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100주년: 한인 사회당, 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깃발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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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하바롭스크에 소재한 1918년 당시의 극동 인민위원회 건물. 김알렉산드라는 이 곳에서 외무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아무르강이 굽이쳐 흐르는 극동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롭스크의 한 건물에 수십 명의 한인들이 모여들었다. 한 부류는 이동휘, 김립, 유동렬, 전일 등 러시아로 망명한 민족해방 운동가들이었고, 나머지는 김알렉산드라, 오와실리, 박애, 박진순 등 귀화 2세대 한인들이었다. 숙연한 가운데 회의가 시작되었고, 이동휘, 오와실리, 유동열, 김립, 김알렉산드라 등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직부, 선전부, 군사부 등 집행부서의 책임자도 뽑았다. 이어 ‘일체의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 및 일체 생산시설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조직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약법의 채택을 결의했다. 한국 최초, 나아가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예나 지금이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주류 역사가들은 한인사회당 창당의 의미를 조선 독립운동 전술의 한 방편으로 설명해왔다. 이동휘 등 급진적 민족 운동가들이 볼셰비키의 지원으로 조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한인사회당을 창당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는 극동지역 한인들을 반혁명에 대한 방패로 이용하기 위해 한인사회당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인사회당은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의 암묵적 거래로 탄생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설명은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거나,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의 억측과 달리 한인사회당이 탄생한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요컨대 한인사회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된 것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인 1918년 4월이지만,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로 대표되는 창당의 두 축은 1917년 이전, 즉 차르 체제가 건재하던 때부터 교류하며 한인사회당 창당의 기반을 다져온 터였다.

한인사회당 창당의 주춧돌을 놓다

신민회 사건을 겪은 뒤 1912년에 망명길에 오른 이동휘는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오가며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본과 한패가 된 러시아 차르 정권이 한인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자 이동휘는 북간도 나자구로 가서 김립 등과 함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무관학교는 일제의 방해와 경비 부족으로 인해 1년 만에 폐쇄되었다. 그러자 “1년쯤 노동을 하여 그 임금으로 무관학교를 살리자”고 맹약한 생도들은 전쟁물자 생산기지인 우랄 지방으로 가서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무관학교 생도들을 기다린 것은 밤낮 없는 노동과 형편없는 저임금이었다. 극동으로 돌아올 여비마저 없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김알렉산드라였다. 귀화 한인 2세로, 당시 우랄 지방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김알렉산드라는 노동자들의 법적 소송을 대리해주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인섭, 오성묵, 심백원 등 한인들과 함께 최초의 한인 노동자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나중에 한인사회당의 대중적 기반이 될 단체였다.

그 무렵 김알렉산드라의 남편 오와실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급진적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특히 1917년 7월부터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한인신보』 그룹에 몸담고 있었다. 『한인신보』는 연해주의 우파 한인단체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기관지 『청구신보』의 대항 매체였다. 당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소작농, 빈농 등 비귀화 한인들을 배제한 채 최례포, 문창범 등 귀화 한인 자산가들이 주도하며 멘셰비키의 러시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러시아 현지에 정착하여 자산을 일군 한인들과 빈농이나 소작농에 머물고 있던 한인들 사이의 계급적 간극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에 오와실리, 김립, 이한영, 유스테판, 박이반, 김병흡, 김하구, 장기영 등 사회주의자들은 『한인신보』 그룹을 결성하여 볼셰비키 성향의 극동지역 한인들에게 구심점 노릇을 했다. 이들은 나중에 한인사회당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앞서 1916년에 동림무관학교가 폐쇄된 후 중국령 왕칭현에서 지내던 이동휘는 러시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왔다. 그러나 독일 첩자 혐의를 쓰고 러시아 임시정부 당국에 체포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군인회 등 극동러시아 한인단체들은 이동휘 석방운동을 벌였다. 1917년 여름, 때맞추어 볼셰비키 조직활동을 위해 극동러시아로 파견된 김알렉산드라도 남편 오와실리와 함께 이동휘의 석방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한인사회당 창당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인 사회의 분열과 한인사회당 창당

그 사이에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러시아의 도시들도 차례로 볼셰비키에 접수되었다. 연말에는 하바롭스크에서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는 ‘제3회 극동지방소비에트대회’가 열렸다. 1918년 1월에는 극동러시아에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섰다. 김알렉산드라는 소비에트정부에서 중책을 맡았다. 그 사이에 이동휘 또한 무사히 풀려났다. 김립, 오와실리 등 『한인신보』 그룹은 볼셰비키의 지원 아래 하바롭스크에서 ‘아령(俄領)한인회’를 결성했다. 아령한인회는 러시아 내 모든 한인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통합을 제안해왔다. 아령한인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양측은 5개월여 실무 준비를 한 뒤 별도의 한족회를 조직하여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1918년 2월에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 등은 극동인민위원회의 후원으로 ‘한인혁명가대회’를 열었다. 신민회 출신 망명자들을 비롯하여 러시아령, 중국령 내 한인 운동가들이 여기에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볼셰비키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의 관계 설정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은 볼셰비키와 연계한 민족해방혁명을 주장했다. 반면 양기탁, 이동녕, 조성환 등 자유주의 민족 운동가들은 독자적이고 ‘순수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순수 민족주의자들은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이 대회는 이동휘와 김립 등 급진적 민족해방 운동가들이 우파와 단절하고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인혁명가대회 직후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한영, 오성묵, 오하묵, 이인섭, 김알렉산드라, 유스테판, 오와실리, 임호, 전일 등 13명은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당을 발기했다. 이어 4월 28일(러시아력)에는 하바롭스크에서 1차 당 대회를 열고 창당을 선언했다.

