도하에 두고 있었다. 1912년 국제노동조합 서기국―본부 베를린, 서기장 칼 레긴―에는 19개의 전국적인 노동조합 중앙조직이 가맹해 있었고, 그 조합원 수는 739만 4,461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독일의 255만 3,162명, 미국의 205만 4,526명, 영국의 87만 4,281명, 프랑스의 38만 7,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 유럽의 노동자 협동조합운동도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의 지도하에 있었다. 1914년에는 대략 3만의 배급협동조합이 유럽에 있었고, 그 조합원수는 약 990만에 이르렀다. 영국에는 대략 300만, 독일에는 200만, 러시아에는 150만, 프랑스에는 88만 1,000이었다. 유럽전체에는 34개의 도매협동조합이 있었는데, 그 중 5개는 연간 4,000만 달러 이상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

(포스터, 『세계사회주의운동사』 Ⅰ, 동녘, 237, 238 쪽에서 발췌 인용.)

②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

그러면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20세기 초반에 사회주의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는 크게 세 가지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우익기회주의 경향, 중앙주의 경향,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이 그것이다. 이중 세계사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태세를 정비한 것은 레닌 등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뿐이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제2인터내셔널의 다수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예 혁명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 있었다.

우익기회주의 경향은 수정주의 경향의 연장선에 있는데 19세기 마지막 10년 후반에 등장한 수정주의는 20세기 초반에 형식적으로는 배격되었지만 수정주의의 맥을 잇는 기회주의는 이후 오히려 강화되어갔다. 독일사민당과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기회주의자들, 특히 레긴과 같은 노동조합내의 우익기회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상태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았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궁극목표’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었다. 이들은 말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주장하였지만 혁명은 생각지도 않았고 사실상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었다. 이러한 우익기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인식이 생길 수가 없었고 이러한 인식자체가 공상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중앙주의자들은 노골적인 우익기회주의자들과는 구별되었지만 은폐된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곧바로 태도가 변하지만 한때 혁명의 시대가 머지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중앙주의자인 카우츠키는 1909년도에 쓴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구체적인 조건들을 검토하고 이 조건들이 혁명의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결론을 재촉한다고 주장하였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가까운 부르주아정당들과의 공동노력, 이들과의 연립정부 구성의 전술로 혁명을 대체하자는 수정주의자, 우익기회주의자들의 요구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카우츠키의 입장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전쟁 전 몇 년 동안 독일에서의 정치 상황이 점점 더 첨예해지기 시작했을 때, 대중 투쟁이 확대되고 있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것이 이를 지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요구했을 때, 카우츠키는 이들에게 반대하였다. 비록 그가 여전히 이론적으로 대중파업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그는 대중을 혁명으로 준비시키는 이러한 투쟁형태를 옹호하는 선전을 방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는 대중행동에 의존하는 것은 더 이상 쓸모없는 “전복 전략”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과 대비시켰다.

1910년 카우츠키는 “바덴과 룩셈부르크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는데, 이 기사에서 그는 “맑스주의 중앙”의 대표로서, 바덴에서 부르주아지와 협력한 사회개량주의자의 전술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극단주의”, 의회 밖 투쟁방식을 옹호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둘 다와 거리를 두었다. …… 러시아 혁명, 그것의 전망과 국제적인 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자신의 이전의 견해를 “잘못으로 입증된” 것으로 포기하면서, 카우츠키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형태와 방법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에게도 러시아에서의 미래 혁명적 전투들에게도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투쟁의 의회적 방식에만 의존하였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서의 혁명에 전적으로 찬성하고 단지 그 “파괴적인” 형태에 반대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몇 년간 그것을 늦추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혁명이 일어날 경우, 지배계급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놓고 인민의 분노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위탁할 것이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국제노동계급운동연구소, 『국제 노동계급운동』, 3권 영어판, 289, 290쪽.)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태도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 우익기회주의 경향, 중앙주의 경향은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태세를 정비했을 뿐이고, 우익기회주의자, 중앙주의자들은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혁명에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더 이상 서로 같이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 중대한 원칙상의 차이,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중 어떤 계급의 편에 서있는가의 차이로까지 발전하였다.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③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사회국수주의, 중앙주의,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제2인터내셔널내의 기회주의경향은 이미 심각한 지경이었다. 제국주의전쟁은 기회주의경향의 본질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비교적 평화적인 자본주의발전의 시대에 오래전부터 곪기 시작한 종기를 터뜨려버렸다. 전쟁이 발발하자 기회주의자들은 무려 세 차례의 국제대회의 반전결의(1907년 슈투트가르트 결의, 1910년 코펜하겐 결의, 1912년 바젤결의)에서 확인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맑스주의적 원칙을 저버리고 국수주의자가 되어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따라 ‘조국방어’를 뻔뻔스럽게 외치기 시작하며 노동자계급을 배신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세력인 독일사민당의 의원들 전원은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부르주아지와 융커와 함께 임시군사예산에 찬성표를 던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의 사회주의당들도 독일 사민당의 길을 뒤따라 자국부르주아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이들은 자국의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형제인 교전국의 노동자계급을 학살할 것을 선동함으로써 결국은 노동자계급 전체를 대량살육의 장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말로는 사회주의를 떠들면서 행동으로는 자국 부르주아지의 부르주아민족주의를 추종하여 노골적인 국수주의자인 사회국수주의자들로 전락하였다.