한인사회당 창당은 두 축을 따라 준비되었다. 하나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조선 민족해방운동 내부에서 몇 단계를 거치며 분립해온 급진적 민족해방운동 세력이었다. 다른 한 축은 걸출한 혁명가인 김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결집해온 귀화 한인 볼셰비키들이었다. 두 집단은 창당 이전부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결속력을 강화해왔다. 그 과정에서 한 부류는 볼셰비키에 대한 신뢰를 쌓으며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다른 한 부류는 가본 적도 없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해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상호작용이 마침내 한인들의 사회주의정당 탄생으로 이어졌다.

반혁명의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 아무르 등지에 8개의 지부를 설립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인노동회나 우랄노동자동맹과 같은 단체를 편입시키는 등 당세를 확장해갔다. 또 ‘보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하여 사회주의 선전사업을 펼쳤다. 그 결과 한인사회당의 당원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한인사회당은 극동소비에트 당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남만주 지역에 흩어진 소규모 독립군 양성학교를 통합해갔다. 홍범도 부대도 하바롭스크로 옮겨 왔다. 마침내 6월 말경에는 100여명의 보병으로 이뤄진 한인적위대를 편성했다.

한편 한인사회당은 6월에 열린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를 당세 확장의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아령한인회와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1월에 맺은 통합 약속에 따라 열린 이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만이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법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으므로, (통합 한족회는) 소비에트 정부의 지지와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볼세비키 극동집행위원장인 크라스노췌코프도 직접 회의장에 와서 소수민족의 자치와 평등권을 약속하며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회의 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귀화 한인 세력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통합한족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무렵 극동러시아에 반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다.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용된 체코군 포로들이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7월 6일에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다국적 지역으로 선포했다. 극동지역을 반혁명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8월 초에는 체코 군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간섭군을 파견했다. 특히 시베리아 출병을 선포하고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은 백위군과 합세하여 극동 일대를 유린했다. 볼셰비키 적위대는 이들의 반혁명에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인사회당 예하의 한인적위대는 볼셰비키 제1국제연대에 속하여 우수리 전투에 참여했지만 절반의 병력을 잃은 뒤 후퇴했다.

8월말에 볼셰비키 극동인민위원회는 마침내 유격전 체제로의 전환 결정을 내리고 아무르 주로 후퇴했다. 9월 초에는 한인사회당의 근거지인 하바롭스크마저 백위군에 함락되었고,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아무르 강을 건너 중국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하바롭스크 철수 과정에서 마지막 배를 탄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볼셰비키들이 카르미코프의 백위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한인사회당의 사상적, 조직적 지주였던 김알렉산드라는 9월 16일 새벽에 아무르 강변에서 처형되었다. 중국령에 은신한 채 혹독한 겨울을 맞은 이동휘 등은 동중철도연선 지역의 한인과 러시아령의 한인 운동가들을 은밀히 규합하며 정세를 예의주시했다.

3.1운동 후 제2차 당 대표자대회로 거듭나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식민지 재분할 협상을 위한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승전국들에게 호소하여 조선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발 빠르게 반응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이 파견되고, 여기저기서 독립선언서가 나돌았다. 3월 1일에는 국내에서 거국적인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일제의 폭력적 진압이 이어졌다. 정세가 급변했다. 백위군에 밀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던 한인사회당 지도부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자생적으로 폭발한 대중의 위력을 실감했다. 동시에 그 폭발력이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공전되는 현실을 보면서 사회주의 정당의 역할을 절감했다. 그간의 침체에서 벗어나 재기를 다짐한 이들은 2차 당 대표자대회를 준비했다.

2차 대표자대회는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 김립, 박진순, 김규면 등의 주도로 열렸다. 이 가운데 김규면은 2만여 단원을 거느린 ‘신민단’ 단장이었다. 따라서 신민단 대표 49명도 대회에 참석했다. 신민단은 신민회를 계승한 비밀무장단체였다. 본부는 원래 훈춘에 있었으나 한인사회당 합류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 신민단의 합류로 한인사회당은 수만 명의 지지를 받는 대중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창당 때와 달리 볼셰비키의 지원 없이 이뤄진 성과였다.