카우츠키, 롱게, 마르토프 등 중앙주의자들은 에베르트, 샤이데만, 레긴, 게드, 플레하노프 등 사회국수주의자들의 옹호자, 대변자가 되었다. 이들은 입으로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떠들었지만 행동으로는 사회국수주의자들과의 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회국수주의자들의 본질이 밝혀지는 것을 방해하고 이들이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도왔으며, 이들을 완전한 정치적 파산 몰락으로부터 구원하였다. “노동자대중의 즉각적인 반발을 가져오는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맑스주의적 용어로 기회주의적 실천을 정당화하고 허다한 궤변으로 혁명적 행동의 시기상조성을 증명하려는 이 중용이론에 비해서는 차라리 두렵지도 유해하지도 않다”고 레닌이 말한 것처럼 중앙주의자들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해 원칙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적 입장을 지키고 투쟁한 것은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뿐이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7월 31일 국회에서 임시군사예산에 반대투표를 하였다. 8월 8일 러시아의 볼셰비키 의원들은 제4차 두마에서 임시군사예산에 반대하여 투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혁명적 선전을 행하였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Tesnyaks)은 1914년 7월의 대회에서 불가리아 부르주아지의 병합 기도를 비난하고, 그들에게 발칸 연방 공화국 요구로 반대하였다. 디미트로프는 국민 의회에서 불가리아 국수주의를 공격하였다. 12월 2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리프크네히트가 제국의회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전쟁에 대하여 반대함을 선언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 이들은 소수였지만 어려운 조건을 구실로 타협하지 않고 매우 용감하고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혁명적 흐름이 여전히 힘 있게 살아있음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전쟁의 발발과 이에 대한 대응을 통해 제2인터내셔널은 절대다수의 지도부가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음이 폭로되었다. 그 결과 제2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다른 한편 비록 당장은 소수였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이 세 차례의 반전결의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여 슈투트가르트 결의대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지향하여 간섭함과 함께, 전쟁이 야기한 정치, 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국민을 분기시켜 그것에 의해 자본주의적 계급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을 다”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전쟁 시기 볼셰비키의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는 슈투트가르트 결의의 충실한 실천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전쟁의 발발과 이에 대한 대응은 제2인터내셔널의 절대다수의 지도부가 자본가계급의 편에 섰으며, 비록 당장은 소수이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의 편에 서서 혁명적 투쟁의 흐름을 계승하고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개척할 위치에 서있음을 입증하였다. 이점은 우리가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힐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지점이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은 새로운 시대, 혁명의 시대의 도래에 선진적으로 대응하고 제국주의시대에 기회주의자, 사회국수주의자들, 중앙주의자들과 같은 배신자들과 철저히 결별하고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한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은 사회주의노동운동내의 여러 다양한 경향들이 이루어낸 여러 유형의 혁명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동맹세력으로 변질된 내부의 배신자들의 방해를 뚫고 혁명적 사회주의세력이 이룩해낸 혁명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고서는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제2인터내셔널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2인터내셔널은 정작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발발하고 세계사회주의혁명이 시작되자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기구로 전락하였다.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의 산물이고 또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제2인터내셔널이 혁명의 시대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다가 반혁명기구로까지 전락한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밝히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이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론』에서 해명한 것처럼 이미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단계에 이르러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의 일부로 노동자계급과 그 지도자들 일부를 매수, 포섭하여 노동귀족을 형성시켰다. 이들 노동귀족은 그 생활양식, 임금, 세계관 전체에 걸쳐 소부르주아지화하여 노동자계급 내에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이들이 제2인터내셔널내에서 기회주의가 창궐하는 토대가 되었다. 기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는 “노동운동의 “상층”의 하찮은 부분과 그것의 민족부르주아지 사이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대한 동맹, 부르주아지의 하수인과 부르주아지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착취되는 계급에 대한 동맹”(레닌의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이다.

사회국수주의는 이러한 기회주의와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라는 종양이 성장한 것이다. 즉, 사회국수주의는 기존의 기회주의의 연장선에 있으며, 기회주의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사회국수주의는 절정에 이른 기회주의이다”(레닌의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때문에 사회국수주의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내의 기회주의경향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전쟁을 계기로 가장 절정에 이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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