이처럼 급격하게 양적 확대가 이뤄지는 와중에 한인사회당은 명확한 계급투쟁의 관점에 관철된 강령을 채택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조선을 일제와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 둘째, 조선과 일본의 혁명적 조직들은 연대해야 한다는 것, 셋째, 프롤레타리아와 농업노동자를 조직하여 혁명사상을 교육시키고 이들이 일상적 계급투쟁을 벌이게 하는 것, 넷째, 평등과 정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착취자들에 대한 피착취자들의 억압이 필수적이므로 당은 소비에트 정부 형태를 가장 적절한 정부 형태로 간주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흔한 민족 개념은 언급도 되지 않고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의 관점이 명확하게 관철된 강령이었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당 대표자들은 식민지 재분할을 목적으로 하는 파리강화회의나 베르사유평화회의를 반대하고, 거기에 파견된 대표들의 소환을 결의했다. 또 모스크바의 국제공산당에 가입하기 위해 박진순, 박애, 이한영 등을 특사로 파견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상하이 임시정부나 러시아령의 대한국민의회 등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임시정부를 통합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는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한인사회당이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처럼 한인사회당 2차 당 대표자대회에서는 당원의 양적 확대와 더불어 명확한 계급투쟁 관점의 당 진로가 설정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와 국제공산당 가입

그러던 6월 말. 조선 독립과 관련된 아무런 소득 없이 파리강화회의가 종료되었다. 그간 외교방략에 기대를 걸고 있던 각지의 임시정부와 민족부르주아 진영은 허탈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임시정부 통합을 요구하는 대중적 요구가 커졌다. 그간 주도권 다툼을 이어오던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통합협상을 벌여 각자 해산 후 통합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한인사회당은 통합임시정부 참여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4월 대표자회의의 결의대로라면 부르주아 세력과 제휴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전체 운동에서 절대적 소수파인 사회주의 세력이 통합임시정부를 부정할 경우 일반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게 뻔했다. 민족해방운동 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과제도 외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민족주의 부르주아지가 일말의 혁명성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작용했다. 자연스럽게 조선혁명의 방향도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농업혁명으로 수정되었다. 결국 한인사회당은 상하이의 통합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고, 이동휘와 김립 등은 9월에 상하이로 넘어갔다. 그리고 11월 3일에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어 김립이 국무원비서 겸 서무국장에 임명되었고, 임시정부 공식 기관지 편집권 또한 한인사회당에서 맡기로 했다. 노령 한인들의 지지를 받는 한인사회당이 참여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동안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 한인사회당은 1919년 4월 대표자 대회에서 결의한 바에 따라 박진순, 박애, 이한영 등을 국제공산당(제3인터내셔널)에 파견했다. 7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특사단은 백위파가 지배하고 있는 시베리아를 천신만고 끝에 횡단하여, 11월 말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인사회당 당원명부와 박진순이 작성한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운동」 보고서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정부는 12월 7일자로 한인사회당의 국제공산당 가입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진순 등은 이듬해에도 모스크바에 머물며 7월 19일부터 열린 제3국제공산당 2차 대회에 참가했다. 2차대회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들의 관심을 끈 것은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였다. 주요 내용은 ‘민족혁명운동 지원에 관한 것’, ‘민족혁명운동에서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등이었다.

‘고려공산당’에 이름을 내어주다

그 무렵 소비에트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귀화 한인 김만겸과 국제공산당 극동국 책임자인 보이틴스키를 4만원의 자금과 함께 상하이로 파견했다. 이에 힘입어 상하이 한인사회당은 조직을 넓혀갔다. 특히 이들이 설립한 ‘사회주의연구회’를 통해 상하이의 많은 인사들이 사회주의자로 전환했다. 한편 한인사회당 파견대표로 모스크바에 갔던 이한영도 8월 초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런데 상하이로 오는 도중에 이한영은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단체 간부들을 만나 한인 공산주의운동의 통합에 대한 논의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한영은 이동휘, 김립, 김만겸 등에게 이르쿠츠크 측의 메시지를 전하며 한인사회당 명칭을 ‘공산당’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논의를 거듭한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앞서 이르쿠츠크에서도 김철훈, 최고려, 오하묵 등을 중심으로 ‘전로고려공산당’이 결성된 터였다. 그로써 ‘상해파’니 ‘이르쿠츠크파’니 하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고려공산당’의 시대가 들어섰다.

마침내 ‘한인사회당’이라는 이름은 고려공산당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인사회당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벌어지는 현장을 직간접으로 체험한 한인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정치적 결과물이었다.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쟁탈이나 제1차 세계대전 등과 같은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 역사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등장은 당시 ‘왜놈’들만 몰아내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믿고 있던 조선의 단순한 ‘애국자’들이나 조선민중에게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간 민족주의 일변도로 전개되어온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전선에 사상적 균열을 냈다. 더불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건설할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거시적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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